Switch Mode

EP.84

     

    “으으윽….”

    “후우….”

     

    남쪽 성채에 임시로 마련된 병동에는 벌써 이백 명이 넘는 기사들이 몸져 누워있었다.

     

    “손 비는 치유사는 이쪽 봐줘!”

    “남는 모포 좀 없나?!”

     

    1황녀파의 치유사들은 백작령에 도착한 이래로 눈코 뜰 새 없이 기사들을 치유했다.

     

    원정길은 길었다. 무려 한 달의 행군이었다.

     

    하지만 평소 황실 기사단의 강인함을 생각하면 그만한 피로로 이만큼이나 약해지진 않는다.

     

    더욱이 비무대회에서 우승까지 했던 헤이케의 1연대다.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다.

     

    그만큼이나 백작령의 환경이 제도와 달라 적응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제길, 아무리 손이 없어도 그렇지 주치의인 나까지 현장을 뛰게 하시다니.”

     

    알베리치가 남들 몰래 헤이케에게 불평을 쏟아냈다.

     

    외부 활동 중에는 주군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거늘, 헤이케는 한 명이라도 기사를 더 살리라며 알베리치를 포함한 모든 파벌 치유사를 내내 근무시켰다.

     

    기사단에는 최소한의 신성력을 다룰 줄 아는 신성기사도 약간 있긴 했다. 일종의 의무병이다.

     

    하지만 그들의 치유력은 내의원 치유사에 비하면 기대할 바는 못 되기에 이런 사태에서는 직접 뛸 수밖에 없다.

     

    “블뤼허 백작은 무슨 이런 땅에서 사는 건지 원. 자리를 비운 동안 전하께 변이라도 생기면 전부 내 책임이란 말이다.”

     

    알베리치가 투덜대며 골골대는 기사에게 치유주문을 시전했다.

     

    주치의답게 뛰어난 솜씨로 그의 얼어붙은 손발을 금방 원상복귀시켰다.

     

    문제는 동상은 체질을 타기도 해서 금방 재발한다는 것이었다.

     

    고산병도 마찬가지다. 제도에선 팔팔했던 기사들이 환경에 기를 빨려 계속 허약해지니 치유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이래서야 바닥이 뚫린 양동이에 물을 붓는 행위나 마찬가지군.”

     

    알베리치가 지겨움을 참지 못해 한숨을 푹 쉬었을 때였다.

     

    “자자, 먼저 진료받으실 분부터 줄 서십쇼!”

     

    문이 열리고 한 치유사가 기세등등하게 걸어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본 알베리치가 경악했다.

     

    “고, 고트베르크!”

     

    “예, 접니다. 보고 싶으셨어요?”

     

    “누가 그대를 보고 싶어했겠나! 여기까지 쫓아와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가?!”

     

    자동반사처럼 발작하는 알베리치에게 라스가 여유롭게 대답했다.

     

    “에이 음모는요, 치료하려고 왔죠.”

     

    라스의 뒤에서 월광궁 파벌의 치유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품에는 각자 약제를 잔뜩 안은 채다.

     

    짝짝, 라스가 손뼉을 쳐 신호를 보냈다.

     

    “바로 진료 시작하자고. 위급한 환자 있으면 구별해서 나한테 보내.”

     

    치유사들이 발 바쁘게 해산하며 환자들에게 다가간다.

     

    알베리치는 혀를 차며 경쟁하듯 자신도 다음 환자를 향해 달려갔다.

     

     

     

    ***

     

     

     

    “이봐, 정신이 좀 들어?”

     

    나는 쓰러져있던 기사의 몸을 일으켰다. 여태 반 기절해있던 그가 서서히 눈을 뜨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3황녀님의 주치의 선생님 아니십니까. 저를 고쳐주신 겁니까?”

     

    “그래. 생기가 좀 도니 보기 좋네. 정신 차렸으면 합류해서 몸 풀어. 당장 내일 출진 예정이야.”

     

    “정말 신기하군요. 분명 숨도 가쁘고 머리가 안개 낀 듯 어지러웠는데 마술같이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가 내게 인사하고는 일어섰다.

     

    나는 바쁘게 1연대의 진료를 이어나갔다. 진단 스킬을 사용해 고산병이면 이뇨제를, 동상에는 연고를 처방했다.

     

    “쯧, 공적을 뺏어가지 못해 아주 안달이 났군. 상도덕도 없는 꼬맹이 같으니.”

     

    우리 치유진을 지켜보던 알베리치가 뭐라고 꿍시렁댔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일단 무시하고 치료를 이어나갔다.

     

    “이봐, 자네들은 눈 뜬 장님처럼 멀뚱히 서 있을 텐가? 가서 치유주문을 사용해!”

     

    알베리치가 자기 파벌 치유사들을 윽박지르니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여기선 협업이 필요한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신호를 보내니 내 치유사들이 알베리치 파벌을 막아섰다.

