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5

        

         > 설마, 이제 와서 봐줬다느니… 대충했다느니 같은 핑계를 대시려는 건 아니겠죠! 이러면 낮의 싸움까지 해서… 일 대 일, 동점이네요!

         

         야야야, 동점이고 나발이고 가만 있어봐. 너 때문에 내가 곤란해지게 생겼잖아!

         

         “진정하자… 진정.”

         

         전화를 받기 전에 우선 목소리부터 가다듬는다. 덤으로 살짝 들뜬 정신도 다잡는다.

         

         나는 이 지랄 난 이벤트 현장과는 아무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파이브 아이즈? 로잘린? 엄밀히 따지면 난 얼굴도 마주한 적 없는 사람들이다. 아는 게 있냐고 물어본들 대답할 거리도…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마땅치 않다.

         

         이건 그간의 내 행적을 꼼꼼하게 살폈던 아론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믿을 게 없어서 이 인간을 믿어야 하나 정말? 아이고 내 신세야….

         

         – 아나스타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행여나 벌써 하베스트 플래닛을 떠나신 건 아니시겠죠? –

         

         가벼운 안부 전화를 돌린 것 마냥, 쾌활한 목소리가 머리속에 울려 퍼졌다.

         꼭 뱀에게 감시당하는 개구리처럼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망할, 한 손으로는 저항군 해커와 티격대면서 입으로는 기업 고위층과 떠들다니.

         적과의 동침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못해 떠드는 본인들도 믿지 않을 거리감이었다.

         

         “…그간은 무슨. 겨우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 이런… 겨우 그것밖에 안 지났나요? 바쁘게 준비한 일이 워낙 많으니 시간감각도 엉망이 되는군요. –

         

         평소의 나답게 행동한다고 마음먹었더니, 나도 모르게 능글거리는 아론을 쏘아붙이게 되었다.

         

         한두 번쯤 툭툭 건드린다고 폭발하는 활화산 같은 인물은 아니었지만 날을 세워서 좋을 게 없는 관계임에도. 이상하게 친근감을 표시해오는 걸 보면 무슨 꿍꿍이를 품은 걸까 싶어서 자동으로 밀어내게 된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인의 업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었다. 응.

         

         – 한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특별히 급한 용무가 없으시다면 작은, 아주 작은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은데요? –

         

         “…….”

         

         그 천연덕스러운 말을 들은 나는 주변 상황을 살폈다.

         

         공짜 복권과 경품 챙기러 왔다가 엄한 구경을 하게 된 시민 무리, 호흡곤란이 온 것처럼 보이는 사회자와 행사장 직원들, 여기저기 흩어져서 파이브 아이즈가 설치한 조명들을 때려부수느라 바쁜 안전요원과 용병 그룹.

         

         그리고 용병 친구들이 기술 싸움에서 완전히 밀렸는지 이쪽의 통제가 전혀 안 먹히는 전자 제품들까지.

         

         염병, 작은 부탁은 얼어 죽을.

         

         “내가 당장 뭐 할 만한 처지는 안 되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많이 위급하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는 게….”

         

         – 그렇습니까? 마침 가까운 곳에서 이족보행형 자가용에 탑승하신 채로 산책을 하고 계시길래. 저는 또 딱 맞는 인재를 찾았다 싶어서 연락 드린 건데… 아쉽군요. –

         

         이런 시발.

         

         짜증과 민망함을 억누르고 어쩌다 걸렸나… 생각해보니, 고민할 거리도 없었다. 여기는 실시간 방송을 타는 최고의 핫 플레이스였으니까.

         

         이 난장판을 신나게 밀착 취재하느라 바쁜 상공의 촬영 드론들을 노려보았다.

         얌전히 행사장이나 찍지 왜 괜히 광장 귀퉁이까지 물러난 구경꾼들을 담아서 애꿎은 사람들 노출시키냐…!

         

         그 중에서도 파라다이스 로고가 박힌, 촌스러운 노란색 드론을 째려본다. 확신은 부족했지만 렌즈와 그 너머에 있을 아론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원하는 게 뭐야?”

