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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4

       -소녀는 멍하니 분수대를 보았다.

         

       촤악, 하고 물이 힘차게 치솟는 분수대.

       남쪽 거리 광장의 명물이자, 신분 상관없이 모두가 볼 수 있는 분수대는 보석이나 금, 그리고 대리석 등이 아낌없이 쓰여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또한 저토록 귀중한 귀금속 등이 아낌없이 쓰여 훔쳐갈 우려가 있으니 경비대가 항상 교대로 분수대를 지키고 있는 바.

         

       실상 이 중앙 광장만큼 안전한 구역도 없을 터이며,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도 전무했음이다.

         

       그래서일까.

         

       “……조용하네요.”

         

       혼자서 사색을 즐기기 좋은 장소.

       괜히 분란도 일어나지 않고, 방해꾼조차 없기에 마냥 앉아만 있어도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정도로.

         

       ‘후우, 그럴 수는 없겠죠.’

         

       안타깝게도 일정 시간 이상 너무 오래 있으면 경비대의 시선을 사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니 이곳에 오래 머무르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풍성한 푸른 수국을 연상케 하는 우아함과 단아함을 동시에 지닌 소녀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오.”

         

       그리고 소녀가 지나갈 때마다 경비대의 시선이 모였는데, 이는 소녀가 수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단순히 어여뻐서.

         

       “저 애, 예쁘네.”

       “처음 보는데, 저런 애가 이 거리에 있었던가?”

       “꽃집 아가씨보다 예쁜 애는 처음인데….”

       “그 얘기 분명 빵집 아가씨한테 반했을 때도 똑같이 했지 않았었냐?”

       “원래 사랑은 갈대 같은 법.”

       “미친 놈.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그냥 색욕이야, 인마.”

         

       젊고 혈기왕성한 청년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경비대다.

       비록 경비 일을 대충 해선 안 될 노릇이지만, 돌아가는 눈알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

         

       즉, 혈기 넘치는 남정네들이 예쁜 여성을 보고 눈이 돌아가는 건 자연의 이치란 거다.

         

       “복장을 보니 평민 같은데…, 이봐. 잠시 내 자리 좀 지켜줘.”

       “미친놈. 경비는 안 하고 어딜 가려고?”

       “무슨 소리야? 난 ‘거동수상자’를 잠시 살피기 위해 가는 것뿐인데. 이것도 엄연히 임무라고.”

       “…괜한 짓 했다가 시말서로 안 끝난다. 지금 왕도 분위기 살벌한 거 몰라?”

       “괜찮다니까 그러네.”

         

       무식하면 용감한 건지, 아니면 뇌가 사타구니 쪽에 지배당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남성 경비대원 중 한 명이 거침없이 소녀에게 다가갔다.

         

       경비병 신분으로 몰아붙여 통성명이나 좀 하기 위하여.

         

       그렇게 경비병은-.

         

       투욱.

         

       “이봐, 형씨. 새치기를 하면 안 되지. 내가 먼저 저쪽에 볼일이 있는데.”

       “넌, 뭐….”

         

       일순 경비병 남성은 입을 다물었다.

         

       언제 그의 옆까지 다가온 건지 모를 낯선 이가 어깨 위로 팔을 걸치니 바로 인상이 구겨지는 그였지만, 상대방을 확인하자 절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컸다.

       남성은 엄청나게 컸다.

       웬만한 성인 장정의 세 배를 압도하는 기골의 장한.

         

       허나 경비병이 압도당한 이유는 상대방의 덩치가 마냥 거대해서만 이러는 게 아니었다.

         

       ‘뭐, 뭐야 이 새끼!? 눈이 뭐 저래….’

         

       눈이 무섭다.

       웬만한 범죄자를 마주쳐도 강단 있는 경비병조차 서늘할 정도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치 정육점에 걸린 고기처럼 보는 살벌한 시선 앞에서 경비병은 뱀 앞에 쥐처럼 마냥 몸이 굳었다.

         

       “형씨, 조용히 가. 조용히.”

       “가, 감히 경비대를 협박하는 건가…, 거, 겁을 상실해도 유분수지, 어디서 감히…!”

         

       그래도 경비대의 자존심이란 게 있는 법.

       상대가 무서울지언정 경비대의 이름을 믿는 그였고, 충분히 먹힐 협박이라 생각했지만.

         

       “형씨가 마크보다 지위가 높아?”

       “……뭐?”

       “형씨네 상관 말이야. 짝눈이고, 술집을 유독 좋아하는 양반이지. 그래도 생긴 거랑 달리 경비대장이라고 했던가?”

       “!!!”

       “근데, 형씨 이름이 뭐야? 설마 마크 부하 중 이렇게 기개 있는 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이름이나 알려줘야겠어. 당신 밑에 이토록 훌륭한 부하가 있다고, 하하.”

       “…….”

         

       그는 하늘과 같은 상관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거한에게 감히 아무런 말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거짓말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경비대장이 짝눈인 건 뜻밖에도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항상 의안을 끼고 다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저 말을 마냥 거짓으로 여길 수 없었고, 경비병 남성은 마냥.

