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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5

       결국 담임은 도망치는 걸 택했다.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리라. 돈 받는 대상을 신중하게 생각하지 못한 담임 잘못이지, 뭐.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덕분에 회장에게도 찍히게 생겼으니까. 조만간 선생이 바뀐다고 해도 나는 이상할 거 하나 없다고 생각한다.

        

       뇌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받은 돈을 다시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혹시 감옥에 다녀오더라도 충분히 먹고살 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수많은 경제사범이 왜 그런 죄를 저지르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잘 숨겨두기만 하면 감옥 다녀와서 쓸 수 있을 테니까.

        

       “훗.”

        

       소희는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이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정말로 십수억이나 쓴 거야? 선생 하나 구워삶는데?”

        

       “응? 아니? 당연히 아니지. 저거 하나만 구워삶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니까. 뭐, 자세한 건 양혜인 선배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거야. 나는 그냥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야.”

        

       숟가락만 얹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뇌물을 먹이는 법 같은 것은 양혜인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냥 메이드 일만 하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양혜인도 양혜인 나름대로 정면으로 부딪힌 건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의심만 피할 수 있다면 못 할 것도 없는 일이긴 하니까.

        

       그리고 고작 메이드가 십수억 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뿌리면, 당연히 그 돈은 메이드의 돈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누군가의 돈이라고 생각할 거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자기 재산 절반 이상을 뇌물로 쓰지는 않는다. 뇌물을 쓰는 이유는 그 뇌물 이상의 이득을 본다는 생각을 할 때나 쓰는 법이니까. 유진그룹이 뇌물로 십수억씩 쓸 수 있는 이유는, 그 정도의 돈을 쓰더라도 큰 타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부자들만 해도 스포츠카 모으는 게 취미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돈을 뇌물 먹이는 데 쓴다면 얼마나 많이 쓸 수 있겠는가.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도 최나경의 ‘취미’ 영역에 들어가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최나경 최대의 관심사는 예사라인 모양이었으니까.

        

       “……쓴 돈은 내가 벌충해주도록 할게.”

        

       내 말에,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하늘이 마저도 아까부터 입을 딱 벌리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 진짜 부자이긴 했구나…….”

        

       그렇지.

        

       다만 지금 몸속에 들어와 있는 내가 아직도 그 정신 나간 수준의 재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쯤 제대로 적응할지도 모르겠고.

        

       *

        

       “잘 봐달라고 10억 넘게 들이부었는데, 그렇게 나오시면 섭섭하죠.”

        

       누군가의 기가 질리도록 하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스스로 예사라의 ‘메이드’라고 밝힌 그 전학생은, 아주 당당하게 담임을 협박했다. 스스로 그에게 뇌물을 먹였으며, 그 뇌물의 액수가 ‘억’ 소리 나는 돈이었다는 것으로.

        

       물론 그 십수억 원을 담임이 전부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후에 예사라와 그 메이드 전학생이 나눈 대화를 생각하면, 그 돈은 아마 학교 교사진의 전체, 혹은 일부를 구워삶는 데 썼을 것이다. 어쩌면 교장이나 교감까지도 뇌물이 올라갔을지 모른다.

        

       사실 선생을 구워삶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 박봉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돈을 받으면서도, 이 학교의 선생들은 돈을 밝혔다. 그리고 뇌물은 한 번에 무조건 많이 줄 필요는 없는 법이다. 원래 뇌물이 들어올 구석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잘하게 많은 사람에게 돈을 받고 편의를 봐주는 법이었으니까. 만약 뇌물에 단가가 있다면 선생들이 받는 뇌물은 그리 큰돈은 아니었다.

        

       만약 십수억이라는 돈으로 학교 전체를 매수해야 할 일이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행동할 인간들이 이 학교 안에도 있긴 했다. 모든 학생의 집안이 십수억이라는 돈을 턱 내놓을 수 없기는 해도, 만약 어느 학생의 집안이 국내 100대 기업 안에만 들어갈 수 있더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돈이긴 했다.

        

       “……쓴 돈은 내가 벌충해주도록 할게.”

        

       그런데, 예사라는 메이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 저 메이드의 주장은, 아주 간단했다.

        

       ‘당신이 받은 돈은 사실 회장에게서 나온 돈이 아니라 나와 내 선배에게서 나온 돈이다.’

        

       세상 어느 집안의 메이드가 ‘자신의 사비’로 십수억 원을 끌어올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 쓰고도 돈이 수억 원이 남았고, 예사라는 그 돈을 보고 ‘빈털터리’라고 했다.

        

       그래, 분명 세상의 어느 부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1년에 조 단위로 버는 사람, 아니, 수천억 단위로 버는 사람만 되더라도 전 재산이 수억 원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런 소리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아무리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닐 수 있는 아이들이라도, 모든 아이가 억 단위의 돈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학년에 백 수십 명씩, 세 학년이나 있는 학교다. 당연히 수천억대 ‘자본가’의 자식만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는 없다. 이 학교에는 그런 자본가들과 인연을 맺을 목적으로 자식을 보내는 백억 대, 혹은 수십억대의 ‘부잣집’ 자식들도 많았다.