     

    “주교님, 하나 알려드릴 사실이 있습니다. 저희가 치료한 기사들 중 팔에 붉은 손수건을 둘러놓은 이에겐 치유주문을 사용해선 안 되니 주의하십쇼.”

     

    “뭐라고? 전장에 나갈 기사에게 치유주문을 사용하지 말라는 게 무슨 소린가!”

     

    “대신 축복을 신경 써서 시전하길 부탁드립죠. 그들은 고산병 치료제로 이뇨제를 투약받은 상태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는 겐가!”

     

    알베리치가 성을 냈다.

     

    하긴 이렇게 얘기해도 못 알아들을 건 당연하네.

     

    어느 정도는 차분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쉽게 말하자면 고산병은 숨이 부족한 높은 지형 때문에 생깁니다. 숨은 혈액을 통해 온몸 곳곳으로 전달되지요.”

     

    “그래서?”

     

    “숨의 전달량은 개인차가 있습니다. 저 기사들은 본래 전달량이 적은 체질이죠. 지형 때문에 숨이 더욱 적어져서 병세가 든 것입니다. 그래서 피가 다니는 길, 혈관을 팽창시켜 숨의 양을 늘리는 치료를 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내 옆에서 휴고가 거들었다.

     

    “강이 좁아 물이 흐르지 못하니 땅을 파놓은 것이라 보시면 됩니다.”

     

    “…흐음.”

     

    “주교님도 잘 아시겠지만 치유주문은 신체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원리입니다. 팽창한 혈관도 원래대로 수축시키기에 고산병이 재발하게 됩니다.”

     

    “허, 그래서 치유주문을 쓸 수없다?!”

     

    알베리치가 발을 구르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저 기사들이 전투 중에 부상을 입으면 어찌하란 말인가!”

     

    “그때는 치유주문을 쓸 수밖에 없겠지요. 주교님 파벌에서 집중 케어해 주십쇼.”

     

    알베리치가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약제가 가진 약점을 내 파벌이 떠안으란 소리인가? 치유주문과 병행이 안 되어서야 엉망진창인 기술 아닌가!”

     

    “대부분의 약제는 같이 쓸 수 있습니다만 이번엔 조금 특수한 상황이군요. 어차피 고산병을 치료하려면 제 약제가 유일한 방법이지 않습니까.”

     

    “한심하군. 본대의 전투력이 약화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치유술과 상충한다는 건 여신님의 가르침과도 상반된다는 의미 아니겠나! 이 건은 전하께 보고하겠다!”

     

    “그러시죠. 저는 아직 치료할 기사가 남았으므로.”

     

    알베리치가 쿵쿵대며 상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그는 치유주문을 지나치게 신봉하고 있어서 말을 통하기 어렵다.

     

    나는 마저 남은 기사를 돌보기로 했다.

     

     

    그러고 있으니 잠시 후에 헤이케가 알베리치와 함께 내려왔다.

     

    그녀가 내 앞에 섰다.

     

    “전하.”

     

    “보고를 받았다, 고트베르크. 우리 기사들에게 치유주문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사실인가?”

     

    헤이케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알베리치가 바짝 붙어있었다.

     

    그새 진짜로 꼰지르기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사실입니다, 황녀 전하.”

     

    “어째서인가?”

     

    알베리치에게 설명한 것과 똑같이 다시 한 번 이뇨제의 작용 원리를 헤이케에게 이야기했다.

     

    내 말을 들은 헤이케가 고심에 빠졌다.

     

    “그 이뇨제를 처방한 기사는 몇이나 되나?”

     

    “대략 팔십입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기사에게만 처방했습니다.”

     

    “전체 병력의 5푼이군. 그 정도라면….”

     

    헤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 기사들을 후방으로 배치해 치유할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써라.”

     

    “하오나, 전하!”

     

    알베리치가 억울하다는 듯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헤이케는 오히려 그에게 면박을 주었다.

     

    “고트베르크의 약제가 없었다면 전투에 참가 조차 하지 못했을 병력이다. 쓸 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현장에서 그만큼 저희 치유사들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늘어나 부담이 됩니다. 애당초 치유술과 상충하는 기술이 도대체….”

     

    “그 부담을 지라고 내가 자네에게 거액의 월급을 주고 있지 않는가?”

     

    헤이케가 말을 끊자 알베리치가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알베리치, 고트베르크의 약제보다 나은 대안이 있는가?”

     

    “…그건 시간을 주시면.”

     

    헤이케가 철제 장화로 쿵, 바닥을 찍었다.

     

    “알베리치,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지금 시간이 대관절 어디에 있는가. 백작을 포함한 민간인이 고립되어 있단 말이다. 내부 상황도 정확히 모른다. 식량이 떨어졌을지도 모르지. 병세 때문에 늦어진 출전을 고트베르크 덕에 겨우 내일로 당겼단 말이다.”

