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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내가 걸음을 한 발짝씩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온다. 마치 내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호기심이 동한다는 것처럼.

        ​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감시받는 듯한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터였다.

        ​

        주인공의 자리를 뺏었다는 건 모든 이목이 내게 쏠린다는 뜻이니까. 

        ​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

        ​

        허나 한때 내 몸을 뒤덮고 있던 갑옷보다도, 기사로서 짊어졌던 의무보다도 무겁지는 않다.

        ​

        “저어…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조금의 두려움과, 얼떨떨함이 섞인 목소리. 나는 다소 심약해 보이는 인상의 도사에게 포권을 하며 물었다.

        ​

        “그쪽이 학운 도사님입니까?”

        ​

        “아닙니다. 저는 학종이고, 학운도사는 제 사형이십니다.”

        ​

        “…제가 학운입니다. 헌데 사자검협께서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

        도복을 입은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학운이 앞으로 나서 입을 떼자, 도사들이 전부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

        아무런 연이 없던 내가 뜬금없이 말을 거는 상황 자체가 신기한 거겠지. 나였어도 웬 외국인이 갑자기 와서 말을 걸면 그럴 터였다.

        ​

        “평소에 무당무공부주진공, 연이역불가경이침범(武当功法不主进攻,然而亦不可轻易侵犯, 무당의 무공은 공격적이지 않으나 감히 침범할 수 없다)이라는 무당의 검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

        본디 저번 비무대회에서 비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했으나…아쉽게도 무산되어서 말입니다.”

        ​

        “위 대협의 말은, 비무를 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

        학운 도사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갑작스럽게 비무 신청이 걸려 온 것이니 당연한 반응. 나는 그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

        “맞습니다. 가벼운 비무형식으로 검으로 친교를 다지고 싶습니다.”

        ​

        “검으로 교분을 나눈다라! 본디 무인은 입이 아니라 무로써 친분을 다지는 것! 사자검협께서는 진정 무인이신가 보오! 하하하!”

       

        예상했던 대로, 이런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남궁휘가 우리들의 대화에 끼어들며 은근슬쩍 분위기를 돋구었다.

        ​

        학운도사는 여전히 난감하다는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밀어붙이는 걸 거절할 명분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알겠습니다. 가벼운 비무라면…”

        ​

        “이번 용봉지회의 첫 친선비무는 사자검협과 송문검룡 학운 도사가 되겠군!”

        ​

        “무당의 검과 서역의 검이라!”

        ​

        “아주 기대되는 비무로다!”

        ​

        사람들의 열띤 반응 속에서 나는 방의 한가운데로 천천히 걸어갔다. 학운 도사도 동료에게 이런저런 물건을 건네더니, 검만을 들고 가운데로 걸어갔다.

        ​

        전부 예상대로 흘러갔군.

        ​

        나는 스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검을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한 학운 도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검날에 있는 소나무 모양이 불빛을 반사하여 기이한 빛을 흩뿌렸다.

        ​

        “좋은 비무 부탁합니다.”

        ​

        “질 좋은 자양분이 될 비무가 되길 바랍니다.”

        ​

        허리춤에 걸어두었던 롱소드를 뽑아 든다. 내가 롱소드를 뽑아 들고 옥스 자세를 취하자, 곳곳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

        이제 시작인가.

        ​

        우리가 준비를 끝내자, 남궁휘는 손수 심판역할을 자처하며 우리 사이에 섰다.

        ​

        “용봉지회 친선비무의 전통대로, 검기의 사용은 불가하며, 살수를 쓰는 것도 금지요! 그 외에 규칙은 없으나, 명확하게 승패가 가려지는 순간 개입할 터이니 마음껏 자신의 검을 보여주시오!”

        ​

        드디어 무당의 검을 볼 수 있는 건가.

        ​

        어쩌면 내 경지상승에 가장 도움이 될지도 모를 비무가 시작되었다.

        ​

        ​

        ———————

        ​

        ​

        ‘이런 식으로 비무를 하게 될 줄은…’

        ​

        학운은 거리를 두고 자신을 쳐다보는 거구의 사내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8강에서 승리했다면 싸웠을 상대와 이런 식으로 싸울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

        세간에서 사자검협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는 색목인.

