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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45

    <845 – 영혼 서약(6)>

     

    신이 인간을 저버리는 예는 있어도 인간이 신을 저버리는 일은 없다.

    세상은 힘 있는 자가 권리를 지니고, 권리를 지니지 못한 자가 도움을 구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순간에 격의 크나큰 손실을 보고 칩거한 만족의 신 아포니아가 인간을 저버렸다고 볼 수 있을까?

    네페르템은 신격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저 당혹스러웠다.

    아포니아가 어떤 존재인가.

    그녀의 가족을, 그녀의 일생을 불행 속에서 살도록 만들었던 잔혹한 신이다.

    그녀의 몸에서 추출된 불행의 룬이 오크노디를 통해 재단 이사장에게 건네졌으며, 재단 이사장이 어둠에 물든 검은 세계수로 불행의 운명을 제 무기처럼 삼아 휘둘렀다는 이야기는 관련자인 그녀의 귀에까지 도달했다.

    인류의 정점.

    어쩌면 진심으로 그에 한없이 가깝다고 볼 수 있었을 선황과 이사장, 이사장과 각성 오크노디의 전투.

    그 광경은 재단과의 최후의 전투에 참전했던 네페르템 또한 기억하고 있다.

     

    ‘그런 굉장한 힘을 지닌 권능을 하사하던 신이 만족의 신 아포니아였는데…’

     

    그런 아포니아가 오크노디에게 걸린 영혼서약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고 회복을 위해 긴급칩거에 접어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보통 사태가 아니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오크노디가 맺은 영혼서약이 더욱 위험합니다. 얼마나 심각한 계약이면 인지조차도 위험하겠습니까?”

    “미안해요… 고작 아포니아의 성녀라는 허울 하나로 성녀연합회의 성녀장으로 추대된 저로서는 더 이상 도움을 드릴 수가 없어요.”

    “아닙니다. 네페르템 선배님은 충분히 위험을 무릅쓰고 이미 큰 피해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신의 힘을 빌리는 성녀가 신의 힘을 잃게 만들었으니…”

     

    이슈타르는 백번 사죄를 해도 부족했다.

    그녀의 무리한 부탁이 네페르템의 성장가능성을, 모든 아포니아의 신자들의 교세와 윤택한 미래를 앗아간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페르템은 아포니아의 저주를 받으며 평생을 살아온 자.

    신을 향한 신실함은 오히려 없다시피 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꼴좋다는 생각마저 있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고행을 통해 성장함에 만족이 따른다면, 그분께서 겪은 고난 또한 극복해야 비로소 만민의 숭배를 받는 분이라 할 수 있죠. 갑작스러운 신격의 위기마저도 아포니아를 더욱 아포니아답게 만드는 시련이랍니다.”

     

    네페르템의 배덕한 본심을 모르는 이슈타르 입장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신과 교단, 본인의 쇠락을 겪고도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 네페르템의 강인함 앞에 진심으로 경외심을 느꼈다.

    사람은 역경에 처할수록 본성이 드러나는데, 네페르템의 본성은 세상에 이렇게 배려심 깊고 자비로울 수가 없는 진짜배기 성녀였다.

    괜히 네페르템이 자신의 동료이자 성녀인 유피나 혁명군과 대중의 지지를 받는 빛의 성녀 티토소가 대신 성녀장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는 확신만 강하게 들었다.

     

    “선배님의 곤경을 못 본체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오크노디의 어려움만큼이나 선배가 겪는 곤경 또한 제가 갚아야 할 빚입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은데…”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같이 가시죠. 이럴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네페르템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분이 유일신인가요?”

    “아닙니다. 소페미아께서는 다른 신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소식을 접한다면 오히려 칩거한 아포니아를 습격하려 드실 분입니다.”

    “그럼 용사파티의 파티원이자 단짝이며 저희 성녀연합회의 일원이기도 한 참수의 골고다를 모시는 성녀 유피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건가요?”

    “아닙니다. 만족의 신 아포니아께서도 곤경을 겪은 사태를 참수의 신 골고다라고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는 건가요…?”

    “있지 않습니까? 중간계에서는 신보다도 더욱 든든한 최강의 존재가.”

     

    네페르템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덜덜 떨며 기겁했다.

     

    “학생이 곤경에 처하면 교수님들께 도움을 청하고, 교수님들도 도와줄 수 없는 중대한 사태는 교장님의 힘을 빌려야지요.”

