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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5

     

    중앙 성채의 지하.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먼지가 가득한 창고다.

     

    그곳에 숨어든 피난민들은 벌써 일주일 가까이 숨을 죽인 채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인원은 수백 명. 종류도 다양했다.

     

    중앙 성채에 근무하던 백작령 기사, 시종, 다른 성채에서 생활하던 상인 등 중인 계층, 방어를 위해 섭외한 모험가들, 근처에 살던 소작농, 그들의 가족.

     

    연령, 성별, 인종, 배경도 제각각이지만 이 장소에서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한 가지로 같았다.

     

    죽음을 향한 공포였다.

     

    “마지막 빵이오. 아껴 먹도록 하시오.”

     

    블뤼허 백작이 손수 식량을 평민에게 배분했다.

     

    이 어려운 땅에서는 신분이 어쨌든 다른 이들과 한 몸처럼 협력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백작은 평소 생각했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인사를 받아도 마음이 편치 않다.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마지막 식량 배분이니까.

     

    그나마 숨어든 곳이 식량창고였고, 출입구가 외부에서 눈에 띄지 않는 구조라 지난 일주일간 생존할 수 있었다.

     

    “부상자는 어떠한가.”

     

    “그게….”

     

    집사장이 구석에 누워있는 기사와 모험가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중앙 성채를 마지막까지 방어하다가 쓰러진 이들이었다.

     

    ‘북부 성벽에 뚫린 틈새를 찾아낼 줄이야.’

     

    야만족들이 무언가에게 쫓겨 남하했는지, 몇 달 전부터 공격이 매서워졌었다.

     

    높은 성벽이 한동안 막아줬지만 그들은 지칠 줄을 몰랐다.

     

    이들을 일순에 토벌할 화력이 필요하다 판단한 백작은 제도에 지원 요청을 보냈다.

     

    이 절망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나흘 전에 제도의 황실 기사단이 도착해 전서구를 보내온 것이었다.

     

    ‘한 달 반 전에 지원 요청을 안 했다면 확실하게 전멸했겠지.’

     

    기적이나 마찬가지인 타이밍이었다.

     

    ‘지원이 얼마나 왔는지 모르겠군. 황실 기사단이 과연 야만족을 토벌할 수 있을까.’

     

    야만족의 숫자는 못해도 천이 넘는다.

     

    원시인이나 다름없이 돌 재질 무기를 쓰지만, 인챈트가 되어있어 강력하고 신체 능력도 높다.

     

    ‘무엇보다 그들의 족장은….’

     

    블뤼허 백작이 어깨를 떨었다.

     

    거대한 몸집의 야만족이 도신이 4미터는 되는 마구잡이로 깎아낸 돌검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며 기사들을 짓뭉개던 끔찍한 모습이 떠올랐다.

     

    ‘주술사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신체의 강함과 무기의 인챈트를 설명할 수 없다.

     

    ‘이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본능으로만 행동한다. 마물이나 다름없어.’

     

    백작은 황실 기사단이 그 점을 착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적은 인간이 아니다.

     

    뾰족한 엄니를 드러내며 포효하고, 침을 흘리며 달리고, 무엇보다.

     

    ‘소중한 기사들이… 잡아먹혔다.’

     

    식인을 한다.

     

    야만족이 백작령을 공격한 이유는 단순했다.

     

    이곳에 먹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여기서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저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백작은 그리 다짐하며 창고 입구에 쌓은 바리케이트를 다시 한 번 튼튼하게 했다.

     

    ―쿵, 쿵…

     

    머리 위에서 야만족이 걸어 다닐 때마다 먼지가 떨어진다.

     

    백작은 부디 내일도 살아서 아침 해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깍지를 꽉 끼고 기도를 올렸다.

     

     

     

    ***

     

     

     

    “하앗!”

     

    선두에 나선 타냐의 움직임은 날렵한 맹수와도 같았다.

     

    일격을 휘두르며 다음 적을 확인하고 이격까지의 동선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는다.

     

    검기는 이미 준비되어, 적이 든 단단한 돌망치를 깔끔하게 절삭하며 깊게 파고든다.

     

    “길이 열렸다!”

    “선봉대를 따라라!”

     

    기세가 등등해진 기사단이 차례로 진격하며 다리를 점령해갔다.

     

    온몸으로 달려드는 야만족을 방패기사가 막아내면 후열의 창기사가 찔렀다.

     

    ―크르르륵!

     

    적중당한 야만족이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진형을 유지하며 순조롭게 서쪽 성채에 가까워지는 본대를 확인하고, 나 역시 후방에서 치유사들에게 명령했다.

