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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5

       케일은 진의 말대로 북동쪽으로 질주하고 있다.

       

       콰오! 콰오!

       

       검붉은 오러에서 번개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반복된다. 케일은 기류와 바람에 몸을 맡기고, 공기의 저항을 없앤 채 달리고 있다.

       

       ‘저기군.’

       

       고개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위에 한 여성이 보인다. 그리고 옆에서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는 한 남성까지.

       

       ‘둘인가.’

       

       케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기대감이었다.

       

       그간 이 제국에서 자신의 적수가 되는 자가 있었나? 진 바렌베르크를 만난 것을 제외하면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케일과 나란히 하는 프라이덴 후작이나 황실 기사단장과는 싸워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군.’

       

       비록 지금은 진 바렌베르크에게 패배해 데카르트 공녀의 휘하에 있다곤 하지만, 케일은 진성 싸움꾼이다.

       

       용병왕이자 백귀라는 이명을 가진 케일은 오로지 검을 휘두르기 위해 태어난 존재.

       

       오랜만에 호적수를 만났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케일은 가슴이 떨리는 게 멈추지 않았다.

       

       콰오! 콰오!

       

       번개가 찢어지는 소리가 몇 번 더 들리자 주술이 펼쳐지고 있는 절벽 위로 도착했다.

       

       “음?”

       

       케일의 존재를 먼저 눈치챈 건 상체를 탈의한 채 가부좌를 튼 남성. 덩치가 크진 않았지만, 압축된 근육으로 인해 군살이 없었다.

       

       “하얀 머리에 기척을 알 수 없으며 말도 안 되는 속도. 너는 제국의 백귀, 케일이군.”

       

       두둑, 두둑. 좌우로 목을 풀며 일어나는 남성.

       

       “나는 아즈라엘이라 한다. 잘 부탁하지.”

       

       꿈틀. 케일의 눈썹이 움직였다. 지금 이 남성은 뭐라고 말하는 것이지?

       

       당장 적이 눈앞에 있다. 그런데 느긋하게 자기소개나 하고 있다니.

       

       “웃기는 놈이군.”

       “그런가? 그런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치이익. 지면에 닿은 오른발을 뒤로 끌고, 상체를 굽힌다. 앞으로 내디딘 왼발에 힘이 들어갔다.

       

       쿠궁! 검붉은 오러가 피어오르며 지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오른손은 왼쪽 허리춤에 걸린 칼자루 위에 놓여져있다.

       

       “오러에 이런 중압감이 실릴 줄이야. 대단하군.”

       “그런 것치고는 별로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데.”

       

       아즈라엘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눌리면 칠성에 속했겠나?”

       

       후우웅.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바람 소리만이 들려온다. 정적을 깬 건 작은 소녀였다.

       

       “빨리 정리해! 진 바렌베르크 그 미친놈이 군단을 단번에 쓸어버려서 다음 주술까지 시간 좀 걸린단 말이야!”

       

       빠악! 뒤통수까지 갈겨버렸다.

       

       “뭐야, 한껏 분위기 잡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중요해? 의뢰가 중요하지.”

       “그래그래. 빨리 정리할게.”

       

       말이 끝난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

       

       쿵! 뒤늦게 들려오는 진각을 밟는 소리. 이미 아즈라엘은 케일의 앞에 서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반가웠다.”

       

       콰과광! 손짓 한 번에 지면이 쓸려나가며 지형이 바뀐다. 가공할 만한 오러가 압축되어 다가온다. 콰오! 번개를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케일은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확실히 빠르긴 하네.”

       

       아즈라엘은 심기가 불편한 듯 눈을 얕게 뜨고 근처의 나무 위로 이동한 케일을 쏘아봤다.

         

       “용케도 피했어?”

       “나를 바로 찾았군.”

       “그 존재감을 찾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뿌득. 오른손의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올라온다. 아즈라엘은 다시 튀어나가 손을 휘두를 준비까지 마친 상태. 케일은 조용히 분석에 들어갔다.

       

       아까 오른손에서 지면을 분쇄하는 오러가 검기처럼 터져 나왔다.

       

       ‘오러를 저렇게 사용하는 놈이 있을 줄이야.’

       

       검에 담아 검기로 사용하거나, 자신처럼 형태를 바꿔서 사용하는 자는 꽤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저렇게 맨손으로 오러를 흩뿌려서 분쇄하는 건 본적이 없다.

       

       “세상은 넓은 법이네.”

       “갑자기 무슨 소리지?”

       “너처럼 신기한 놈도 다 있다 싶어서.”

       “하, 칭찬해봤자 나오는 건……”

       

       쿠르릉! 전과는 다르게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케일이 아즈라엘에게 쇄도했다.

       

       “…!”

       

       이미 반응하기엔 늦었다. 검신이 뇌전을 뿌리며 목 앞으로 쇄도하고 있다. 스각! 말끔하게 절단.

       

       그러나 케일이 베어낸 건 목이 아니었다.

       

       “비겁하게 말하는 도중에 공격하기야?”

