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5

       “-천것들이 점점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

         

       빠각.

         

       눈부신 백은발을 휘날리는 고귀한 왕태녀의 손에서 만년필이 부러졌다.

       왕태녀가 쓰는 것인 만큼 상질의 재료로만 특별 제작된 것이거늘.

       즉, 재료가 비싼 만큼 그 튼튼함은 상당한 바였는데, 그걸 손쉽게 부러트리는 것만으로도 왕태녀가 마냥 허약한 여성이 아니란 증거가 아닐까 싶다.

         

       “아깝군요. 제법 좋은 만년필이었는데…. 힘 조절 좀 하시지요, 비약을 삼시세끼 먹고 자란 것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구나. 집사면 집사답게 주인의 손을 걱정하여도 부족할망정.”

       “그거야 평범한 아가씨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공주님을 걱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허.”

       “…건방져.”

         

       쯧!

         

       마음에 안 든다며 혀를 차는 그녀, 아이시스 팬드래건이었고. 아이시스는 부러진 만년필을 털어내며 시원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후우, 이래도 마음 속 화가 가라앉질 않는구나.”

       “허허,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무렴. 이 천것들이 계속 심기를 건드리지 않더냐.”

       “…입조심을 하셔야겠습니다. 자칫 공적인 자리에서 ‘길드’를 향해 그토록 무도한 발언을 하셨다간 화를 입으실 겁니다.”

       “헛소리.”

         

       아이시스는 멸시 어린 코웃음을 내었다.

         

       천한 것.

       즉 [길드 조합]에 대한 야멸찬 경멸을 아낌없이 드러내는 그녀였다.

         

       ‘지저분한 쥐새끼들 같으니.’

         

       길드 조합.

       그들은 현재 왕국을 지탱하는 [귀족의회], [상인연합], [용병총합] 등과 함께 대두되는 네 번째 일각으로 손꼽히는 세력이었다.

         

       귀족 의회처럼 명예와 권력, 위세 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상인연합처럼 자금의 흐름을 움켜쥐지도 않았고, 그렇다 하여 용병총합처럼 독자적인 군벌(軍閥) 조직도 아니었으나….

         

       “명심하시지요, 길드는 이 왕국, 아니 대륙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인력을 거느린 세력이란 것을. 잘못 건드렸다간 ‘민심’을 잃기 십상입니다.”

       “내가 그것을 모를까, 감히 나를 가르치려는 것이냐?”

       “걱정 많은 늙은 집사의 충언이라 여기시지요, 흘흘.”

       “……흥.”

         

       입만 살아선.

         

       아이시스는 불만 어린 얼굴로 제 집사를 보았고, 마음 같아선 골탕이라도 먹이고 싶지만, 저 집사에게 골탕을 먹이려다가 외려 그녀 본인이 골탕을 먹을 수도 있기에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하여간, 능력 있는 놈들은 다 건방지다.

         

       ‘…그래, 나라고 해서 어찌 모를까.’

         

       허나 인정해야 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군주의 자세인 바.

       아이시스는 알버트의 충언인지 잔소리인지 모를 말을 되새기며 머리를 식혔다.

         

       ‘거슬리는 쥐새끼를 잡기 위해선, 그 쥐새끼의 습성을 파악해야 할 테지.’

         

       ‘적’에 대해 명확히 아는 것이 적을 무너트리는 전략의 우선순위인 법.

       하여 아이시스는 퉁명스럽게 말할 뿐, 더는 화를 내지 않았으나….

         

       ‘…이럴 때만큼은 선왕이 원망스럽구나.’

         

       속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으리라.

         

       …애초에 길드의 힘이 왕도에서 커지게 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다름 아닌 선왕이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 길드가 본격적으로 세를 부풀린 시발점이 아닐 수 없다.

         

       생전의 선왕이 이르길-.

         

       – [귀족이나 상인의 힘이 너무 커진다면 그것은 기득권의 힘이 지나치게 커져, 백성의 곡소리가 커질 우려가 있다. 힘없는 자들은 제대로 된 소리조차 못 내고, 가진 자들만이 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어찌 올바른 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하니, 백성들의 목소리를 드높이며, 충분히 기존의 기득권과도 맞설…. 그래, 백성들만을 위한 세력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니, 길드의 힘을 키워주도록 하자. 귀족과 상인들의 패악질이 커질수록, 그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도리어 더욱 똘똘 뭉칠 세력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무시무시한 선구안이 아닐 수 없다.