         

       “…시, 실례했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설 따름이었다.

         

         

       거한은 만족스레 웃었다.

         

       * * *

         

       소녀, 아니 레비는 저를 향해 다가오며 어울리지도 않는 친절한 미소를 지은 거한에게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설마 자신을 감시한 것일까?

         

       한차례 서늘함이 지나갔지만, 레비는 애써 속내를 숨기며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지요. 아직 약속된 시일은 멀었을 텐데요.”

       “별거 아니오. 그냥 아가씨를 호위하려고 온 것이지. 괜히 아까 그 버러지처럼 이상한 것들이 엮이면 안 되지 않겠수? 아가씨는 소중한 ‘상품’인데.”

       “…….”

       “아, 말실수. 내가 워낙 천한 놈이라 단어 선택을 잘못했네! 이거 원, 입이 화근이구먼.”

       “…그냥 가세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건 문제가 아니니까.”

         

       불쾌감이 온몸을 스쳤지만, 레비는 참을성을 발휘했다.

         

       허나 거한은 그런 레비의 성실한 인내를….

         

       “그럴 수는 없지. 아가씨가 언제 도망갈지 어떻게 알고.”

       “!!”

         

       가차 없이 짓밟았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전 약속을 했고. 그걸 지키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어요. 한데 그런 제 약속을 신뢰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비록 이토록 당하는 입장이지만, 레비는 귀족이다.

       그리고 귀족의 약속에는 무게와 신뢰가 있어야 하는 바.

       폴트 가의 이름을 자긍심처럼 여기는 레비로선 저러한 의심 자체가 커다란 모욕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내가 그놈의 귀족의 명예를 한두 번 겪어봤을 것 같수? 명예는 개뿔, 하나같이 거짓부렁만 늘어놓던 망나니밖에 없더만! 한데 내가 왜 아가씨를 믿어야 하오? 그것도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아가씨를.”

       “…….”

         

       상대는 더 큰 모욕을 내뱉었고, 레비의 손은 어느새 레이피어에 가 있었다.

       언제라도 뽑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허나 거한은 콧방귀를 꼈다.

         

       “아가씨가 그 나이치고 제법 날카로운 한 수가 있는 건 알겠는데, 나한텐 안 되니까, 그 칼 집어넣으슈. 괜히 팔이나 다리 한 짝 잃고 싶지 않으면.”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바엔, 차라리 장애가 생기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죠.”

       “…거 눈이 진심인데.”

         

       쩝.

         

       거한은 그제야 평소 상대하는 귀족들과 달리, 소녀가 상당히 우직한 성품임을 깨달으며 입맛을 다셨다.

       괜히 말다툼을 했다가 피를 보게 생겼으니, 원.

         

       ‘고리타분한 기사 같은 계집이구먼. 이걸 어쩐다, 진짜 어디 한 군데 분지를 수도 없고.’

         

       다시금 말하지만, 소녀는 소중한 상품이다.

       이를 감히 상하게 했다간….

         

       ‘조합장한테 괜히 한 소리 듣겠지.’

         

       그건 사양이었고, 거한은 말로 타이르자며 방향을 바꿨다.

       이 고상한 귀족 영애를 순순하게 만드는 수단은 아무래도.

         

       “-우리말을 순순히 안 들으면 아가씨네 여동생이나 부인 쪽을 건드리는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길 원하슈?”

       “당신…!”

       “그러니까 말 좀 들으쇼.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고상한 인간을 상대할 때 최고의 수단은 양아치가 되는 거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 등을 건드리면 열의 아홉은 다 순해지더라.

         

       아니나 다를까.

         

       “…괜한 협박하지 마요. 협조할 테니까.”

       “하하, 진즉 그럴 것이지.”

         

       거한은 만족하면서도 신기했다.

       아무리 가족이라 한들, 개인의 인생이 걸린 건데, 왜 저토록 지극정성으로 모든 걸 바칠 수 있는 걸까?

         

       ‘나 같으면 가족이건 뭐건 다 팔아버릴 텐데. 하여튼 배가 불러서 저래.’

         

       그처럼 고단하게 살았다면, 가족이건 애인이건 다 부질없음을 알았을 텐데.

       이렇게 보면 귀족 영애란 것도 불쌍하다.

         

       ‘아니다. 이 경우엔 애비를 잘못 만난 거려나?’

         

       이 고상한 소녀와 달리 딸을 팔아먹는 아비.

       가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언젠가 여기사가 될 재목을 팔아넘기다니….

         

       우습고도 또 우습다.

         

       이런 걸 보고 소위 개 새끼 아래에 호랑이가 태어난 격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스읍, 군침 도는데.’

         

       거한은 이런 여자가 좋았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고결함 등을 가진 효녀.

       거기다 자신 같은 천 것이 감히 노릴 수 없는 귀족 영애이기까지 않는가?

         

       ‘곱기도 곱고.’

         

       거한은 욕망이 들끓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낡은 복장을 입은 소녀지만, 감출 수 없는 기품과 미색이 감돈다.