     

    헤이케가 압박하자 알베리치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 마음 이해하지. 나도 아셀라가 닦달하면 영업용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 말고는 할 게 없어지니까.

     

    “할 일이 없으면 잠이나 자게. 내일은 긴 하루가 될 것이야. 체력을 비축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베리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헤이케가 자리를 나서고 그가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좋은 꿈 꾸십쇼.”

     

    알베리치가 나를 향해 힘차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마땅한 대답을 찾지는 못했는지 입을 쩝쩝대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

     

     

     

    ―챙! 챙!

    ―와아아아!!

     

    멀리 동쪽에서 검을 휘두르는 소리, 기사들의 우렁찬 함성, 야만인들의 고함이 섞여 들려왔다.

     

    산에 몇 번이나 반사되어 메아리치는 소음 덕에 피부가 저릿저릿하다.

     

    “헤이케 황녀님이 출전하신 지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월광궁의 기사단장, 발터가 아셀라에게 보고했다.

     

    우리는 남쪽 성채에서 서쪽 성채로 이어진 길목에 포진했다.

     

    헤이케가 이끄는 1연대가 동쪽 성채를 선제공격해 공략하는 중이다.

     

    작전대로 헤이케는 미끼다. 백작령 성채 여기저기 흩어진 야만족들을 모두 동쪽 성채로 불러들인다.

     

    그 사이에 우리가 서쪽 성채를 통해 중앙으로 진입하고 다리를 끊어 제압한다.

     

    민간인을 구출하면 동쪽 성채에 고립된 적을 몰아서 한 번에 토벌한다.

     

    “정찰병 보고드립니다. 1황녀군은 예정대로 대치를 이어가며 적을 유인 중입니다. 백작령 전역의 야만족 약 7할이 동쪽 성채에 몰렸습니다. 다만 중앙 성채는 움직임이 없습니다.”

     

    “정말 공자의 말대로 됐네.”

     

    “말씀드렸죠? 단순한 놈들이라고요.”

     

    마법 예장으로 갈아입은 아셀라가 묶은 머리를 휘날리며 지팡이를 들었다.

     

    “중앙 성채만 움직이지 않는 건 그나마 머리 쓰는 야만족이 있거나, 숨어있던 민간인을 발견하고 대치하느라 생긴 현상이겠어.”

     

    아셀라가 판단했다.

     

    “시간을 더 끌어도 중앙 병력을 유도하긴 힘들겠어. 진격을 시작하지. 단장, 명령을 내리도록 해.”

     

    “전군! 전진하라!”

     

    기사단장이 우렁차게 외치자 선봉대부터 척척 발걸음을 옮긴다.

     

    남쪽 성채와 서쪽 성채를 잇는 성벽 다리 위를 단단한 철갑이 물들여간다.

     

    나와 아셀라는 후방에서 진형을 확인하며 걸음을 옮겼다.

     

     

    중간을 넘었을 즈음, 마침내 적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르륵! 고기!

    ―크크크! 부순다!

     

    눈치 없이 서쪽 성채에 남아있던 야만족 잔당이 고개를 쳐들고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머리에는 마물의 두개골을 쓰고 전신을 털가죽을 벗겨 그대로 입었다. 허리를 굽히고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는 모습은 인간보다는 무기만 든 육식동물에 가까웠다.

     

    “비켜. 한 번에 처리하겠어.”

     

    아셀라가 눈을 번쩍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법진이 그려진다.

     

    그때 시스템창의 확률이 변동했다.

     

     

    [No. 056 : 악녀의 증오 7% → 10%]

     

     

    ‘이건 이유 없이 아셀라에게 살해당하는 엔딩인데.’

     

    미미한 수치긴 해도 지금 이게 올라간다는 건 전투에서 아셀라의 폭력성이 상승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셀라의 팔을 잡아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황녀님, 마나는 조금 아껴두시죠.”

     

    “왜 방해해? 눈보라 마법이면 한 번에 치워버릴 수 있단 말이야.”

     

    생각해보면 아셀라는 아직 사람을 향해 마법을 써본 적이 없을 터였다.

     

    혹시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지 못하게 막으면 조금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황녀님의 마법은 나중에 다리를 끊을 때 쓰도록 하지요.”

     

    “그럼 쟤들을 순전히 우리 기사들로 토벌해? 저 숫자를 봐. 대부분 동쪽 성채로 빠졌어도 군대나 마찬가지야. 저렇게 흉악한 무기도 있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저희에겐 타냐가 있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타냐가 최전방으로 달려나가며 검기를 뿜었다.

     

    ―콰과광!!

     

    그녀가 휘두른 검에 뛰어들던 야만족들이 일도양단되며 나가떨어졌다.

     

     

     

    다음화 보기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