         

         – 저 안타까운 크리스마스 추물醜物. 최대한 빨리 원래대로 돌려놔 주시겠습니까? 회장님께 보여드릴 어닝 서프라이즈치고는 너무 과하군요. 이러다가는 매출도 올랐는데 해고당할 직원이 더 많겠습니다. –

         

         마지못한 승낙과는 대비되게 용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가 얄미워 죽겠다. 나쁜 새끼… 다 알고 있으면서 떠보는 데는 도가 튼 새끼.

         

         삐릭!

         

         나름대로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나 인사치레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교정 사항을 전달하자마자 통화는 깔끔하게 끊어졌다.

         

         업무 도중에 땡땡이 피우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일할 시간이다.

         

         “모니터들. 저 꼬라지로 변한 지 얼마나 지났어?”

         

         – 최초 공격이 개시된 후로는 8분 43초. 필터링도 없이 온전히 파이브 아이즈 측 선전물만 내보낸 지는 약 1분 경과되었습니다. –

         

         대충 10분 언저리라… 이 정도면 저항군도 투자 대비 만족스러운 결과이리라.

         지배 계층 입장에서도 자존심은 상하겠지만 단순한 해프닝이었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을 테고.

         

         로잘린은… 이쯤 했으면 너도 충분히 재밌게 놀았지? 더 즐기고 싶다고 우겨도 안 돼, 여기서부터는 내 책임이니까.

         

         > 슬슬 그 ‘테러’도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이만 박수 칠 때 물러날 생각 없어?

         > 지금 혹시…… 자비를 구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이건 항복 선언?! 제가 더 뛰어나다고 인정해 주시는 건가요!!

         

         “…이 년이?”

         

         그야 무조건 환청이겠지만, 왠지 행복에 겨운 비명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칭찬을 요구해오는 악동의 콧대가 지나치게 높아졌다고 할까… 귀여움이 지나쳐 약간 밉상이 되었다고 할까.

         

         적실히, 여기서 입 발린 말 몇 마디로 그녀를 구워삶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

         하지만 파이브 아이즈가 그리 좋아하는 민주주의의 으뜸 화약고에는 그런 격언도 있지 않나?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로잘린의 말마따나 나도 명색이 경찰 출신인데 이런 겁박에 굴복하면 안 되겠지. 암.

         

         지직… 지지직…!

         

         “아이씨.”

         

         전에도 그러더니, 또 이런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신호가 쏟아져 들어가자 단말기가 못 버티겠다고 스파크를 마구 튀긴다.

         

         어차피 매개체 역할을 끝내고 나면 부품들이 심하게 열화 될 테니 쓰는 도중에만 버텨주면 된다.

         

         – 그게… 아샤님의 능력입니까? –

         

         “뭘 새삼스레…. 아, 직접 보는 건 처음인가 참?”

         

         아까도 그렇고.

         그럴 기회도 없긴 했지만, 제대로 된 설명 하나 없이 멋대로 일을 벌이는 나에게 처음 표한 의문이 이거라니.

         

         정말 나와 관련된 일에만 흥미가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어쩜 이렇게 철저한 무관심과 관심이 공존하는 모범 반항아가 다 있을까.

         

         – 제가 도와드리기 어려운 분야에서 홀로 싸우신다니… 송구스럽군요. 나중에, 여유가 생긴다면 저에게도 다양한 추가 부품들을 꼭 설치해주시길. –

         

         “…알았어, 아주 그냥 집채만한 로봇으로 만들어 줄게.”

         

         가만있기 뭐하니까 도울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을 참 기특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녀석이다.

         

         그렇게, 깡통에게 살며시 웃어주고 다시 로잘린 추적에 집중하려던 나는… 이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훌륭한 로봇은 무슨 방석으로 쓰면서.

         싸구려 단말기 붙들고 낑낑거리는 게 과연 이치에 맞는 행동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네가 도와줄 방법을 막 찾은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괜찮겠어?”

         

         – 아샤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

         

         내밀어진 손을 붙잡고 듬직한 어깨에서 내려온다.

         또 허락도 없이 예의 그 민망한 자세로 받아드는 건 거슬렸지만 더 급한 용무가 있으니까 이번만 넘어가도록 하자.

         

         …편하기도 했고.

         

         우우웅…!

         

         불쾌한 방전 소리는 없었다.

         깡통의 회로와 내 정신이 공명하는 것처럼 잔잔한 진동이 고막을 어루만진다.