       아직은 어려 그 미색이 완전히 꽃피우지 못했지만, 꽃을 피우지 못했다고 한들, 꽃은 꽃인 법.

         

       꺾을 보람이 있으니.

         

       ‘어차피 한동안 같이 붙어 다녀야 하는데…. 그동안 잘 구슬려봐?’

         

       이미 소녀의 약점은 파악했다.

       가족을 걸고 수시로 트집 잡는다면, 침대까지 밀어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조합장도 시일이 될 때까지 보호하라고만 했지, 건드리지 말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여 거한은.

         

       ‘살짝만….’

         

       시작은 소녀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기대는 것으로 시작하려고 했다.

         

         

       “-그 팔짝 앞으로 네 인생에서 필요 없단 뜻으로 받아들이마.”

         

         

       뿌득!

         

       다만, 주체 못 할 욕망을 우선시한 것이 어떠한 불행을, 아니 ‘재앙’을 초래할지를 거한은 알아야 했다.

         

       …뒤늦은 깨달음에 불과하겠지만.

         

       “끄아아아악…!”

         

       “짖지 마, 이 새끼야.”

         

       -죽을라고.

         

       콰직!

         

       비명을 지르던 거한의 입이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강제로 입을 닥쳐야 했다.

         

       “—–!”

         

       거한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버둥치고 싶었지만, 그의 입을 막은 손에서 느껴지는…!

         

       ‘완력’ 자체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압박감에 전신이 다 짓눌려지는 끔찍한 경험을 체험 중이었다.

       허나, 체험은 이제 시작이란 듯-.

         

       콰드드득, 콰득…!

         

       “!?!!!”

         

       몸이 결코 접혀서는 안 될 방향으로 접히고 있었다.

         

       척추에서부터 들려오는 불길한 파열음.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공포’가 밀려들며 거한은 필사의 저항을 선보였다.

       사람이란 목숨의 기로 속에서 가끔 초인적인 힘을 내는 법이니까.

         

       다만 거한에겐 아쉽게도.

         

       “지금 힘 준 거냐? …덩치가 아깝다.”

         

       상대는 진짜 초인을 겪어본 사람이었고, 이따위 저항은 같잖지도 않다는 점이 거한의 첫 번째 불행이리라.

         

       쿠웅!

         

       그가, 이한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을 지은 채 거한을 땅바닥에 연신 찍어댔다.

         

       딱지놀이를 하듯이 계속해서.

         

       다만, 딱지는 손에서 놓이는 순간이라도 있지, 거한은 손에서 놓쳐지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땅바닥에 부딪쳐야 했다.

         

       한 번, 두 번-.

         

       콰지지직!

         

       ……열 번.

         

       정확히 열 번을 찍은 이후에도 거한은 이한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설령 벗어났을지언정.

         

       주르르륵….

         

       의미는 없었다.

         

       이미 거한의 상태는 잘 다져진 고깃덩이와 같은 바.

       더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으니까.

         

       끔찍하였고, 참혹하니….

         

       “…크…흑….”

         

       허나 거한은 죽지 않았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이었고, 놈이 깨어났을 때 차라리 죽는 게 편하다는 게 뭔지 가르쳐주지 위함이었다.

         

       거한의, …이제 고깃덩어리가 된 양아치의 두 번째 불행이었다.

         

       “…쯧, 옷만 더러워졌네.”

         

       피가 튄 옷을 툭툭 털며 이한은 불쾌해했다.

       이런 손댈 가치도 없는 양아치에게 손을 쓰는 것 자체가 기분만 더럽다는 듯이.

         

       “교, 교관님….”

         

       레비 폴트는 어느새 나타나 거한을 다져버린 스승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단 5일.

       5일 동안 만나지 못했던 스승이건만, 왜 이토록 반갑고 그리운지 모르겠다.

       형용 못 할 복잡한 감정의 격류를 느끼며 레비가 무어라 변명이라도 내려 할 때….

         

       “탈주 닌자, 아니 제자야, 일단 넌 나중에 면담하자.”

       “…네에?”

       “내가 지금 ‘약간’ 흥분한 상태거든?”

       “…….”

         

       그렇게 보인다.

         

       스승을 만나 지금껏 이토록 흥분한, 아니 ‘화’가 난 것을 처음 보았다.

         

       감히 말을 붙이는 것조차 두려운 상태.

         

       그리고 그런 그가.

         

       “이 양아치 새끼 길드 소속이지?”

       “…그, 그건 왜 물으세요?”

       “맞구나, 길드 소속. 가자.”

       “자, 잠시만…!”

         

       애처롭게 교관을 붙잡으려 했지만, 질질 끌려갈 뿐, 그는 멈추지 않았다.

         

       레비는 울상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 안 되는데…!’

         

       놀 됐다.

         

       이한과 어울리며 배운 나쁜 비속어 중 하나.

         

       그 말들의 존재의의를 작금에서야 깨닫게 되는 레비였다.

         

       ……반갑지 않게도.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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