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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4

        

         “으… 얘를 어찌해야 좋을까….”

         

         내 앓는 소리에 주변을 둘러보던 깡통은, 말없이 경계 레벨을 이잡듯 훑는 수준까지 높였다.

         스테이지에 설치된 조명 마냥 번쩍거리는 스캐너 불빛이 거슬린 주변 시민들이 이쪽을 돌아봤으나… 한바탕 격전을 치른 게 분명한 그의 훈장들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네트워크 상으로 날 찾고 있다고 무조건 근방에서 파이브 아이즈 잔당들이 대기하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나 거리의 제약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커가 상대라면 더더욱 그럴 가능성도 낮았고.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

         

         “굳이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버틸 필요는 없어. 위험하다 싶으면 외곽 쪽으로 빠져버려, 우리가 책임을 질 만한 일도 아니니까 이건.”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딱히 이견이 없었는지, 깡통이 곧바로 안전 요원들이 있는 광장 가장자리로 미끄러지듯 자리를 옮기기 시작한 걸 확인하고 단말기에 온정신을 집중했다.

         

         그나마 로잘린이 치근덕대는 집착 대상이 아시프의 팔을 뽑아버린 깡통이 아니라 나라는 게 다행이었다.

         ……아닌가? 혹시 전부 내가 의도한 바라고 오해하고 있으려나? 잘 모르겠네.

         

         역시 이럴 때는 당사자에게 물어봐서 확실히 하는 게 최고겠지.

         

         > …잘도 저질러 주셨네요. 뭐가 기업에 고자질은 안 한다는 건지, 덕분에 몇 명은 활동 지부를 옮기게 생겼어요!

         

         채널에 입장하자마자 쏟아지는 하소연.

         복수 같은 드센 단어로 사람을 불러들인 것과는 정 반대되는 약한 소리였지만… 그녀도 알고 있어서 이리라.

         

         인정하기 싫어도 이번 건은 자업자득인 부분이 많다는… 대부분이란 걸.

         

         > 우리 말은 똑바로 하자? 내 타협안을 먼저 무시한 건 그쪽 결정권자인 아시프고, 말리지 못한 로잘린 너도 떳떳하지는 않을 텐데?

         > 그건……!! 그렇네요. 네….

         

         어라?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찮다. 그냥 시원찮은 것도 아니고 심심하다.

         열렬한 발작까지도 각오했는데, 당황은 고사하고 이렇게 담백하게 수긍할 줄이야.

         

         넌지시 던져진 본명 정도는 별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는 걸까?

         생각해보면 아무리 불살주의니 계몽이니 이상론을 외치는 친구들이라 해도, 반기업 활동으로 지명수배까지 당하고도 주요 메트로폴리스에 숨어사는 범죄자들이었다.

         

         겨우 이런 하찮은 도발이나 심리전으로 우위를 점하기엔 줄타기가 일상에 가까운 인간들이었을지도….

         

         > …잠깐! 잠깐만요!! 아나스타샤 당신! 뭘 자연스럽게 리더랑 제 이름까지 부르는 건가요?! 감청 대책은 절대로 완벽했을 텐데!

         > 야 이….

         

         “후….”

         

         터치 패널을 팡팡 내려치려던 팔을 겨우 자제했다.

         본인이 만든 결과물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그… 좀 더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래서야 먼 훗날 같이 일하게 될 때 내가 널 어떻게 믿겠니!

         

         속에서 치솟는 열불을 경로를 바꿔 문자로 토해냈다.

         

         > 나도 나름대로 조사를 했지. 그래서, 이제는 진짜 잘 알았지? 내가 독한 마음 품었으면 풀어버릴 너네 신상 명세도 있었다는 걸.

         > 으… 그렇지만…!

         > 그리고! 더 수다 떨기 전에 이거 하나만 확실히 해둘게. 복수랍시고 네트워크 상으로 툭탁거리는 건 오케이. 그런데 아까처럼….

         

         슬쩍 옆으로 손을 뻗어서 아시프의 도끼 자루를 만져보았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뽑아볼 건덕지도 없이 굳게 꽂혀 있는 게 느껴졌다.

         ……야야 깡통아, 필요한 거 아니야! 굳이 힘들게 꺼내서 나한테 건네 주려고 안 해도 돼!

         

         기계에 덧날 상처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으나, 일단 날붙이를 비트는 케어봇부터 진정시켰다.

         로잘린처럼 눈치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얘처럼 기색이 너무 날카로운 것도 여러모로 부담된다.

         

         > 선 넘는 방식으로 덤벼들면 나도 더는 못 참아. 아니, 안 참을 거야.

         > ….

         

         재깍재깍 돌아오던 답변이 뚝 끊어졌다.

         상의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는 아니고 퇴근 전까지 줄 수 있다. 그 뒤는 모르겠고.

         

         침묵이 길어져서 너무 세게 나간 걸까… 걱정됐지만. 결국 무의미한 분쟁이라는 거에 그녀도 동의한 모양이다.

         

         > …좋아요. 대업을 위한 아군을 확보하지는 못할 망정, 괜한 적을 늘릴 수는 없죠.

         > 다행이네, 멈춰 준다니.

         

         …드디어 끝났다. 납득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쓰잘데기 없이 길었던 신경전이 당사자 공인으로 확실하게 종료되었다.

         

         그럼 이제 남은 일정도 없겠다. 느긋하게 크리스마스 이벤트나 구경해보려고 했는데….

         

         > 은혜도 모르고 복수라는 계속 단어를 고집할 만큼 파렴치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그 대신…… 승부입니다!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뭐라고?