       

       케일은 심히 당혹스러웠다. 아즈라엘은 그 짧은 시간에 검이 다가오기 직전, 손목을 올려 검날이 파고드는 속도를 낮추고 목을 뒤로 빼낸 것이다.

       

       ‘막기엔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즈라엘은 말끔하게 절단된 손목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손목 하나 날아간 건 아쉽지만, 백귀를 상대로 이 정도면 선방이지.”

       

       케일은 아즈라엘에게서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저렇게 낙천적인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럼 왼손으로만 상대해야 하는 건가?”

       “그렇겠지.”

       “양손으로도 벅찬데 이거 큰일이군!”

       

       말과는 달리 전혀 초조해하고 있지 않다. 케일은 위화감을 느꼈다.

       

       ‘전력을 사용하지 않는 건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말하는 도중에 기습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아즈라엘이 왼손에 오러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하반신에도 오러가 흘러간다. 케일은 이를 확인하고 곧장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콰오! 콰오! 번개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케일의 주변으로 검붉은 전류가 일어났다.

       

       “분해하라!”

       

       삐이이-

       

       순간 케일의 귀에 이명이 들려왔다.

       

       “이건…….”

       

       케일의 휘둥그레진 눈에 들어온 건 압축되고, 또 압축되어 가공할 만한 파괴력을 지닌 오러가 나선을 돌며 날카롭게 쇄도하는 광경.

       

       “하하! 백귀, 여기서 잠들다!”

       

       콰과과과-!

       

       지면은 마치 거대한 지렁이가 지나간 것처럼 움푹 파였고, 뒤에 있던 우거진 숲은 전부 사라졌다.

       

       지형 자체가 바뀌었다.

       

       “어때, 에스투피나! 좀 멋있었나?”

       “바보야, 출혈이 심하니까 이리로……”

       

       스각!

       

       “…!”

       

       순간, 에스투피나의 눈에 아즈라엘의 목이 허공을 유영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쿠릉, 쿠르릉! 뒤늦게 들려오는 천둥 소리.

       

       “어……?”

       

       파지직! 전신에 검붉은 전류를 띄며 서 있는 케일.

       

       “후우, 후우…….”

         

       직격으로 맞았다면 몸이 갈기갈기 찢어져 형태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러의 압축력은 대단했다.

         

       케일은 이를 피하느라 오러를 한계치가 넘도록 끌어올린 탓에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전신이 터지는 듯한 반동을 고스란히 받으며, 케일은 숨을 헐떡이더니 고개를 들어 에스투피나를 쏘아봤다.

       

       “히, 히익…!”

       

       살기가 가득한 그의 시선에 에스투피나는 움츠러들며 뒤로 물러섰다.

       

       터벅. 터벅.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서는 케일. 에스투피나의 목에 검을 겨누며 물었다.

       

       “너희들의 작전을 말해라.”

       

       

       * * *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 거니?”

       “쉿! 지금은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고요…!”

       

       현재 프란체와 카자르는 수풀 속에 숨어있다.

       

       누군가가 마력의 흐름을 방해해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게 가능한 건 카자르가 알기론 오래전에 사라진 주술뿐.

       

       ‘너네들은 주술을 쓴다 이거지?’

       

       주술사들은 과거에 전부 사라진 줄 알았다. 하지만 눈앞에 떡하니 존재하고 있었다.

       

       ‘사하라는 이런 것도 허용해준다는 거네.’

       

       쯧, 카자르는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프란체가 물었다.

       

       “진은, 진은 어디에…….”

       

       프란체의 눈빛이 떨리고 있다. 카자르는 프란체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다 괜찮을 거예요. 그 사람은 절대 쉽게 안 당한다고요.”

       “진이 다치면, 진이 다치면 어떡하지? 나는 그걸……”

       “그 사람이 다치는 것보다 상대를 걱정하는 게 더 건설적인 생각이에요.”

       

       카자르는 프란체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그냥 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야, 진은 대륙제일검. 국가를 상대로 견제할 수 있는 괴물을 그들이 어찌 이기겠나.

       

       “조금만 믿고 기다려보죠.”

       “그래…….”

       

       프란체가 축 늘어졌다.

       

       “진…….”

       “…….”

       

       카자르는 고개를 휘저었다. 이런 상황에 정신을 퍼뜩 차리지 않으면 목숨줄 날아가는 건 한순간이다.

       

       진과 케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쪽에 인원이 오지 않은 걸 보니 둘이서 모두를 상대하고 있는 듯했다.

       

       ‘이러면 내가 온 이유가 없네.’

       

       마법을 쓰러 와서 정작 할 수 있는 건 프란체 위로뿐. 콰득! 카자르는 자신의 무능함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주술사놈들.’

       

       그러던 그때.

       

       “아가씨들, 여기 숨어 계셨네?”

       “!!!”

       

       카자르는 프란체를 데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달렸다. 지금 들키면 무조건……!

       

       카가가각!

       

       별안간 바로 옆에 있던 나무에 나선 모양의 구멍이 뚫렸다.

       

       “더 움직이면 너도 죽어. 얌전히 그 공녀님만 넘기면 살려줄게.”

