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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엘리! 좋은 아침….”

       

       “어, 어! 잘 잤어? 좋은 아침이네. 날씨도 좋고. 응.”

       

       항상 잘 관리되어 있던 털과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있고, 다크서클은 그런 화장인가 싶을 정도로 짙게 드리웠으며, 초점을 잡지 못해 멍한 눈빛으로 횡설수설하는 엘리. 

       

       누가 봐도 제대로 못 잔 사람이다. 혼자 새로운 아침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새벽을 맞이한 얼굴 아닌가.

       

       “…혹시 밤 샜어요?”

       

       “아닌데?!”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펄쩍 뛰며 부정하는 엘리.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밤새 어제 본 거 생각하면서 딸 치셨나요….”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아침부터 그런 말을 하면…흐읏! 어떻게 하니!”

       

       “…….”

       

       내가 조금 야한 말만해도 느끼는 여자라니. 최고잖아! …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직접 보니 조금 몬가몬가네. 만약 밤의 침대 위에서 저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른 아침의 복도 아닌가.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무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상식인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약간의 현자타임이 오기도 했다.

       

       상식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왜. 글쟁이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들이 몇 가지 있잖은가.

       

       창작은 고통의 연속이니 계속해서 고통을 주면 글을 쓸 수 있다거나.

       

       작가는 어느 정도의 정신병이 있어야 하니, 모든 작가는 정신병자라거나.

       

       논리의 비약이 심한 폭론이긴 하지만, 조심스럽게…아주 조심스럽게 일정 부분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나는 너무 배가 불렀다.

       

       배가 불러도 상관없긴 하지만, 아직도 아공간에 잠든 팬티라거나 지금의 엘리를 보면 위기감이 느껴진달까….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내가 상식적인 인간이 될까봐 두려웠다.

       

       내가 만든 이 세계를 내 손길이 들어간 작품이 아닌, 평범한 세상으로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

       

       몬스터의 디테일한 구현에 감탄하지 않고, 모험가들의 음담패설에 키득이지 않으며,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이능에 감동받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이런저런 힘겨움이 따라붙긴 하지만, 판 대륙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나 다름없다.

       

       헌데, 그 선물에 질려버린다니.

       

       “…이대로는 안 되겠네요.”

       

       “어? 그으, 요나야? 갑자기 왜 그러는….”

       

       혼자 중얼거리던 엘리가 무엇을 착각한 건지 불안해하기 시작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리리라.

       

       생각을 굳혔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겠지.

       

       “엘리.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 아냐! 방금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오들오들 떠는 엘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너무 많이 하면 뼈 삭으니까 적당히 하세요. 그럼 이만.”

       

       마지막으로 엄지를 척! 올려주자, 멍한 표정 그대로 주저앉는 엘리.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우다다 계단을 내려갔다.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글을 쓰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요정과 은화를 박차고 나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지갑이었다.

       

       “3실버인가.”

       

       어제 가챠를 돌린 탓에 수중에 남은 돈이 고작 이것뿐이다.

       

       아니, 이걸 고작이라고는 할 수 없지. 가챠 때문에 슬슬 금전 감각이 맛이 가는 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3실버가 적은 돈은 아니니까.

       

       아껴 쓰면 일주일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적어도 종이와 펜을 사기에는 충분하겠지.

       

       적당한 잡화점에서 펜과 잉크. 그리고 싸구려 종이 한 다발을 사서 요정과 은화로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엘리가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며 궁상떨고 있었지만, 엘리가 가진 능력에 비해 찌질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은가.

       

       적당히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대로 내 방에 틀어박혔다.

       

       “쓰읍…그래서 이제 뭐 씀?”

       

       그동안 다시 한번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모험가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본업은 언제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었던 거고, 아마 그렇기에 사랑의 여신이 나를 불러온 거겠지만.

       

       다만, 정작 이렇게 각 잡고 펜을 잡자 머리속이 멍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녀역전 세계라고 생각하니까 쓸 수 있는 게 너무 적은데….”