         

       기존의 기득권.

         

       귀족과 상인 등이 멍청하고 더러워질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짐을 선왕은 이미 간파한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의 불만을 무시하며 내버려둔다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수년 전의 전쟁에서 보았지 않은가.

         

       ‘브리튼이 그렇게 망했지.’

         

       팬드래건의 오랜 적국 브리튼 왕국이 망한 이유는 팬드래건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탓도 있지만, 그건 망국(亡國)으로 향하는 신호탄이었을 뿐, 그들과 전쟁이 나기 전부터 브리튼은 망해가는 실정이었다.

         

       자업자득.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

         

       ‘…어처구니없었지.’

         

       패배했을지언정 남부대륙 최대의 곡창지대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분명 재기할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 어떤 백성도 브리튼의 재건을 염원하지 않고, 방치해두길 망설이지 않았으니….

         

       백성과 나눌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한 세금과 물가를 높이는 우를 연달아 범하여 백성의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물이 아닐까 싶었다.

         

       뭐, 덕분에 팬드래건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인구 유입과 통합이 나름 쉽게 되었으니 팬드래건 입장에선 적들의 어리석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뭐, 반란 세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아이시스에게 있어 훌륭한 반면교사가 되어 주기도 했다.

         

       ‘왕국은 단순히 군주의 것이 아닌, 백성의 것이기도 한 것이지. 백성의 신뢰를 잃는 순간이야말로 이 나라가 진정으로 무너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겠지.’

         

       망국의 시작.

         

       …그리고 망국의 길로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라도 길드와의 원활한 소통과 대면은 필요한 과정이었다.

         

       비록 더러운 시궁쥐가 모여 만들어진 세력일지언정, 그들이 힘없는 백성의 목소리를 대변해준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하니까.

         

       다만.

         

       “그래도 공주님께서 분통을 터트리시는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닙니다. 선을 넘는 짓을 하는군요. 설마 대귀족들과 뒷거래를 시작했을 줄이야, 이거야 원.”

       “이제 와서 편을 들어줘봤자 늦었다.”

         

       -이렇듯 ‘호의’를 ‘권리’로 여기게 되면서 점차 [균열]이 발생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아이시스가 표정을 굳히곤, 서류를 다시금 훑으며 혀를 찼다.

       역시 몇 번을 봐도 불쾌하다.

         

       “‘대귀족 및 여타 상단과의 은밀한 회동이 확인된다’…라, 얄팍한 것들. 이제 배가 부르니 권력마저 손에 넣고 싶은 것인가.”

       “권력보단 왕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군요. 덩치가 커지니 저들이 개인 것을 잊고, 늑대가 된 줄 착각하나 봅니다, 허허.”

       “…상황이 재밌나 보군.”

         

       아이시스는 언뜻 신랄하게 느껴지는 알버트의 말투 속에서 웃음기를 느꼈다.

       저건 아무리 봐도 귀족들과 길드의 야합 등을 보고 즐거워하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싸움 구경이란 원래 재밌는 거니 말입니다.”

       “…….”

         

       역시, 저 집사의 탈을 쓴 [초인]의 눈엔 권력 쟁투니, 새로운 군벌의 탄생이니 하는 것조차 별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듯하다.

       하긴 저자의 눈엔 그들의 행위 전부가….

         

       ‘언제라도 무너트릴 수 있을 모래성처럼 보일 뿐이겠지.’

         

       …하여간, 우수하지만 감당하기 벅찬 집사가 아닐 수 없다.

         

       “후우.”

         

       아이시스는 곱게 빗은 머리칼을 흩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악재와 상황, 명분 부족 등이 겹치며 머리가 아프다.

         

       길드를 징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귀족과 상단 등과 뭘 꾸미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마찬가지로 귀족과 상단의 꿍꿍이가 아직 명확히 보이지 않는 바.

