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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5

       나는 엘라에게서 받아온 노트를 펼쳤다.

         

       그녀의 노트에는 공연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담겨 있었다.

       무대 장치의 배치부터 단원 각자의 동선, 막간에 던질 가벼운 농담, 효과적인 몸짓, 상황에 따른 조명의 각도와 밝기 등등.

         

       읽는 사람이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한 장 한 장 꼼꼼히 읽고 넘겼다.

         

       그렇게 한참을 읽다가 중간의 어떤 대목에서 잠시 멈칫했다.

         

       우몬이 난동을 부리는 연기를 할 때 그를 제압하는 역할에 대한 것이었다.

       ‘원더스타인?’라는 글자가 쓰였다가 펜으로 거칠게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정도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줬을 텐데…….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해당 부분을 넘겼다.

         

       원더스타인의 이름은 이후로도 종종 등장했다.

       그러나 번번이 그 위에 빗금이 쳐졌다.

         

       나는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이 이름을 적고 지우는 것을 반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노트의 마지막 장까지 다 읽었을 때는 어느새 점심 무렵이 되어있었다.

       

       나는 노트를 덮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노트에는 그녀가 그동안 흘린 피와 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식은땀을 흘리면서 자책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뭐가 안 해도 될 고생을 일부러 했다는 건가.

         

       그녀의 모든 노력은 공연의 세세한 부분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엘라가 쓰러진 이유가 정말로 키르쿠스가 이걸 쓸모없는 짓이라고 보고 그녀에게 저주를 내린 거라면, 그는 서커스의 신이라 불릴 자격이 없었다.

         

       그녀가 쓴 이 노트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노트에 적힌 내용대로 카바레의 일꾼들을 지휘했다.

         

       당연히 노트의 주인이 직접 지휘하는 것보다는 효율이 떨어졌다.

       엘라는 오전 중으로 작업을 끝내고 오후에 리허설에 들어갈 거라고 했지만, 우리는 아직 준비의 반도 끝내지 못했다.

         

       단원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연기와 재주만 열심히 익혔다.

       당연히 무대 설비를 다루거나 장치를 설치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나마 여기까지 수월하게 작업을 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랫맨들 덕분이었다.

         

       “조명! 상단부는 조동 나사로! 하단부는 미동 나사로!”

       “철봉! 결합은! 삼중 매듭으로!”

         

       엘라가 시간을 내서 꾸준히 그들을 가르친 보람이 있었다.

         

       랫맨들은 약삭빠르고, 손버릇이 안 좋고, 요령 피우기로 유명한 종족이었다.

       반대로 얘기하면 눈치 빠르고, 손재주가 좋고, 일하는 요령이 좋은 종족이기도 했다.

         

       괜히 전 세계 소매치기의 절반은 랫맨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성격이 교활하고 비굴해서 그렇지 엘라 같이 제대로 일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붙는다면 훌륭한 장인이 될 소질이 있는 녀석들이었다.

         

       장미 풍차에서 오래 일한 직원들도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랫맨들이 원래 일을 저렇게 잘했나?”

       “우리 쪽 신입들보다 나은걸?”

         

       복잡한 프레임 조립도 몇 명이 달라붙어서 후다닥 처리해버리는 그들의 솜씨는 확실히 놀라웠다.

       이 바닥에서 20년은 넘게 일한 안무가 마레조차 그들의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대단하군요. 랫맨들은 다루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닌데. 저도 예전에 춤을 가르치려다 포기한 적이 있어요. 어떻게 하신 거죠?”

         

       나는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것을 참기 힘들었다.

         

       “저희 부단장 덕분입니다.”

       “아, 엘라 양이! 대단하군요.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능력을 키울 수 있었을까요?”

         

       안무가 마레는 엘라에 대한 칭찬을 이어갔다.

       그녀의 연기, 노래실력, 붙임성 등.

         

       나는 마레가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연 그녀는 얼마 안 있어 본론을 꺼냈다.

         

       “저도 예전에는 마로이네 감독님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미친 사람처럼 이일 저일 안 가리고 덤볐던 적이 있어요.”

         

       안무가 마레.

