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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콰르릉!

         

        번개가 끊임없이 내리친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백발 소녀는 비가 거세지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꿉꿉한 냄새 때문에 기분이 절로 불쾌해졌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원래 자신은 여기 관할이 아니다. 이 지역을 관리 감독하는 마수는 요르문간드였다.

         

        그러나 그녀가 워낙 빈둥대며 마왕군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이런 촌동네까지 내려와야만 했다.

         

        어디 그뿐이랴. 지금 에테르가 이 지역에 머무르고 있다.

         

        “언니 아니었으면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백발금안의 소녀는 한숨을 내쉬며 젖지 않은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들로 모닥불을 만들었다.

         

        적어도 요르문간드에게 가는 동굴이 열리는 새벽 2시까진 여기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한다.

         

        “심심하네.”

         

        아무 의미 없는 혼잣말이 동굴에 메아리친다.

         

        그렇게 소녀가 지루함에 못 견뎌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였다.

         

        캄캄한 동굴 입구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는 소리에 눈을 떴다. 폭우를 피하지 못한 모양인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푹푹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의외의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야. 또 만났네?”

         

        살리에르 백작가의 차녀, 로테 살리에르.

         

        어깨에서 끝나는 다홍색 단발이 어제와는 달리 푹 젖어있었다. 마찬가지로 흠뻑 젖어버린 와이셔츠 너머로는 속살이 비칠 지경이었다.

         

        “넌….”

         

        물에 젖은 생쥐 꼴로 나타난 로테는 곧바로 기겁한 표정으로 백 스텝을 밟았다.

         

        로테에게 눈앞의 소녀는 사나운 맹수 그 자체였다. 재앙급 마수 두 마리를 힘 하나 안 들이고 제압한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은 존경이라기보다는 공포였다.

         

        그런 맹수가 바닥을 탁탁 짚으며 이리 오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감기 걸릴라. 이리 와서 불이나 좀 쐬는 게 어때?”

         

        나긋나긋한 어조였다. 에테르를 흉내 내는 듯한 말투와 억양이었는데, 로테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눈앞의 소녀는 그저께 밤 펜릴 두 마리를 제압한 후 소녀에게 당장 이 숲에서 나가라고 협박했다. 그와는 반대로 오늘은 먼저 오라는 반응을 보이다니. 알다가도 모를 존재였다.

         

        미지는 곧 공포다. 로테는 백발 소녀의 패턴을 읽어 들일 수 없었다.

         

        쭈뼛거리던 로테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소녀 옆으로 다리를 오므리고 앉았다.

         

        “그대로 앉지는 말고. 저체온증에 걸려 뒤지기 싫으면 웃옷 벗고 상체부터 말리는 게 좋을 거야.”

        “옷을 벗으라고…?”

        “그므는.”

         

        귀족 가문의 아가씨가 아무 곳에서나 탈의하는 건 시대상에 맞지 않은 짓이었다. 그래봤자 뭐 어쩌겠는가? 죽기 싫으면 벗고 몸 내부부터 잘 말려야지.

         

        머뭇거리던 로테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켜며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백발 소녀는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차댔다.

         

        이런 녀석이 제국에서 떠받들어주는 천재라니.

         

        “나중에 졸업하고 전장에 나가서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고문관 소리 듣는다?”

        “고문관이라니….”

        “그러니까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라고.”

         

        로테가 면직물을 말리는 사이 소녀는 마른 지푸라기와 나뭇가지들을 주워 불씨 안으로 내던졌다. 자신 또한 마력초를 꺼내 숨이 끊어져 가는 불길에 불을 옮겨붙였다.

         

        마력초를 피우지 않으면 마법을 쓸 수 없는 불행한 종족, 금안족.

         

        이 불편함도 이제 몇 년이면 끝난다. 전계마도 정령왕의 자리를 찬탈하신 그분께서 부활에 성공하신다면 모든 금안족이 자유롭게 마도를 다룰 수 있게 될 테니까.

         

        “후우.”

         

        연기를 폐 깊숙이 밀어 넣은 소녀는 검지로 선화를 그렸다. 영창을 준비하기 위한 자세였다.

         

        언령은 길지 않았다.

         

        [팔정도(八正道) 제3식(式)]

         

        “테슬라(Tesla).”

         

        점점 사그라지고 있던 불길이 뭉근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셔츠에 남아있는 물기를 마저 털어낸 로테가 소녀의 영창을 듣고는 눈을 휘둥그레하게 떴다.

         

        “그 마법, 에테르가 쓰던 건데?”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에테르는 내 쌍둥이 언니 이름이라고!”

         

        팔정도의 기반이 되는 ‘마소 조작’이라는 고유마도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익히고 있는 사람은 소녀와 소녀의 언니인 에테르뿐이었다.

         

        “팔정도는 내 언니가 고안한 개념이니까 내가 쓴다고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야.”

         

        키와 목소리, 얼굴과 체형. 거기에 사용하는 최상급 고유마도까지.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면 모든 게 똑같았다. 이젠 둘이 혈연이 아니라고 우기는 쪽이 오히려 억지였다.

         

        “너 정말 에테르 동생 맞구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이름이 뭐야?”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고.”

         

        어차피 하루이틀 보고 말 잔챙이다. 이런 피라미에게 고명한 구천지대계 2석의 이름을 알려줄 만큼 소녀는 친절하지 않았다.

         

        “…….”

         

        더 할 말이 없었다. 두 소녀는 짚단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는 불길을 바라보며 한동안 멍을 때렸다.

         

        다행히 이번 폭우는 소나기에 그쳤는지라 불편한 동거가 오래가진 않았다.

         

        “불 빌려줘서 고마웠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로테.