       

       내 근본은 야설이다. 그리고 사랑의 여신 덕분에 이 세계에서 야설은 메이저한 장르고.

       

       잘 쓴 야설은 신전이 거금을 들여 저작권을 사들인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엘리의 방에서 몰래 몇 개 읽어봤는데, 확실히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문제는 전부 남역 버전이라 내게는 버거운 장면이 조금 있었다는 점이지만.

       

       “새로운 간수장이 된 젊은 남자가, 사악한 여자 죄수들에게 돌려 먹히며 타락하는 내용이라니.”

       

       엘리의 취향이 참으로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뭐어. 큰 틀만 놓고 보면 성적 타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인기 있는 소재긴 했다. 디테일한 부분이 조오금 그랬지만.

       

       문제는 이게 판 그레이브의 평균적인 취향이라는 말이다.

       

       항상 쓰던 대로 썼다가는 펨돔…아니, 멜돔 소리를 들으며 소수를 위한 마이너 취향 글이 되겠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처럼 ‘글은 쓰고 싶은데 그래서 이제 뭐 씀?’ 상태일 때는 피해야 한다.

       

       나는 일기를 쓰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펜에 묻은 잉크가 반쯤 마를 때까지 멍하니 고민한 결과.

       

       “앗!”

       

       문득 떠올랐다. 가장 최근에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어디서 했는지 말이다.

       

       홉 고블린 부락. 살아남은 남녀 모험가 둘.

       

       오랜 소꿉친구이자 연인을 모험가 일에 끌어들인 주제에 정작 목숨이 위험하자 살기 위해 그를 버린 여자.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잘 풀려 구출 받았을 뿐인데, 연인이 약속대로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해준 줄 아는 미련한 남자.

       

       감금당하며 발목이 잘린 탓에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야 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죄를 직면해야 하는 심정이란 어떠한가.

       

       사실 그 고통과 죄책감. 그리고 연민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피어날 후회, 피폐, 집착뿐.

       

       누군가의 불행을 유희거리로 소모하는 일에 거부감이 없지는 않지만…애초에 내가 살려준 목숨이잖아?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좋아. 이걸로 간다.”

       

       메마른 펜에 잉크를 듬뿍 묻히고 그대로 떠오르는 첫 문장을 종이 위에 휘갈겼다.

       

       서걱서걱.

       

       -세워. 너 같은 다리 병신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잖아.

       

       명작의 예감이 들었다.

       

       ***

       

       엿됐다.

       

       엘리는 손님에게 팔아야 할 고오급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왁자지껄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알코올로 반쯤 맛이 간 뇌세포로 3초 정도 고민한 끝에 재차 확신했다.

       

       엿됐다.

       

       “역시 다 들켰겠지?”

       

       사랑이 있고, 불법이 아니라면 어떠한 형태의 성애도 인정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향 존중의 의미일 뿐.

       

       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뒹구는 모습에 흥분하신다고요? 정말 교양 넘치는 취향이시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제가 당신의 남편을 따먹어도 될까요?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분명 요나도 마찬가지이리라! 엘리 자신에게 확 깼지만, 차마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한나절 넘게 방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안 나오는 것도 그래서가 확실하다…!

       

       …요나가 지금껏 다른 여자도 꼬실 거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을, 그러니 NTR취향에 눈을 뜬 엘리를 오히려 좋아하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까먹은 엘리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솔 아다 찐따 엘리엘리는 자신의 처녀막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

       

       경험은 없지만 얕보이고 싶지는 않은 그런 복잡한 심리가 자꾸만 안 좋은 상상을 부추긴 탓이다.

       

       자신이 완전히 NTR 좋아하는 자위 중독자로 찍혔을 거라며 오들오들 떠는 것도 잠시.

       

       엘리가 선택한 것은 결국 정공법이었다.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싹싹 빈다…!”

       

       실로 엘리다운 발상. 각오를 다진 엘리는 마시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알딸딸한 상태로 업무에 집중했다.

       

       점심은 걸러도 저녁은 먹으러 오겠지. 한창 많이 먹을 때의 소년 아닌가.