     

    “성채 점령은 30분 안에 끝날 거야. 북쪽 다리를 끊으면 바로 정비에 들어갈 예정인데, 선봉대 중심으로 치료 들어가. 휴고, 자네가 지휘해.”

     

    “예.”

     

    “부상자 발생했습니다!”

     

    의무병 역할을 하는 신성기사가 선봉대에서 창기사 한 명을 실어왔다.

     

    나는 즉시 부상자를 살폈다.

     

    “진단.”

     

     

    [부상 : 관통상 출혈]

    [위치 : 어깨 상단]

    [상태 : 기절함]

     

     

    “쇼크가 올 수 있으니 조심히 다뤄줘. 지혈, 소독하고. 드레싱한 다음에 치유주문으로 환부 공동을 메워야겠어. 무통제 처방해.”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따라 치유사 한 명이 전담해 그를 능숙하게 치료했다.

     

    이제 월광궁 파벌 치유사들은 현대의학 이해도가 상당해져서 지금 같은 상황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능력을 갖췄다.

     

    기본 처치를 선제하고 치유주문을 시전하니 환자가 낫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본래 치유 과정에서 오는 통증이나 뒤틀림 등의 부작용 문제도 해결됐다.

     

    ‘용사파티도 이렇게 치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치유사의 조치를 확인하고 자리를 옮겼다.

     

    주치의로서 의무가 있는 만큼 아셀라도 신경쓸 필요가 있었다.

     

    “순조롭네. 서쪽 성채가 텅 비었어.”

     

    “제 말이 맞죠?”

     

    “타냐 공도 저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어. 거의 날아다니고 있지 않니.”

     

    “황녀님의 마법은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해 주세요. 행여나 위험하게 선봉에 서실 생각은 마시고요.”

     

    “용기랑 무모함은 다르다고 했었던가.”

     

    아셀라가 긴 속눈썹을 낮게 흩트리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알았어. 사령관인 내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되겠지.”

     

    “훌륭한 마음가짐이십니다.”

     

    아셀라와 함께 전투의 흐름을 지켜본다.

     

    정찰병이 망원경으로 동쪽과 북쪽의 상황도 살펴 보고한다. 아셀라는 재료를 통해 판단을 이어나가 명령을 내렸다.

     

    공간계열 마법을 개발하기도 했고, 평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아셀라는 공간지각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그 작은 머릿속에 이 백작령의 모든 지형이 홀로그램 지도처럼 떠 있어서 실시간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천재가 보는 세상은 어떤 느낌일지.

     

     

    부상병을 몇 명 더 처방하고 나니 펄럭.

     

    타냐가 서쪽 성채 최상층에 올라 월광궁의 깃발을 자랑스럽게 치켜들었다.

     

    서쪽 구역에 있던 모든 야만족을 토벌했다는 표시였다.

     

    “전군 진입시켜.”

     

    “성채를 점령한다! 진입하라!”

     

    기사단장이 아셀라의 명령을 전달하고 기사들이 이동했다.

     

    사전에 편성한 대로 성채 외곽을 둘러싸 방비를 굳히고, 적이 진입해올 수 있는 북쪽과 동쪽 다리의 경계에 들어갔다.

     

     

    나와 아셀라는 북쪽 다리로 이어지는 길목 앞에 도착했다.

     

    망루로 이어지는 좁은 다리다. 야만족에게 점령된 북쪽 성채로도 갈 수 있기에 끊어야 하는 길목이다.

     

    “폭탄으로 무너트립니까?”

     

    “비키거라. 본녀가 처리하마.”

     

    아셀라가 위엄 있는 발걸음과 함께 앞으로 나서고는 지팡이를 들어 마법진을 그렸다.

     

    ―카가가각!

     

    다섯 개의 원이 기묘한 삼각뿔처럼 조형되어 겹쳐지고, 연결되어 회전하기 시작했다.

     

    “블리자드.”

     

    ―퍼엉!

     

    황금빛 마나가 성채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동시에 세찬 바람이 불었다.

     

    옆 산맥에 쌓여있던 눈이 이쪽으로 날아오며 거대한 눈보라를 만들어냈다.

     

    ―쿠르릉!

     

    여파로 옆 산맥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

     

    솟아오른 눈이 하늘에서 뿌려져 시야가 잠시 새하얘졌다.

     

    그러기를 잠시, 눈을 뜨니 어느새 북쪽 다리는 거대한 눈 무리에 완전히 파묻혀 지나갈 수 없게 되었다.