         

         나도 머리에서 피 터지게 집단을 상대로 싸워본 경험이 있어서 아는데, 개인이 같은 전문가 다수를 꺾는다는 게 절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 머릿수만큼 다양한 방식과 기발한 경로로 공격이 들어오는데 쉬울 리가 있나.

         

         그럼 대체 무슨 비결이 있길래 로잘린의 실력이 갑자기 상승했나?

         

         숨겨진 힘을 개방해서? 장난은 그만두고 진심으로 덤벼들어서?

         

         다시 말하지만 해커의 솜씨는 각자의 역량, 하지만 능력의 한계는 장비빨이니. 허면 없던 장비가 로잘린 측에 추가된 게 분명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성능이 뛰어난 장비던가… 그게 아니라면 굉장히 유리한 고지를 점거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 광장과 인접한 시스템에 연결된 물건이던가.

         

         > 자… 로잘린?

         > 흠… 흠흠! 그게 아니라… 로잘린 씨, 혹은 로잘린 님도 괜찮겠네요! 말해보세요!

         

         채널에 들러붙은 것처럼 곧장 돌아오는 대답. 그걸 이루는 신호 줄기를 낚아챈다.

         어디 감청 대책은 완벽하다고? 안에서 파고드는 샛길도 잘 막아 놨나 한 번 볼까?

         

         – 이건… 아름답군요. –

         

         한창 그녀의 신호를 역추적하는 와중에 중얼거리는 깡통의 말이 들렸다.

         음량만 작았지 감탄에 가까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내 노력을 긍정해주는 것 같았기에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도. 연산 장치와 메모리를 빌려 써서 그런가? 내가 보는 이 풍경을 그도 볼 수 있다니 놀라웠다.

         

         “현직 인공지능이 보기엔 어때…? 괜찮은 수준이야?”

         

         가느다란 실마리만 붙잡은 채, 장애물로 가득한 터널을 헤쳐 나가는 모양새였으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정보의 분류는 흡사 우주를 유영하는 분위기를 한껏 내주고 있었다.

         

         이게 끝나면 내 심상 서재와 작업 풍경도 자랑…이 아니라 보여줘야지.

         

         – 0과 1.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주민들에게. 전혀 다른 법도를 강제할 권리가 있으신 건 오직 아샤님 뿐입니다. …씌워진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실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

         

         “어… 고마워…?”

         

         뜨끈해지는 목덜미를 어색하게 매만졌다.

         

         기대 이상으로 복잡하고… 이해가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깊은 뜻을 품은 답변이 돌아왔다.

         로잘린 보고 뭐라 할 경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칭찬은 언제 들어도 평정심을 흐트러뜨리는 맹독이다.

         

         아무튼 신호의 역추적은 순조로웠다.

         비록 거쳐온 경로가 배배 꼬여 있어서 서버 호스트와 광장 기지국의 로그를 무단으로 훔쳐보고 검열관 권한까지 극한으로 활용해서 겨우 찾아낸 단서치고는 초라했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기지국에도 등록된 적 없고, 물리적으로 송신탑이나 별도의 안테나가 존재할 수 없는 위치인데. 로잘린이 입력한 채팅은 거쳐갔다고 나오는 장소.

         

         “아이디어는 좋네.”

         

         크리스마스 트리 꼭대기에 달린 커다란 별장식을 쳐다보았다.

         어디를 봐서 정정당당한 승부라는 거야, 사자 심장에 몰래 벌레를 심어 놓고.

         

         > 나무 꼭대기에 중계기는 언제 설치했어? 음흉하기는….

         > 아닛!! 음흉하다뇨! 평소에도 저항 활동에 다대한 관심이 있던 작업자분께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부탁드린 회심의 한 수를 폄훼하지 말아주세요!

         

         얼씨구. 간단히 말해 크레딧으로 매수했다는 거구만.

         그럴 여윳돈이 있었으면 나한테도 찔러준다고 제안이나 해주지…! 그랬으면 10분은 채우게 눈감아줬다.

         

         쾅!!

         

         따로 부탁이나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나와 함께 근원지를 확인한 깡통이 알아서 발을 굴렀다.

         탄환처럼 쏘아진 몸체가 인파를 지나쳐, 스테이지 뒤로 가라앉는다.

         

         목표는 저 드높은 성탄절 첨탑. 그냥 총으로 부숴 버리기만 해도 다른 해커들이 로잘린을 밀어내겠지만… 아론의 부탁을 대충하기는 좀 후환이 걱정되니까!