       

       솔직히 이 상황에서 두렵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프란체는 옆에서 공황 상태가 온 상황이고, 마력은 제한되어 마법도 사용할 수 없다.

       

       최악이었다.

       

       “왜 공녀님을 노리는 건데?”

       “글쎄. 그걸 너한테 알려줄 필요는 없네.”

       

       우우웅! 손위에 붉은 주력이 나선을 돈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아락이라고 한다. 모옥에서 마법사 사냥꾼이라 불리지.”

       

       침을 삼키자 목울대가 무겁게 넘어갔다. 지금까지 마력의 흐름을 방해한 존재가 바로 앞에 있다.

       

       하지만 카자르가 할 수 있는 건 말로 시간을 버는 것밖에 없었다.

       

       “…네가 주술사야?”

       “그래.”

       “사하라는 주술사를 탄압하지 않나 봐?”

       “주술의 역사가 깊은 곳인지라.”

       

       프란체는 슬쩍 뒤를 돌아보곤 조용히 읊조렸다.

       

       “공녀님, 제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뛰세요.”

       “뭐?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아무리 카자르의 마법이 강하다 해도, 프란체의 흑마법이 강하다 해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다.

       

       ‘공녀님과 같이 싸우면 웬만한 놈들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오산이었다. 이는 주술사가 등장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해 생긴 문제였다.

       

       “아,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바깥은 더 난장판이거든.”

       

       그건 카자르도 알고 있다. 새하얀 안개가 퍼지며 마차가 통째로 파괴됐으니까.

       

       “후우.”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기서는 도망치는 방법밖에.

       

       “공녀님! 지금!”

       

       삐이이! 카자르의 손에서 마력이 발산되며 옅은 섬광이 터졌다.

       

       “크윽, 마력을 어떻게…!”

       “티끌도 모으면 쌓이는 법이야!”

       

       카자르는 프란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거진 숲을 지나, 나뭇가지가 걸리는 수풀을 지나고 바깥으로 나오자 폭풍이 지나간 듯한 황폐한 대지가 나왔다.

       

       “와…….”

       

       아까까진 울창한 숲이었다. 땅에는 잡초와 수풀들로 가득했고 꽃까지 피워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걸 진이 한 거니…?”

       “그런 거 같아요…….”

       

       몰려오는 시체 군단을 혼자 쓸어버린 건 좋다. 근데 이러면…!

       

       “도망치지 말라니까.”

       

       숨을 곳이 없다.

       

       “…….”

       

       카자르는 프란체를 뒤로 보내며 다시 마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머무는 마력들이 엉키고 엉켜 모으는 건 힘들다만, 순수한 마력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걸 조금씩 조금씩 모은다면…….

       

       “어이쿠, 아까 같은 상황이 나오면 안 되지. 일소해라!”

       

       카아락이 손을 뻗자 붉은 나선의 선풍이 돌았다.

       

       카가가각―!

       

       저걸 맞으면 무사하지 못한다. 카자르는 프란체를 품에 안고 등을 돌린 채 눈을 감았다.

       

       “아아악!!”

       

       까드드득!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몰려든다. 몸을 갈기갈기 찢어 불을 지르는 듯한 느낌.

       

       “아, 내부를 공격한 거라 몸에는 상처가 없을 거야. 흉터가 생기진 않을 테니 그건 안심해.”

       

       카아락은 “그게 의미가 있겠나 싶지만.”하고 비웃었다.

       

       “허억…….”

       

       털썩. 옆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지는 카자르. 프란체는 혼절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대체 왜…!”

       

       굳이 자신을 감쌀 필요는 없었다. 모든 피해를 혼자서 다 받은 게 아닌가…!

       

       “왜…….”

       

       이질감.

       

       프란체는 쓰러진 카자르를 보며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질감.

       

       이상하다. 절대 진을 제외하면 감정이 움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질감.

       

       감정이 요동치며 프란체의 발밑에 생긴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음? 마력은 움직일 수 없을 거야.”

       

       카아락의 말대로였다. 프란체가 아무리 분노해도 흑마법이 움직이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순순히 진의 말을 들었어야 했던 걸까? 프란체는 우매한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역시 진의 말을 들었어야 했어. 나는 진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해…….’

         

       그간 일이 너무 잘 풀리고 미래가 너무나도 밝아서 잊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진이 만들어준 것이라는 걸.

       

       체념과 자괴감에 빠진 프란체.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기가 빨라서 좋네. 그럼…….”

       

       쐐애액! 별안간 사방에서 단검 수십 자루가 날아들었다.

       

       “일소해라!”

       

       파아앙! 파공음과 함께 카아락의 주변에 붉은 선풍이 돌며 날아오던 단검들이 힘을 잃었다.

       

       “누구지?”

       

       사악. 프란체의 앞에 그림자가 올라오며 새까만 옷을 입은 사내가 등장했다. 푸른 머리카락에 꽁지로 묶여있는 뒷머리. 얼굴이 가려진 새하얀 가면.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엑시드의 마스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엔 진이 나오지 않네양..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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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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