     

    “오오, 엄청난 마법이다….”

    “이것이 3황녀님의 마법.”

    “대자연조차 자유자재로 다루시다니….”

     

    신비를 눈앞에서 목격한 모든 기사가 경외하며 아셀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셀라는 그들을 향해 몸을 틀어 멋들어지게 고개를 한 번 치켜들고는 별 것 아니었다는 듯 성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쿵.

    서쪽 성채의 문이 닫혔다.

     

    우리는 재정비를 한 후에 중앙 성채 점령전에 들어갈 예정이다.

     

    헤이케가 동쪽 성채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여유는 많지 않다. 서쪽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전서구로 보냈다.

     

    “황녀님, 잠시 휴식을 취하시지요.”

     

    “어때, 멋있었니?”

     

    우리 둘만 남자 아셀라가 이죽거리며 내게 물어왔다.

     

    많은 기사 앞에서 5위계 마법을 멋들어지게 성공해서 신났나 보다.

     

    지형을 이용하기도 해서 본래보다 강한 위력이 나오기도 했고.

     

    나는 미소와 함께 대답해주었다.

     

    “분명 설산의 거인들도 황녀님의 위용에 경외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흐, 그렇지?”

     

    아셀라는 입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오물대는 것이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마법이 좋을까.

     

    하긴 아셀라 폐하께선 내가 이해도 못 할 이론을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일도 많이 있었지.

     

    마법 오타쿠가 따로 없네, 같은 생각도 종종 했었다.

     

    “중앙 성채로 진입은 언제 시작할지요?”

     

    “30분 후라고 기사단장에게 말해놨어. 그때까지 준비, 를…”

     

    아셀라의 말이 갑자기 느려졌다.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안 좋아지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며 그대로 쓰러지려 했다.

     

    “황녀님!”

     

    다행히 내가 빠르게 반응했다.

     

    나는 인형처럼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정면에서 안아 받쳐 들었다.

     

    ‘평소보다 차가워.’

     

    아셀라의 호흡을 흐트러진다.

     

    “라스….”

     

    “예. 제가 잡았습니다.”

     

    “…응.”

     

    “추운 환경에서 무리하셔서 그런 듯하네요. 우선 따뜻한 곳으로 모실게요.”

     

    나는 가운을 벗어 그녀에게 두르고 업어 데려가기 위해 자세를 바꾸려 했다.

     

    그러니 아셀라가 내 허리를 잡았다.

     

    “안아서 데려가….”

     

    “그게 더 따뜻하겠네요. 조금만 참으세요.”

     

    나는 아셀라의 허리를 받쳐 안아들었다.

     

    아셀라도 온기를 원하는지 내 목 뒤로 양팔을 감아왔다.

     

     

    …그리고 문제를 발견했다.

     

    “황녀님.”

     

    “응.”

     

    “무겁습니다.”

     

    “안 무거워! 공자,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잠시 기다리시면 타냐를 불러오겠습니다.”

     

    “나 혼자 여기 있으라고? 싫어!”

     

    결국 나는 아셀라의 발을 땅에 질질 끌면서 간신히 그녀를 옮길 수 있었다.

     

     

     

    ***

     

     

     

    임시로 마련한 휴게실 침대에서 이불을 꽁꽁 둘러싼 아셀라는 내가 끓여준 차를 홀짝였다.

     

    따뜻해지니 몸이 풀렸는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서 기사단장과 2연대장을 앞에 놓고 다음 작전을 구상했다.

     

    “중앙 성채까지 거리는 멀지 않아. 하지만 여기보다 훨씬 많은 야만족이 있어서 본격적인 전투가 일어날 거야.”

     

    “동쪽에 유인한 대군이 복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먼저 다리를 끊어야 합니다.”

     

    “저희는 발이 빠르니 전력으로 달리면 저쪽의 원군보다 먼저 중앙에 도착할 수 있겠습니다만.”

     

    아셀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 봤지? 야만족들이 훨씬 빨라. 잠입해서 다리부터 끊는 전략이 유효해.”

     

    “하지만 잠입은 어려운 구조군요. 저희는 워낙 숫자가 많기도 하고….”

     

    기사단장의 고민에 내가 말했다.

     

    “말씀드렸지만 저들은 지능이 낮습니다.”

     

    “공자, 야만족을 속일 방법이라도 있어?”

     

    “물론이지요. 바위족에게 꽤 잘 통하는 방법입니다만.”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시계가 왜?”

     

    “아, 안쪽에 손거울이 달려있습니다. 그게 핵심입니다.”

     

    내가 말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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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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