       나는 그녀의 배경설정을 떠올렸다.

         

       그녀는 유그 마로이네가 연극에 미쳐 세상을 떠돌면서 버린 딸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둘은 같은 극장의 무대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면 경멸당할까 두려워 억지로 밀어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 앞에서 혈연이 아닌 실력으로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었던 딸.

       둘은 서로의 정체를 알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상대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아이도 단장님의 인정을 갈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 아이를 너무 힘들게 하지 마세요.”

         

       나는 제멋대로 우리의 관계를 착각해버리는 그녀의 오해를 수정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엘라의 친구와 이웃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계약을 미끼로 그녀를 억지로 끌고다니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녀가 떠나고 멍하니 앉아 있던 와중, 등 뒤에서 뜬금없이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꼬꼬댁.”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도 그 소리를 낸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정찰 오셨습니까, 미노바 씨?”

       “오랜만일세.”

         

       그가 내 옆에 다가와 섰다.

       그는 홀 안을 둘러보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쯧쯧, 아직까지 무대 준비도 다 안 끝나다니. 연습할 시간은 있겠나?”

       “해봐야죠.”

         

       잠시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해하는 그의 안색을 살피고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따님은 어떻습니까?”

       “좋아졌네. 아주 좋아졌어.”

       “잠은 잘 잡니까?”

       “물론이지. 평온한 밤을 맞이한 게 얼마만인지…….”

         

       미노바는 처음보다는 훨씬 편안한 얼굴로 입을 뗐다.

         

       “자네 부단장 이야기는 들었네. 몸은 괜찮은 건가?”

       “무리를 좀 했을 뿐입니다. 의사 말로는 1주일은 푹 쉬면 낫는답니다.”

       “자네의 그 치료 마법으로는 안 되는 건가?”

       “제 마법은 좀 특별한 조건이 필요합니다.”

         

       내 말에 미노바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평범한 기술은 아닌 것 같았네. 손대는 것만으로 불치병을 치료하다니. 뭔가 대가가 필요한 거겠지.”

         

       그는 그렇게 엘라에 대한 위로를 몇 가지 더 던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르쿠스에게 맹세했네. 사정을 봐주는 일은 없을 걸세.”

       “그래야죠. 딸이라는 이유로 부단장 자리에 앉히는 사람에게는 안 집니다.”

       “우욱, 우리 루엘로는 실력으로 그 자리에 앉힌 거라니까!”

       “후후, 그렇겠죠.”

         

       미노바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끝까지 그렇게 나올 건가! 자네가 한 약속이나 잊지 말게. 이기는 쪽의 부단장이 더 뛰어남을 인정하는 거야!”

       “물론이죠.”

         

       미노바가 떠났다.

         

       오후 늦게 작업은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단원들은 리허설을 위해 무대 위에 올랐다.

       그들은 연습했던 그대로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장미 풍차의 직원들이 관객 역할을 대신했다.

       엘라와 안면이 있던 직원들이 모두 몰려왔다.

       그중에는 총감독 유그 마로이네도 있었다.

         

       그는 단원들의 연기를 보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서커스로 이 정도 레벨의 공연을 만들다니. 그 아이의 미래가 두렵군.”

       “엘라 양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감독님의 칭찬이라면 그녀도 기뻐할 겁니다.”

       “너무 겸손 떨지 마시게. 대본은 자네가 짰다고 들었네만?”

       “엘라 양이 말했습니까?”

       “그렇다네. 그럴 때마다 자랑하려는 티를 애써 숨기는 모습이 귀여웠지.”

       “……그런가요.”

         

       리허설을 마친 단원들은 뒤늦게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나는 홀로 무대에 남아 대본을 펼쳐들었다.

       무대도 연기도 모두 준비되었다.

       

       남은 문제는 바로 하나.

       내가 이 공연의 사회자를 잘 맡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본을 암기하는 건 문제없었다. 그녀가 대본을 수정해나가는 걸 계속 옆에서 봐온 데다 그 분량도 많지 않았기에 오전에 이미 다 외어뒀다.

         

       관중을 마주하면 떨린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웃는 남자는 언제나 평정심을 가장하게 해줬다.

         

       그래. 그게 문제다.