         하나도 재미없는 말장난이라고 답변해주기도 전에, 그녀와 파이브 아이즈가 준비한 이벤트가 시연되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부터! 대망의 점등식까지 1분, 카운트다운을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본을 따라 매끄러운 진행을 계속 하던 사회자의 뒤편.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미관을 신경 쓴 건지 제품 광고는 잠시 멈춰 둔 채로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송출하면 모니터들이 하나둘씩 흐려졌다.

         

         지직… 지지직!

         

         그걸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민들이야 그저 연출의 일부인 줄 알고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공포 영화도 아니고 화면이 차례차례 노이즈 증상으로 도배되어가는 기발한 예술은 22세기에도 없으리라.

         

         > 난 그런 승부에 동의한 적 없어!

         > 동의를 구하는 테러리스트가 세상에 어디 있나요!!

         

         얘는 치사하게 이럴 때만 맞는 말을 하네!

         

         황급히 사이버웨어를 확인해봐도 따로 탐지되는 괴전파는 없었다.

         아마 광장 네트워크나 행사장비들과 인접한 전산망에 숨어든 걸로 추정되는데… 내가 즐겨 쓰던 백도어 테크닉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내막을 아는 나도 흠칫했는데 일반인들은 오죽 했을까.

         

         초대형 트리에 촘촘하게 매달린 모니터의 과반 이상이 백색 소음만을 내보내고, 캐롤 송을 재생하던 스피커도 점거 당해 슬슬 분위기가 이상해지던 찰나.

         

         > !! 말로 방심시키고 기습을? 승부할 의지도 가득하셨으면서 왜 빼는 척하신 건가요!

         

         “오?”

         

         제어를 탈취당했던 장비들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에 따라 거무죽죽해졌던 사회자의 안색도 조금씩 회복된다.

         

         한창 신난 로잘린에게 정직하게 말한다고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이건… 행사장의 중앙 시스템(Main Frame)을 탈취하려는 그녀의 대담한 손길을 결국 눈치채고 막아선 것이다.

         

         내가 아닌, 고용된 다른 해커 용병들이.

         

         > 당신 아까도 제가 당했다고, 또 비겁하게 이런 멀티태스킹 싸움을…!

         

         그 칼바람 속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은 게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잔뜩 열 오른 그들의 총공세에 시달리는 게 분명한 로잘린이 분통을 터트렸다.

         

         > 이이익!!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 트래픽을 폭주시켜서라도 다중 접속자들을 떨쳐내 드리죠!

         > 앗?! 방심하셨군요! 관리자 권한은 고유번호를 부여해서 제한했으면서, 방화벽 설정 권한은 이렇게나 무방비하다니!

         > 아하핫♪ 어떠신가요! 자기 안방에서 쫓겨나신 기분은?

          > 너무 쉽게 당황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나스타샤! 낮과는 달리 반응이 현저하게 느려졌네요!

         

         > 어… 그래.

         

         다시 보니 분통이 아니라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고 해야 할지,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수십 명은 넘었던 걸로 기억하는 네트워크 망령들과 정면으로 머리를 박으면서도 금새 여유 되찾은 로잘린도 보통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 싸우는 상대가 내가 아니라고 부정하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말 하기 뭐할지도 모르겠는데, 당사자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실컷 스트레스를 풀고 나면 이 말괄량이도 조금은 얌전해지리라는 기대를 품은 개인적인 사견이다.

         

         > 이러면 승패는 금방 결정되겠네요!

         > 응응. 편히 해, 편히.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다.

         한 발자국 떨어진 것만으로, 쟁점에서 살짝 벗어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정신이 편해진다.

         

         흡사 명절 때 조카들과 자동으로 놀아주는 혁명적인 시스템이 발명된 것 같았다.

         뭐, 그로 인해 사회자 씨가 뒷목을 부여잡고. 슬금슬금 모니터에서 출력되는 반기업 선전물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틀어막고 비웃음을 참거나 수근거리긴 했지만….

         

         – 그들은 이러려고 일부러 무대 장비를 준비했던 겁니까? 상당히 온건한 저항군이군요. 악명에 비하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

         

         “원래부터 그런 기치를 내걸었던 애들이니까.”

         

         위험 레벨을 하향조정하겠다는 깡통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건물 벽면을 비추는 건 파이브 아이즈를 상징하는 눈동자 모양 조명.

         스테이지 근처 음향 장치와 곳곳에 숨겨진 스피커에서는 ‘기업의 압제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같은 문장이.

         마지막으로 거대한 트리는 도배된 선동 영상으로 인해 말 그대로 불법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음… 이건 분명 굴욕적인 사건으로 대서특필되겠네.

         

         > 자, 저희가 준비한 ‘테러’는 어떠신가요! 당신도 반기업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이라면 관문 폭파처럼 일반 시민들이 위협을 느낄 방식이 아니라, 파이브 아이즈를 본받아 기업을 낭패하게 만드는데 집중하시죠!

         

         어쭈? 위선적이라고 한 훈계를 이렇게 돌려줄 줄이야.

         그 와중에도, 이제는 나를 무슨 단독 활동하는 반기업 운동가 취급하는 게 또 우스웠다.

         

         그럼 어디…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상황실 환자들의 원수나 갚아 볼까?

         

         ……왜 또 자라나는 민주주의의 싹을 마구 짓밟으려 드냐고?

         대답은 지극히 간단하다. 지금 이 광경을 실시간으로 직관했을 게 뻔한 아론이 용건이 있을 때만 사용하기로 한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으니까…!

         

        사람 살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빨간맛 아나스타샤, 재차 출격…!

    분명 오늘 연재 분으로 에피소드를 마무리지으려 했는데, 어떻게 단락을 수정해봐도 안 되네요… 죄송합니다.
    차라리 일찍 승복하고 쓰는데 집중할 걸… 괜히 지각만 오지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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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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