       

       오늘은 바질 소스 왕창 들어간 파스타를 만들어 볼까? 아니면 고기란 고기는 일단 전부 튀겨서 새콤달콤한 소스와 함께 내놔볼까.

       

       어느 쪽이건 요나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이니 분명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엘리가 몇몇 재료를 미리 빼두며 요나를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깊은 새벽이 되어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엘리는 하염없이 기다렸고, 요나는 내려오지 않았다.

       

       “아, 안 돼….”

       

       초조함과 불안에 휩싸인 엘리가 평소라면 생각조차 못 했을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게 된 이상…문을 따고 들어간다.”

       

       물론 맨정신으로 할 수는 없었기에 독한 술 한 병을 원샷 때렸지만.

       

       그렇게 알콜이라는 이름의 용기를 얻은 용자가 요나의 방으로 향했다.

       

       끼이익-

       

       기껏 챙겨온 마스터키가 무색하게도 그냥 열리는 문. 애초부터 잠겨있지 않은 것이다.

       

       맥이 탁 풀린 엘리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선 방.

       

       그곳에 있는 것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요나와, 고이 끌어안은 종이 다발이 있었다.

       

       “이건…일기인가?”

       

       단순한 호기심. 가벼운 마음으로 들여다본 종이. 그 위에 새겨진 까만 활자를 읽는 순간 엘리는 술에서 확 깼다.

       

       “…….”

       

       그도 그럴 것이 종이에 적힌 내용은 어쩐지 엘리와 요나의 이야기를 닮아있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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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EP.86





       “엘리! 좋은 아침….”


       


       “어, 어! 잘 잤어? 좋은 아침이네. 날씨도 좋고. 응.”


       


       항상 잘 관리되어 있던 털과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어있고, 다크서클은 그런 화장인가 싶을 정도로 짙게 드리웠으며, 초점을 잡지 못해 멍한 눈빛으로 횡설수설하는 엘리. 


       


       누가 봐도 제대로 못 잔 사람이다. 혼자 새로운 아침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새벽을 맞이한 얼굴 아닌가.


       


       “…혹시 밤 샜어요?”


       


       “아닌데?!”


       


       그냥 물어봤을 뿐인데 펄쩍 뛰며 부정하는 엘리. 그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밤새 어제 본 거 생각하면서 딸 치셨나요….”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아침부터 그런 말을 하면…흐읏! 어떻게 하니!”


       


       “…….”


       


       내가 조금 야한 말만해도 느끼는 여자라니. 최고잖아! …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실제로 직접 보니 조금 몬가몬가네. 만약 밤의 침대 위에서 저랬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른 아침의 복도 아닌가.


       


       “아.”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는 무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상식인이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약간의 현자타임이 오기도 했다.


       


       상식적인 인간이 되어 간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그, 왜. 글쟁이에 관한 이야기로 유명한 것들이 몇 가지 있잖은가.


       


       창작은 고통의 연속이니 계속해서 고통을 주면 글을 쓸 수 있다거나.


       


       작가는 어느 정도의 정신병이 있어야 하니, 모든 작가는 정신병자라거나.


       


       논리의 비약이 심한 폭론이긴 하지만, 조심스럽게…아주 조심스럽게 일정 부분 동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의 나는 너무 배가 불렀다.


       


       배가 불러도 상관없긴 하지만, 아직도 아공간에 잠든 팬티라거나 지금의 엘리를 보면 위기감이 느껴진달까….


       


       웃기는 소리지만, 나는 내가 상식적인 인간이 될까봐 두려웠다.


       


       내가 만든 이 세계를 내 손길이 들어간 작품이 아닌, 평범한 세상으로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


       


       몬스터의 디테일한 구현에 감탄하지 않고, 모험가들의 음담패설에 키득이지 않으며,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이능에 감동받지 않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이런저런 힘겨움이 따라붙긴 하지만, 판 대륙은 내게 최고의 선물이나 다름없다.


       


       헌데, 그 선물에 질려버린다니.


       


       “…이대로는 안 되겠네요.”