         

       하여 여러모로 골만 아플 따름이었고, 아이시스는 야간까지 잔업은 확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의 고난이야말로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힘내시길.”

       “…여의 나이가 올해로 마흔이다만?”

       “이한 경이 가끔 하는 말로 비유하자면, 아직 한창 정정한 이팔청춘이군요.”

       “…….”

       “그리고 왕족이 어디서 나이 타령입니까? 150세를 넘으면 나이를 들었다 자랑하십시오.”

       “으음….”

         

       왠지 백세를 넘기고도 일만 하라는 말처럼 들려 내심 마음이 복잡한 그녀였다.

         

       그때.

         

       똑똑.

         

       “왕녀님! 저 왔어요!”

       “…노크를 하였다면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아, 맞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게요.”

       “……되었다.”

         

       뭐라 하는 자신의 입만 아프지.

         

       아이시스는 해맑기 그지없는 시녀를 보고 있으려니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파 잠시 미간을 짚었다.

         

       레이라 윈터.

       의동생을 시중들란 임무를 준 아이시스의 직속 시녀였다.

         

       …소식을 들은 바에 의하면 시중을 드는 게 아니라, 의동생의 살림을 파괴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허나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이시스가 신경 쓸 게 아니었고, 지금 신경 쓰이는 건 저 해맑은 시녀가.

         

       “너의 성실함을 믿고 의동생에게 붙여놓은 것인데, 어찌 하여 왕성에 있는 것이냐? 설마 여의 명령이 우스운 것이냐.”

         

       어찌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왕성에 있느냔 것이다.

         

       뭐, 그녀가 시녀를 혼낼 셈으로 꾸짖은 건 아니었다.

       단지 습관처럼 혼을 내는 것이고, 어차피 자신이 혼을 내봤자 저 아이는 못 알아먹을 터이니.

         

       사실상 정말 궁금증에 가까운 것이었고, 레이라는 특유의 초롱초롱한 시선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요, 기사님이 전해달란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 애가?”

       “네엥!”

       “흠.”

         

       아이시스는 그가 웬만해선 자신에게 말을 전달하지 않음을 안다.

       가끔 가다 은근슬쩍 말을 흘리는 경우는 있어도, 이토록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경우는 극히 없다.

         

       …찜찜하다.

         

       그리고-.

         

       “기사님이 그러는데, ‘길드랑 한 판 붙을 것 같으니까 뒷수습을 좀 부탁합니다’라고 전해달래요! 명분은 아무거나 적당히 만들어주면 될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

         

       그녀의 불안감은 적중했고, 아이시스는 다시금 손으로 미간을 짚었으나.

         

       “허허, 역시 최고의 인재입니다. 공주님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주지 않습니까, 허허!”

       “웃지 마라. 여가 지금 이렇게 심각하거늘.”

       “유쾌하지 않습니까. 늘 제 기대 이상을 해주어 즐겁군요.”

       “헛소리.”

       “…흠. 말하는 거랑 달리.”

       “…….”

       “즐거우신가 보군요.”

       “…….”

         

         

       ─만족스러운 희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그리고, 당당히 일국의 왕태녀에게 뒷수습을 부탁해 놓은 기사는-.

         

       “-말 잘하는 게 좋을 거다. 한 번이라도 네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면 네 목부터 딸 거니까.”

         

       “…….”

         

       …길드 조합장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이었다.

         

       “……하.”

         

       길드 조합장은 어안이 벙벙하여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눈앞에서 흉흉한 기세를 남발하는 기사와 널브러진 부하들.

       이곳저곳 파괴된 문과 책상, 건물의 바닥.

       탁자 위에 꼿꼿이 꽂혀 번들거리는 손도끼까지.

         

       진퇴양난.

         

       물러설 수 없는 위기상황이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는 차마 기사의 얼굴을 대놓고 볼 수 없었다.

         

       ‘염병할, 제대로 미친 새끼한테 걸렸네…!’

         

       …차마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서.

         

         

       자고로 귀신보다 무서운 건 손도끼 들고 살의로 안광이 번들거리는 인간임을 새삼 인지하는 조합장 사이먼이었다.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