    “그, 그게, 그렇기는 한데… 우리 아카데미는 조금 특수하지 않나요? 도움을 청해야 할 게 아니라 더한 사고를 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저만 믿으세요, 선배. 오크노디와 함께 여러 사건을 겪으며 저는 세상에 존재하는 선입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암흑마나의 소유자는 모두 잠재적 마인일 뿐이며 결코 인류와 같은 편에서 싸울 수 없다.

    제국이 주도하는 질서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으며, 인류는 제국에 거역해서는 안 된다.

    신은 절대적이며 인간은 어버이를 따르듯이 헌신과 충성만을 바쳐야 한다.

     

    재단과 제국,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식이 뒤집어졌다.

     

    재단에도 선인이 있고, 아무리 사악한 힘이라도 다루는 이의 뜻에 따라 선행에 쓰이고 인류의 미래에 이바지를 할 수 있다.

    무적이나 다름없던 지상최강의 선황조차도 죽음을 맞이했으며, 신성중앙제국은 그 이름이 무색할 암흑제국으로 나날이 거듭나고 있다.

    신은 인간을 배신하고 유린하며 그들의 운명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냈다.

     

    “교장님도 분명 우리 인식과는 다르게 선한 분이실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직접 겪어보기 전에 남에게 들은 이야기로만 속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태도 자체는 맞긴 한데… 인격적으로 올바른 정신이기는 한데…! 그게 좀, 아니 좀, 그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카데미 밥을 일천 끼는 더 먹은 978기 입학생 네페르템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크노디로 인해 사고의 정형화를 거부하는 이슈타르는 교장님 악룡아님설에 제대로 꽂혀버렸다.

    고블린용사의 존재를 통해 몬스터조차도 자신의 고유한 종족적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용이라고 꼭 악할 이유가 있겠는가.

    오모시로이 교장님 정도면 종족적 기질을 벗어나고도 남을 분이시다.

    애당초 교장이 있기에 중간계가 평화롭고 든든한 구석도 있지 않은가.

     

    “교장님. 드릴 부탁이 있습니다.”

    [으음? 용사가 나한테 부탁을?]

    “네.”

     

    교장은 심술궂은 낯짝을 일그러뜨리며 사납게 코웃음을 쳤다.

     

    [탈피 예정은 없으니 내 몸뚱이에서 떨어져 나온 비늘로 용갑을 만들 생각은 꿈 깨라.]

    “그런 부탁을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무기도 소용없다. 학생에게 발톱 관리를 맡기다니,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지!]

    “제작소재를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저는 교장님의 지혜를 구하려고 합니다.”

    [호오. 지혜를 구한다?]

     

    세상에서 제일 못돼먹은 심술궂은 낯짝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이슈타르는 무언가 큰 실수를 저지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교장님을 향한 선입견 때문에 괜히 그런 기분이 든 걸 거라며 애써 무시했다.

     

    “실은 절명계에서 영혼서약과 관하여 이런 일이 일었는데, 오크노디도 영혼서약을 이미 진행한 것 같아 어떤 서약을 맺었는지 알아보다가 만족의 신 아포니아께서 큰 피해를 받으셨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분의 성녀인 제가 보증합니다. 지상에 미치는 신성력과 권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슈타르의 설명과 네페르템의 보증.

    내심 장난이 아니라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임을 깨달은 교장이 갑자기 귀찮아하거나 흥미가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교장은 여전히 관심이 많았다.

     

    [잠시 물어보고 오지.]

    “예?”

     

    드래곤 교장이 옆집 친구 만나러 가듯이 가볍게 말하더니 앉은 자리에서 냅다 차원문을 열고 정신체를 사출하였다.

    신을 모시는 신자들에게는 마치 꿈처럼 여겨지는 신들의 고유세계.

    신계에 아무렇지도 않게 가볍게 방문하고 신을 직접 알현한다.

    언제라도 그런 짓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네페르템과 이슈타르가 동시에 깜짝 놀랐다.

     

    ‘교장님이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이슈타르는 좋은 의미로 놀랐다.

     

    ‘교장님이 마음만 먹으면 신계에서도 강의를 펼칠 수 있겠구나…’

     

    네페르템은 나쁜 의미로 놀랐다.

    10초.

    20초.

    얼마간 이어지던 방문은 다시금 차원문이 열리고 정신체가 돌아와 교장의 몸에 깃들며 끝났다.