        ​

        위리엄(衛利淹).

        ​

        어떤 의도로 비무를 신청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푸른 눈에 담겨있는 것은 순수한 호승심과…열망.

        ​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검수가 검으로 친교를 다지는 것은 당연한 것. 서로 얻어가는 비무가 될 수 있다면…좋겠습니다.’

        ​

        “비무를 신청한 것은 저이니,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

        윌리엄의 발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

        순식간에 학운 도사와 윌리엄의 거리가 좁혀졌다. 스무 걸음이라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가 순식간에 4걸음 안쪽으로 줄어들자 광경을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학운 도사에게로 향했다.

        ​

        학운 도사가 즐겨 쓰는 검법은 유운검(柔雲劍). 무당의 검 중에서도 상승 절기의 입문에 해당하는 검공이지만, 그 수준 높은 세간의 유명한 검법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

        부드러운 구름 같은 움직임을 자랑하는 무당의 검.

        ​

        학운 도사의 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윌리엄의 검을 막아냈다.

        ​

        ‘은공의 검과 무당의 검은 본질은 다를지언정 비슷한 검리를 가지고 있으니, 오히려 강검끼리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게 부딪히는군요.’

        ​

        목경은 두 사람의 부드럽고 깃털같이 가벼운 검무에 눈을 번뜩였다.

        ​

        본디 이화접목의 원리를 채용하는 무당의 검은 비슷한 류의 검법을 찾기가 힘든 편이었다.

        ​

        아차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기 쉬운 무림에서 숙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살상보다는 제압에 이점이 있는 검리를 사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

        속도를 추구하는 쾌(快).

        ​

        극한의 변화를 추구하는 환(幻).

        ​

        강한 힘을 추구하는 강(强).

        ​

        무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쓰이는 세 가지 검리가 아닌, 유(柔).

        ​

        무당의 검은 언제나 부드러움(柔)을 담았으니, 이는 무당의 검이 무림의 일절로 불리는 이유이며 그들이 남존무당(南尊武当)이라 불리는 평가의 근원이리라.

        ​

        ‘역시 무당. 다른 검사들과는 느낌이 전혀 달라.’

        ​

        윌리엄은 생각 이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검에 감탄하며 학운 도사의 검을 흘려냈다. 벌써 스무 번째 합이었지만, 두 사람의 검은 마치 검무를 추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

        “대단한 검이십니다.”

        ​

        “무당의 검이 천하 일절이라더니, 그 말이 틀린 게 없습니다.”

        ​

        두 사람은 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답지 않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했다. 불똥이 튀고 가열차게 싸움을 벌이는 비무가 아닌, 합을 맞춰 같이 추는 검무.

        ​

        무림인들은 그 기이한 비무를 보며 그저 탄성만을 흘렸다.

        ​

        무당의 검이 비슷한 검리를 추구하는 검과 비무를 벌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니까.

        ​

        ‘내 선택이 맞았군.’

        ​

        검술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선, 그리고 경지의 상승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경험.

        ​

        그는 단순한 깨달음보다, 경험을 더 중요시했다. 그가 단기간에 경지를 끌어올렸던 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사투 속에 쌓아온 경험이었으므로.

        ​

        그렇기에 그는 한 번 한 번의 검격을 두 눈에 담으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

        자연스럽게 상대의 검격속으로 몸을 들이민다.

        ​

        위험천만한 행동이지만,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필요한 법. 그는 학운도사의 검이 순간적으로 멈춘 것을 보곤 가볍게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

        거리가 조금 더 가까운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별 차이 없는 검격.

        ​

        학운 도사는 조금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윌리엄의 검을 부드럽게 흘려내려 했다.

        ​

        ‘지금인가.’

        ​

        윌리엄은 검을 굳게 쥐고 있던 손을 하나 떼고 학운 도사의 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

        ‘금나수법?!’

        ​

        검을 휘두르는 도중에 금나수법이라니. 기이한 수법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학운 도사의 손이 윌리엄의 손과 어우러졌다. 