         

        “다음에 또 만나자.”

         

        저런 말을 할 거면 눈이라도 마주 보고 해야 참 좋을 텐데.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던 펜릴을 단번에 제압해낸 괴물 앞에서 저런 말 하는 것도 나름의 용기이리라. 그동안 마왕님을 위해 여러 전역을 거친 소녀라면 알 수 있었다.

         

        “흐음.”

         

        싹 마른 와이셔츠를 두르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로테를 보며 비음을 흘린다.

         

        “PTSD가 꽤 생겼을 텐데.”

         

        절멸급이 살기를 제대로 내뿜으면 그 자리에서 졸도하는 이들도 있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강력한 마수가 목숨을 노려왔다는 걸 겪었으면 그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리바리하다.

         

        그렇지만….

         

        “담력이 있어.”

         

        자신에게 해후를 부탁한 연놈은 저 아이가 처음이다.

         

        소녀는 마력초 한 개비를 더 물며 어둠이 내려앉은 피치블렌드 산에 올라갔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금안족의 몸으로 등산하더라도 낙룡봉까지의 거리는 꽤 됐다.

         

        입에선 점차 쓴맛이 느껴졌다. 소녀는 로즈마리에게 받은 스크롤을 펼쳐 마법을 하나 구현했다.

         

        [상급 고유마도 ─ 방사 방호(Radiation Defense)]

         

        피 대신 황화수은이 흐르는 금안족이야 피치블렌드 산꼭대기의 방사선을 받더라도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몸에 묻은 잔류 방사능으로 인해 만나는 인간마다 구역감을 느낀다면 소녀에게만 손해였다.

         

        피폭 때문에 자기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두 메스꺼워한다고?

         

        지금 같은 시기에 마수로 몰리기 딱 좋다.

         

        “들키는 것보다야 낫지.”

         

        괜한 의심을 사는 것보다야 조금 귀찮더라도 이런 마법을 두르는 게 낫다.

         

        무념무상으로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다다랐다. 거친 숨을 내쉰 소녀는 기암괴석이 있는 곳까지 발을 옮겨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요르문간드를 만나는 과정은 등반과 걸음의 연속이다.

         

        그리고 대화하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고.

         

        “백야인가.”

         

        뭔 일로 왔냐는 듯 능청스러운 말투로 시작하는 말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1석이면서 일 똑바로 안 해?”

         

        원래 계획대로라면 소녀는 이곳이 아니라 엘프들의 나라인 카우렐리아에 가서 세계수를 불태울 방법을 조사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 에테르 언니가 이곳에 와서 로즈마리가 변방 감시를 부탁한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이 녀석이 놀고먹어서 생긴 공백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

         

        “수인족을 동원해서 살리에르령을 치는 계획은 언제까지 미룰 건데?”

        “동포가 힘들어할 텐데 왜 여가 굳이 그런 신탁을 내려야만 하지?”

        “하이고, 1석님. 1석이면 1석답게 체통 좀 지키시죠.”

         

        -쾅!

         

        찰나의 순간이었다. 등 뒤로 달린 강철 꼬리를 바닥에 내리친 요르문간드는 으르렁거리는 어조로 답했다.

         

        “건방지군. 고룡 상대로 아가리를 털다니.”

        “용족은 계약을 중요시하지 않아? 마왕님이랑 계약을 맺었으면 우리 부탁하는 것도 좀 들어주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여는 여의 동지들을 지키고 정령족을 멸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말했거늘….”

         

        요르문간드에게 오늘 온 손님은 따분했다.

         

        그나마 이틀 전에 온 비슷한 아이는 말이 잘 통해서 좋았는데.

         

        “그러면 조약을 이행하는 게 좋을 거야.”

        “동포가 다치는 조약은 늑약과도 같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하는 수 없이 소녀는 대화 주제를 조금 비껴나가기로 했다.

         

        “그래, 그건 됐으니까 적어도 이 원자로나 잘 구동시켜 놔. 마왕님을 부활시키기 위해선 로드스톤뿐만이 아니라 막대한 에너지도 필요하니까.”

        “그거야 천천히 진행하고 있지.”

        “내 말은, 그걸 더 빨리하라고…!”

        “아무래도 그대는 용을 다루는 화법이 모자라는구나. 계속 생각해도 아까 온 손님보다 대화의 질이 훨씬 떨어져.”

         

        ‘아까 온 손님’이라고 해도 누가 언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용족은 기본적으로 시간 개념이 여타 종족과 다르다. 수명이 긴 만큼 하루를 일주일처럼 잡는다.

         

        심지어 이곳은 사방이 어둠으로 꽉 막힌 동굴. 시계 없이는 하루가 얼마나 지났는지 확인하지도 못한다.

         

        “어리바리하구나.”

         

        백발 소녀가 로테를 보며 들었던 생각과 똑같았다.

         

        로테를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이 그러했듯, 천 년을 넘게 살아온 요르문간드의 시선에도 소녀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됐다. 말을 말지.”

         

        자신이 아니더라도 1석을 설득하는 건 무리였을 터였다.

         

        마왕님이 없으신 지금 그녀보다 높은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2석 정도가 되어야 반말을 찍찍 내뱉어도 무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저 용이 관용을 베풀기도 했고 말이다.

         

        “원자로나 잘 완성해 두라고.”

        “재주껏 해 놓지.”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요르문간드를 뒤로했다. 소녀는 산비탈을 내려와 동굴로 돌아왔다.

         

        “안 되겠어.”

         

        계획을 수정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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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gic Academy’s Physicist

The Magic Academy’s Physicist

마도 아카데미의 물리학자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n era when the power of Fire Magic was considered to have reached its limit, one girl began researching nuclear f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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