       


       “어? 그으, 요나야? 갑자기 왜 그러는….”


       


       혼자 중얼거리던 엘리가 무엇을 착각한 건지 불안해하기 시작했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리리라.


       


       생각을 굳혔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겠지.


       


       “엘리.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아, 아냐! 방금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오들오들 떠는 엘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주었다.


       


       “너무 많이 하면 뼈 삭으니까 적당히 하세요. 그럼 이만.”


       


       마지막으로 엄지를 척! 올려주자, 멍한 표정 그대로 주저앉는 엘리.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우다다 계단을 내려갔다.


       


       컴퓨터가 없는 세상에서 글을 쓰려면 필요한 것들이 있었으니까.


       


       요정과 은화를 박차고 나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지갑이었다.


       


       “3실버인가.”


       


       어제 가챠를 돌린 탓에 수중에 남은 돈이 고작 이것뿐이다.


       


       아니, 이걸 고작이라고는 할 수 없지. 가챠 때문에 슬슬 금전 감각이 맛이 가는 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3실버가 적은 돈은 아니니까.


       


       아껴 쓰면 일주일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적어도 종이와 펜을 사기에는 충분하겠지.


       


       적당한 잡화점에서 펜과 잉크. 그리고 싸구려 종이 한 다발을 사서 요정과 은화로 돌아왔다.


       


       어째서인지 엘리가 아침부터 술을 퍼마시며 궁상떨고 있었지만, 엘리가 가진 능력에 비해 찌질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은가.


       


       적당히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대로 내 방에 틀어박혔다.


       


       “쓰읍…그래서 이제 뭐 씀?”


       


       그동안 다시 한번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모험가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본업은 언제나 작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었던 거고, 아마 그렇기에 사랑의 여신이 나를 불러온 거겠지만.


       


       다만, 정작 이렇게 각 잡고 펜을 잡자 머리속이 멍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녀역전 세계라고 생각하니까 쓸 수 있는 게 너무 적은데….”


       


       내 근본은 야설이다. 그리고 사랑의 여신 덕분에 이 세계에서 야설은 메이저한 장르고.


       


       잘 쓴 야설은 신전이 거금을 들여 저작권을 사들인다고 하니 말 다 했지.


       


       엘리의 방에서 몰래 몇 개 읽어봤는데, 확실히 재밌는 것들이 많았다.


       


       문제는 전부 남역 버전이라 내게는 버거운 장면이 조금 있었다는 점이지만.


       


       “새로운 간수장이 된 젊은 남자가, 사악한 여자 죄수들에게 돌려 먹히며 타락하는 내용이라니.”


       


       엘리의 취향이 참으로 의심스러운 순간이었다.


       


       뭐어. 큰 틀만 놓고 보면 성적 타락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인기 있는 소재긴 했다. 디테일한 부분이 조오금 그랬지만.


       


       문제는 이게 판 그레이브의 평균적인 취향이라는 말이다.


       


       항상 쓰던 대로 썼다가는 펨돔…아니, 멜돔 소리를 들으며 소수를 위한 마이너 취향 글이 되겠지.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처럼 ‘글은 쓰고 싶은데 그래서 이제 뭐 씀?’ 상태일 때는 피해야 한다.


       


       나는 일기를 쓰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려는 것이니까.


       


       그렇게 펜에 묻은 잉크가 반쯤 마를 때까지 멍하니 고민한 결과.


       


       “앗!”


       


       문득 떠올랐다. 가장 최근에 글 쓰고 싶다는 생각을 어디서 했는지 말이다.


       


       홉 고블린 부락. 살아남은 남녀 모험가 둘.


       


       오랜 소꿉친구이자 연인을 모험가 일에 끌어들인 주제에 정작 목숨이 위험하자 살기 위해 그를 버린 여자.


       


       어쩌다 보니 운 좋게 잘 풀려 구출 받았을 뿐인데, 연인이 약속대로 목숨 걸고 자신을 구해준 줄 아는 미련한 남자.


       


       감금당하며 발목이 잘린 탓에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야 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누구도 모르는 자신의 죄를 직면해야 하는 심정이란 어떠한가.