        ​

        하얗고 부드러운 손과, 거칠고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얽혔다 떨어졌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음을 확인한 윌리엄이 감탄하며 물었다.

        ​

        “혹시, 그게 태극권입니까?”

        ​

        “송엽수입니다만, 근본을 따지자면 태극권이지요.”

        ​

        “듣던 대로 대단한 권법입니다.”

        ​

        “기초적인 권공일 뿐입니다.”

        ​

        ‘과연 무당. 이 정도의 권법이 기초공에 불과하다니…’

        ​

        둘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한 손으로 공수를 반복했다. 

        ​

        당기고, 밀고, 꺾고.

        ​

        단순히 손만을 사용하는 접전이었음에도, 후기지수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손의 얽힘 속에 얼마나 많은 노림수가 들어가 있는지 모르는 자가 없었으니까.

        ​

        혹자는 자신이라면 어떻게 저 수에 반격해야할지 고민하며 생각에 잠겼다.

        ​

        어느샌가 검법이 아닌 금나수법을 겨루는 비무가 된 상황. 두 사람은 이대로는 싸움이 끝나지 않음을 직감하고 서로 세 발짝 뒤로 물러섰다.

        ​

        “슬슬 끝을 봅시다.”

        ​

        “그러지요.”

        ​

        윌리엄의 몸이 자세를 낮추고 학운 도사를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물소의 돌진처럼 그를 덮쳐오는 윌리엄의 모습에 학운 도사는 차분한 눈빛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

        윌리엄의 검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러진다. 전형적인 횡베기. 허나 그 누구도 그의 검이 정직하게 휘둘러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학운도사는 검을 수직으로 세워 윌리엄의 검을 부드럽게 받아냈다. 

        ​

        ‘가볍다.’

        ​

        이것은 실초가 아니다.

        ​

        그 사실을 파악한 순간 윌리엄의 손목이 돌아가며 반대쪽 검면을 노렸다. 학운 도사는 그 기이한 동작을 가까스로 흘려냈다.

        ​

        ‘노림수를 흘려냈으니, 이젠-’

        ​

        그 순간, 학운 도사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흔히 철판교라 불리는 자세.

        ​

        아슬아슬하게 세 번째 검격이 그의 몸 위를 지나간다. 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앞으로 내밀어 찌르는 공격. 허를 찌르는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낸 학운 도사는 자세를 되돌리고 검을 휘둘렀다.

        ​

        허나 윌리엄의 검은 어느샌가 회수되어 다음 출수를 준비한 상태. 윌리엄은 학운 도사의 검을 막으려는 듯이 앞으로 내밀고는, 갑작스레 칼날을 잡고 코등이와 손잡이로 학운 도사의 검을 받아냈다.

        ​

        ‘이런?!’ 

        ​

        “검을 거꾸로 쥐다니?!”

        ​

        “저런 기이한 초식이 존재하다니, 서역의 검술은 신묘한 구석이 있군!”

        ​

        “저렇게 칼날을 쥐고 있는데 손이 베이지 않는다니, 내공으로 보호한 것인가? 아니면…”

        ​

        유검에는 모든 것을 부드럽게 타고흐르는 물 같은 흐름이 중요한 법.

        ​

        허나 움직일 곳 없이 고정된 상태라면, 유검은 제대로 펼쳐질 수 없다. 윌리엄은 검을 옆으로 올려 학운도사의 자세를 무너트리고는, 한 바퀴 검을 돌려 코등이를 학운 도사의 목에 살며시 갖다댔다.

        ​

        “…졌습니다.”

        ​

        생전 처음으로 코등이가 목에 닿은 상황.

        ​

        학운 도사는 숨을 내쉬며 패배를 선언했다.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부드러우나 살인을 위해 연마된 검법.

    제압을 위해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검법.

    미묘하게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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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Medieval Knight in a Martial Arts Novel

무협소설 속 중세기사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fter two years of being reincarnated as a medieval knight, he finally realizes that he's been reincarnated into a martial arts n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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