         

         “그! 뒤늦게 말하기는 뭐한데 최대한 카메라에 안 보이게 타고 올라가!”

         

         광고에서 케어봇은 섬세한 가사일에 어떤 실수도 없도록 세부적인 관절이 모두 구현되어 있다고 했나?

         자기가 곡예사라도 된 것 마냥 모니터를 밟고, 한 손으로 전깃줄을 잡아당겨 반동을 이용해 쭉쭉 올라가는 깡통은 전투 드로이드 부럽지 않은 퍼포먼스를 뽑내고 있었다.

         

         바쁜 대로 무작정 움직이고 봤는데, 안전 요원들의 통제나 협조 요청도 무시한 채 날아다니는 드론에 또 찍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거점을 바꿀 예정이라도. 초신성 해커 같은 쪽팔린 소문이 더 확산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나중에 아카이브를 뒤집어 엎던가 해야지.

         

         > 아—!! 아나스타샤 당신! 거기를 직접 손대는 건 네트워크 정보전이나 실력 대결이 아니잖아요?!

         > 기억하렴. 승부의 세계는 꽤 냉정하단다?

         

         팡!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최후의 도약이 완료되자, 어느새 우리는 꼭대기 근처에 매달려 있었다.

         

         귓가를 쌩쌩 스치는 바람도 차고,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절할 높이는 오래전에 지나쳤지만 이상하게도 걱정은 없었다.

         

         아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족보행형 자가용의 승차감이 너무 뛰어나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러면 얼른 접속을….”

         

         콰지직!!

         

         별장식 내부에 숨겨진 중계기에 어떻게 접근할까, 고민을 다 입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호쾌하게 휘둘러진 철권-말 그대로의 강철 주먹질-이 별을 작살내고 안에 있던 회로 다발을 통째로 붙잡았다.

         

         얘는 감전 위험에 대해 한바탕 설교해주고 싶게 하네?

         얌마! 세상 유일한 전기 능력자도 그런 무식한 짓은 안 해!

         

         – 접속, 완료했습니다. –

         

         “너 조금 과하게 시원시원한 거 아냐?!”

         

         원래라면 허가된 신호와 미식별 신호, 로잘린의 수작질을 구분하고. 재차 밑에 있는 직원들에게 연락해서 상영물을 뭘로 대체해야 하는지 확인하고 그래야 맞겠지만… 나도 유도리 좀 발휘할 수 있겠지.  

         

         “어… 어라?”

         “저 사회자님? 불꽃놀이 카운트다운이 혼자서…!”

         

         밑 무대와 광장이 시끌벅적해진다.

         그야 순항 미사일처럼 요란하게 생긴 폭죽들에 멋대로 점화가 시작되고, 무단 점거 당했던 모니터들이 다시 ‘Happy New Year~’같은 태평한 문구나 띄우고 있으면 불안할 만도 하나.

         

         다 좋은 뜻으로 하는 행동이니 부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쇼의 핵심은 더 화려한 속임수로 가린다. 고식적이다 못해 케케묵은 마술의 기초이지만 시선은 확실하게 끌 수 있으니.

         

         피융? 피슝?

         그런 시시한 효과음으로는 담아내기 힘든 굉음을 내며 폭죽들이 차례대로 쏘아 올려진다.

         

         반응해주기 힘든 반기업 선전물과는 스케일이 다른 미사일 세례가, 이윽고 지정된 높이에 다다라 폭발하자.

         

         쿠구구궁!!

         

         “왁?!”

         “이야… 하늘에서 돈이 터지네 돈이 터져….”

         

         옅은 진동과 거친 바람이 도시를 휘감았고 곧이어 인조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는다.

         그 와중에도 은하수 옆에 야자수 비스무리한 형상을 그려서 파라다이스 로고를 만드는 건 집착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눈은 즐거웠다.

         

         거기에 미뤄졌던 점등식마저 동시에 진행하니,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진 광장에 더 이상 눈동자 조명이 비출 어둠도 남지 않았다.

         

         > 으으으으!! 두고 봐요…!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 그래 그래, 오늘은 그만 속 썩이고 들어가고. 나중에 풀 컨디션으로 다시 붙어보자.