       


       사실 그 고통과 죄책감. 그리고 연민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피어날 후회, 피폐, 집착뿐.


       


       누군가의 불행을 유희거리로 소모하는 일에 거부감이 없지는 않지만…애초에 내가 살려준 목숨이잖아?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좋아. 이걸로 간다.”


       


       메마른 펜에 잉크를 듬뿍 묻히고 그대로 떠오르는 첫 문장을 종이 위에 휘갈겼다.


       


       서걱서걱.


       


       -세워. 너 같은 다리 병신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잖아.


       


       명작의 예감이 들었다.


       


       ***


       


       엿됐다.


       


       엘리는 손님에게 팔아야 할 고오급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왁자지껄한 가게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알코올로 반쯤 맛이 간 뇌세포로 3초 정도 고민한 끝에 재차 확신했다.


       


       엿됐다.


       


       “역시 다 들켰겠지?”


       


       사랑이 있고, 불법이 아니라면 어떠한 형태의 성애도 인정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취향 존중의 의미일 뿐.


       


       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랑 뒹구는 모습에 흥분하신다고요? 정말 교양 넘치는 취향이시네요! 혹시 괜찮으시면 다음에 제가 당신의 남편을 따먹어도 될까요?


       


       같은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분명 요나도 마찬가지이리라! 엘리 자신에게 확 깼지만, 차마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간 것이다! 한나절 넘게 방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안 나오는 것도 그래서가 확실하다…!


       


       …요나가 지금껏 다른 여자도 꼬실 거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는 것을, 그러니 NTR취향에 눈을 뜬 엘리를 오히려 좋아하리라는 사실을 완전히 까먹은 엘리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솔 아다 찐따 엘리엘리는 자신의 처녀막에 약간의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


       


       경험은 없지만 얕보이고 싶지는 않은 그런 복잡한 심리가 자꾸만 안 좋은 상상을 부추긴 탓이다.


       


       자신이 완전히 NTR 좋아하는 자위 중독자로 찍혔을 거라며 오들오들 떠는 것도 잠시.


       


       엘리가 선택한 것은 결국 정공법이었다.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싹싹 빈다…!”


       


       실로 엘리다운 발상. 각오를 다진 엘리는 마시던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알딸딸한 상태로 업무에 집중했다.


       


       점심은 걸러도 저녁은 먹으러 오겠지. 한창 많이 먹을 때의 소년 아닌가.


       


       오늘은 바질 소스 왕창 들어간 파스타를 만들어 볼까? 아니면 고기란 고기는 일단 전부 튀겨서 새콤달콤한 소스와 함께 내놔볼까.


       


       어느 쪽이건 요나가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이니 분명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엘리가 몇몇 재료를 미리 빼두며 요나를 기다렸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깊은 새벽이 되어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엘리는 하염없이 기다렸고, 요나는 내려오지 않았다.


       


       “아, 안 돼….”


       


       초조함과 불안에 휩싸인 엘리가 평소라면 생각조차 못 했을 결론에 다다랐다.


       


       “이렇게 된 이상…문을 따고 들어간다.”


       


       물론 맨정신으로 할 수는 없었기에 독한 술 한 병을 원샷 때렸지만.


       


       그렇게 알콜이라는 이름의 용기를 얻은 용자가 요나의 방으로 향했다.


       


       끼이익-


       


       기껏 챙겨온 마스터키가 무색하게도 그냥 열리는 문. 애초부터 잠겨있지 않은 것이다.


       


       맥이 탁 풀린 엘리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들어선 방.


       


       그곳에 있는 것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잠든 요나와, 고이 끌어안은 종이 다발이 있었다.


       


       “이건…일기인가?”


       


       단순한 호기심. 가벼운 마음으로 들여다본 종이. 그 위에 새겨진 까만 활자를 읽는 순간 엘리는 술에서 확 깼다.


       


       “…….”


       


       그도 그럴 것이 종이에 적힌 내용은 어쩐지 엘리와 요나의 이야기를 닮아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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