       바로 그 웃는 남자가.

         

       엘라는 무대의 분위기를 조절할 줄 알았다.

       무섭거나 소름끼치는 장면에서 적절한 연기와 목소리로 사람들의 감정을 끌어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웃는 것 외에 다른 표정을 짓는 게 불가능했다.

       긴장감 있는 대사를 말해도 히죽대는 것밖에 안 되니 전혀 긴장감이 전달이 되지 않았다.

       단원들의 연기가 가진 위력이 반감되는 것이다.

       아무리 미소를 억제하려고 해도 내 입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소름 끼치게 보이는 법은 쉬웠다.

       뒤에 멘튤라의 칼날을 몇 개 꺼내고. 팔에 촉수 다발을 솟아나게 하고, 눈에 안구 대신 이빨달린 입을 박아 넣으면 됐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내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이 아니었다.

         

       검은 마도사.

       17년 전, 원더스타인이 어디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는지 몰랐다.

       적어도 인간 형태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경계하고 있는 이상 그를 연상시킬 수 있는 형태를 띠면 안 됐다.

       세상에 자기 몸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고 일그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몇 되겠는가.

         

       결국, 내 신체를 개조하기보다 순수하게 분장만으로 사람들을 무섭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원더스타인의 외모와 미소는 남자인 내가 봐도 ‘멋지다’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단원들의 공포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단원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형의 생김새를 제외하면 그들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왜 그들을 괴물이라 부를까.

         

       나는 예전에 정리한 주제를 다시 한 번 꺼내들었다.

         

       쥐 대가리를 단 수인족이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왜 저들은 괴물 취급을 받아야 할까.

         

       그건 그들이 평균값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었다.

         

       난쟁이 요벨은 키가 커지면 괴물 취급을 받지 않겠지만, 키가 10m를 넘어가면 여전히 괴물로 대접받게 될 것이다.

       세쌍둥이 트라이머리도 머리가 줄면 괴물 취급을 받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0개면 그건 또 괴물로 보일 것이다.

         

       결국에 중요한 건 뭐든 정도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서 괴물로 보이기 위해서는 정도를 벗어나면 된다는 말도 됐다.

         

       나는 지금까지 이 미소를 어떻게든 억누르거나 숨기는 분장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순간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

         

         

       6월 마지막 주 월요일.

       대결 3주차.

         

       카바레의 3번 홀, <원더스타인의 괴물서커스>에 들어선 관객들은 크게 두 패거리로 나뉘었다.

         

       순수하게 서커스를 구경하러 온 관객들과 단장 원더스타인을 구경하러 온 관객들.

       둘의 머릿수는 비슷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좀 더 많았다.

       그만큼 개막식에 있었던 사건은 큰 화젯거리였다.

         

       많은 여인들이 선망에 찬 눈길로 무대 위를 훑었다.

       무려 떠돌이 신분에 베르그송 회장과 스캔들이 났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라 들었다.

       눈부신 미소는 보는 사람을 누구든 흐물흐물 녹여버릴 수 있다고 했다.

       괴물 따위는 무시하고 원더스타인의 모습만 두 눈에 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홀의 문이 닫히고, 전등이 모두 불빛을 감췄다.

       오직 하나의 스포트라이트만이 무대 위를 비췄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뚜벅.

         

       무대 위로 누군가 걸어 오르고 있었다.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구두부터 시작하여 하반신, 상반신, 머리를 천천히 드러냈다.

         

       그의 모습이 드러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서서히 두려움이 번져나갔다.

         

       주황색 셔츠에 보라색 연미복, 가슴팍에는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붉은색 장미 장식.

       마구 헝클어진 녹색의 머리카락.

       백지처럼 새하얀 얼굴에 귀 끝까지 닿을 만큼 휘어진 새빨간 입술.

         

       사람들은 그의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곧 화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를 봤을 때 느낀 섬뜩함이 가시지는 않았다.

       광대 분장이 저렇게 무섭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오늘 처음 알았다.

         

       “괴물서커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단장인 프랑크 원더스타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관객들에게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왜들 그리 심각하세요?”

         

       웃는 남자가 무대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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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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