         

         결국 시위라는 건 주목받지 못하고, 대중의 호응이 없으면 무산되는 법이니. 완전히 시스템에서 퇴출당한 로잘린이 잔챙이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채널에서 탈주했다.

         

         여자애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얘는 자신만만한 것보단 울먹이는 게 더 어울릴지도.

         

         “그… 그럼 예고드렸던 대로! 이번 연금 복권 추첨 실황 중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정신을 부여잡은 사회자 씨의 외침에 분위기가 고조된다.

         중간 단계를 좀 많이 건너뛰었지만 어떻든 간에 행사 일정은 지켜져야 하니까. 나머진 말로 때우던 주최측과 입을 맞추던 알아서 해결하겠지.

         

         “음….”

         

         – 이만 지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

         

         “……아니, 조금만 더 있자.”

         

         상황실 뺨치는 추위는 별로여도 경치는 그럭저럭 봐 줄만 했다.

         

         말도 많고, 그만큼 더럽게 탈도 많았지만 어찌어찌 괜찮게 적응했던 곳을 떠나 맨땅에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건. 내가 최초부터 계획했던 일정이라 해도 부담이 컸다.

         

         설령 거기가 익숙한 네오 헤이븐이여도, 일렁이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건… 심리적으로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그러나….

         

         콩콩.

         

         – ? –

         

         중계기에 쑤셔 박았던 손을 가볍게 두들긴다. 일단 소리는 맑고 청아한 게 멀쩡해 보인다.

         

         바로 여기서 내가 미친 척 점프한다고 해도 반드시 추락하는 몸을 붙잡아줄 녀석과 같이 가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웅성거리는 마음을 휘감았다.

         

         인생,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이미 나나 깡통이나 한 번 죽고 되살아난 몸이니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면 또 죽을 수도 없었다.

         

         뭐, 궤변이라고? 이 존재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연구소 출신(Ground Zero) 듀오를 막으려면 어지간한 억지로는 부족할 것이다.

         

         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 이름처럼 텅텅 비어서 아직 배울 게 많지만 그건 내가 도와주면 될 문제니까.

         

         ……잠깐만, 텅텅 비어? 뭐야 이렇게 시대상에 어울리고 멋있는 이름이 있었는데 왜 진작 못 떠올렸지? 아니, 원작 캐릭터 중에 이 별명을 가진 게 정말 아무도 없었나? 와 진짜로?

         

         “…제로.”

         

         혀를 타고 흐르는 매끄러운 어감.

         다소 뜬금없이 던진 단어에도 깡통은, 제로는 귀신같이 반응했다.

         

         “이제부터 제로라고 부를게. 발렌타인 성은…… 할아범 허락을 맡게 되면 붙이는 거로 하고.”

         

         같은 시작점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도, 앞으로 빈(Zero) 부분을 채워 나간다는 뜻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명칭이라고 자부한다.

         

         단어가 품은 힘도 강하고. 만약의 선택을 대비해 중성적인 느낌도 좀 나고.

         

         – 그게… 제 새로운 이름…입니까? –

         

         찬 바람을 너무 오래 맞아서 그런지, 전보다 뻑뻑해진 케어봇 음성이 들렸다.

         그러고보니 저온에서는 전자기기의 접합제가 떨어져 나가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나? 얼른 퇴근하고 보수부터 챙겨서 수리 센터로 달려가 봐야겠다.

         

         “……바보, 이름을 어떻게 줬다 뺏겠어? 그냥 편하게 부르는 애칭이라고 생각해.”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좋아, 아주 활기차군!

         그러면 어디 천천히 지면으로 돌아가 보실….

         

         …저기, 제로? 어떻게 두 팔로 날 감싼 거야?

         양손을 다 떼버리면 나무엔 뭘로 붙어 있을라고? ……이게 제일 빠르다는 게 무슨 미친 소리인데. 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 최초로 따지면 독일이 원조죠.

    14-3까지 합쳐서 2회차 분!
    이걸로 겨우 수호 천사 에피소드가 끝났네요. 쓰다보면 항상 예정보다 길어져서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립니다.

    빵먹는수아 님의 글루텐 프리 100코인 후원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이걸로 연참한 셈 치고 하루 쉰다고 하면 돌 맞을까요? 아니, 돌은 당연히 맞을 텐데 아프게 맞을까요? 히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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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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