        

       아니, 많은 수준이 아니라, 사실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로서는 오히려 그런 집안의 아이들이 주 고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눈에는, 저 둘의 대화가 절대로 정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정상적이지 않은 대화를 들으며,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아무리 회장의 눈 밖에 난 수양딸이더라도, 만약 마음을 먹고 움직인다면 십수억 정도는 ‘그냥 벌충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메이드에게 연봉으로 수억 원씩 주고, 그런 돈을 그냥 ‘푼돈’ 취급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존재를, 자신들이 따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예사라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소문은 돌고 있었다. 예사라의 계모인 최나경 회장은 예사라와 친해지는 사람들을 짓밟고 다니고, 그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소문.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눈앞에서, 예사라와 친근하게 지내면서도 멀쩡한 존재들이 있다.

        

       대체 어떻게?

        

       아마 예사라가 직접 보호하고 있는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저 정도의 자본이라면, 자신들의 측근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켜낼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때 문득, 예사라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주위를 둘러본다.

        

       가늘게 뜬 두 눈이 날카롭다. 눈빛으로 공기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빛나는듯한 붉은 눈이, 조용해진 교실을 한 번 훑었다.

        

       그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자, 선택해.’

        

       멀리 있는 최나경인가, 아니면 가까운 곳에 있는 예사라인가.

        

       누군가 꿀꺽, 마른침을 삼기는 소리가 들렸다.

        

       *

        

       어째 반이 좀 이상하게 조용해서 둘러봤더니, 다들 내 눈을 피하고 있다.

        

       ……아까 그게 임펙트가 좀 컸던가.

        

       하긴 나라도 그런 대화를 옆에서 들으면 놀라긴 할 거다. 억 단위의 돈을 그냥 나갔다 들어갔다 하는 돈이라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런데 진짜로 돈이 그만큼 있는데 어쩌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인데.

        

       “……그런데 말야.”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늘이가 결국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너, 사라의 메이드라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하늘이의 물음에, 소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

        

       대놓고 뻔뻔한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연히 소희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을 줄 생각은 없다. 방금 일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칭찬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나도 떠올리지 못한 방법으로 학급 전체에 크게 한 방 먹였으니까.

        

       애초에 존댓말 쓰면 불편하기만 한데. 뭐, 메이드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됐어. 벌은 무슨 벌. 앞으로 주의하면 되지.”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대답했다.

        

       소희는 그런 나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분명히 내 편인데 왜 저렇게 약이 오르는 건지 모르겠네.

        

       *

        

       “사라야.”

        

       평소처럼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잠들었던 머리를 흔들어 깨우고 나니, 교탁 앞에 서 있던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아, 내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이번 시간은 조느라 그냥 날려버렸네. 아직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비싼 냉난방 시스템을 갖춘 이 학교 안은 따뜻했다. 창문은 바람도 잘 막아주었고. 덕분에 창가에 앉아있는 나는 그대로 따사로운 햇살을 받을 수 있었고, 당연히 꾸벅꾸벅 조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응?”

        

       눈을 비비면서 소리가 난 곳을 올려다보자, 하늘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은 꽤 진지했다.

        

       하늘이는 다짜고짜 내 교과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풀 수 있어?”

        

       “어…….”

        

       잠에서 막 깨어나 나른한 머리 그대로 하늘이가 가리킨 부분을 내려다보자, 아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때 쯤 봤을 법한 수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포자였던 나는 당연히 풀 줄 몰랐다. 내가 수학 교재에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부분은 집합 부분이 전부였으니까.

        

       그나마 집합도 좀 심화한 문제 쪽으로 들어가면 제대로 풀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멍청해 보이네.

        

       “……아니.”

        

       그래도 쪽팔리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솔직히, 어차피 돈도 많은 거 공부 같은 거 안 해도 상관 없지 않나 싶다.

        

       “하아.”

        

       하늘이는 보란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이거, 오늘 배운 것도 아니고 저번 주에 배운 거야.”

        

       아, 그랬던가.

        

       요즘에는 교과서라도 펼쳐놓지 않으면 하늘이가 자꾸 옆구리를 찔러대서 반사적으로 펼쳐두기만 하고 있었다. 당연히 언제 어디를 어떻게 배웠는지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멍하니 풀린 눈으로 앉아있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 어째 너무 교재 앞부분이라고 생각하긴 했어. 그런 것 치고는 집합 부분은 아니긴 했지만.

        

       하지만 내 얼굴에는 별로 심각한 표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당연한 말이다. 바로 조금 전에 말했듯, 나는 돈이 많았다. 그냥 많은 것도 아니고 평생 펑펑 써도 다 쓸 수 있을지 알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그 돈을 물려받을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재산은 전부 신탁 관리회사에서 관리해주는 중이다. 주식은 그냥 두기만 해도 돈이 불어나는 중이고.

        

       ……공부할 의욕이 날 리가 없잖아.

        

       “…….”

        

       그리고 나의 그런 표정을 보고,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하늘이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마치 선언하듯이.

        

       “누가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안 하겠네.”

        

       “……어.”

        

       머리를 쓸어올리며, 마치 흑염룡의 봉인이라도 풀듯이 말하는 하늘이를, 나는 그저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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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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