    네페르템은 돌아온 교장의 꼬리에 걸린 아포니아의 신물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애써야만 했다.

    저 깡패 드래곤 교장이 아포니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분명 학생이 감당할 수 있는 짓은 아닐 테니까.

    다행히도 교장은 이슈타르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하며 네페르템에게는 관심을 접었다.

     

    [오크노디와 영혼서약을 맺은 신은 사랑의 신 아타락시아Ataraxia다.]

    “네? 사랑의 신은 24주류신격 중에서도 약체에 속하는 편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야… 하사하는 권능이 좀 그렇잖습니까. 임신 조절이 가능한 축복, 번식력이 상승하는 축복, 곡물 소출량이 늘어나는 축복, 첫눈에 반하는 축복이나 내리고…”

    [그래. 사랑의 신은 다산과 풍작의 신의 힘을 굴복시키고 그들의 권능을 흡수했지. 그럼 이런 권능들의 발현에 숨은 <작동 원리>도 이해하고 있냐?]

     

    신의 권능의 작동 원리.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생소한 물음이었다.

     

    “관련된 기능 하나에 근간을 두어서 적용범위를 넓히고 확장성을 이룬 것 아닙니까? 사랑의 신이니 일단은 <사랑> 기능을 사용하겠죠.”

    [그럼 넌 <사랑>이라는 이름의 기능을 취득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없다.

    이슈타르는 단호하게 부정할 수 있었다.

     

    “감정은 그 자체로 기능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삶에 치인 사람들은 광전사마냥 <분노> 기능이 잔뜩 오르겠죠. 하지만 분노와 얽힌 <광화> 기능은 그냥 분노하기만 한다고 쌓이는 기능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겠죠.”

    [그렇다. 하나의 감정을 대표하는 신격도 실상은 그와 연관된 현상을 일으킬 뿐, 실제로 그 신위를 해석하면 전혀 다른 기능에 근간을 두었지.]

    “그럼 사랑의 신은 어떤 기능을 근간으로 두는 신입니까?”

     

    교장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단언했다.

     

    [‘마비’다.]

    “예?”

     

    사랑과는 선뜻 연결 지을 수 없는 기괴한 기능.

    마비 기능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이슈타르와 네페르템을 혼란에 빠뜨렸다.

     

    [아타락시아의 사랑은 고통과 근심이 제거된 강제된 평온을 의미한다.]

    [그녀의 신자들은 주변의 인지를 왜곡하고 모든 분쟁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교장이 밝힌 진실은 도저히 선신의 권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사용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종의 번식이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에도 <현실감각>과 <경제적 가치관>마저 마비시킨 채로 번식을 일으키지.]

    [성적 파트너로서의 매력이 부족한 개체를 향한 <가치판단>과 <심미관>마저 마비시켜 강제로 짝을 이루도록 만든다.]

    [모든 갈등과 전쟁 또한 마비의 대상이며, 궁극적으로 아타락시아의 세계에서 개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불만이 부정당하고 자신의 본심조차 마비되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악신들보다도 더욱 질이 나쁘다.

    자신이 악행을 저지른다는 자각이라도 있는 악신의 사제들과 달리, 선신의 사제인 아타락시아의 사제들은 악행을 저지른다는 자각조차 없기 때문이다.

    상대의 인격, 사고방식, 가치관을 마비시킨다.

    한 사람을 이루는 구성요소를 유린한다.

    사람을, 조직을, 국가를.

    나아가 하나의 세계 전체에서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요소를 마비시킨다.

    그리하여 탄생한 존재가 바로 주류24신격의 일원, 사랑의 신 아타락시아.

     

    [그렇기에 아타락시아의 궁극적인 이상향이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무변지옥>이기도 하지.]

    [고통도 근심도 반발감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신의 뜻에 따라 굴종할 뿐이니까.]

     

    그런 신과 오크노디가 영혼서약을 맺었다.

     

    [참 재미있지 않으냐? 오크노디는 과연 아타락시아에게 무엇을 <마비> 당했을지, 무엇을 얻었을지를 상상해 보면.]

     

    선황이나 재단이 벌인 짓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악의 존재.

    인간은 인지만으로도 두려움에 숨통이 조여드는 악행의 흔적에 소름이 돋았다.

    이슈타르와 네페르템에게 아타락시아는 더 이상 사랑의 선신 따위가 아니었다.

    위험도를 측정할 수도 없을 상식개변의 악신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넘나 무서운 소꿉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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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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