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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소희가 우리 반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에 자극받은 것일까? 하늘이의 행동도 훨씬 거침이 없었다.

        

       신체 접촉 같은 건 오히려 전보다 조금 줄어든 기분이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주변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주변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된 것 같다.

        

       예를 들어, 소희가 주변 애들한테 말 걸겠다고 책상을 탕탕 두드리고 흔들었다면, 하늘이는 내 앞에 서거나 앉겠다고 아이들 의자를 빼앗아 앉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내 앞자리에 누가 앉아있건 말건, 의자와 책상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비집고 들어가 의자에 앉아있던 아이가 불만 섞인 소리를 내게 만들거나, 자리에 앉아있지 않은 틈을 타서 의자를 빼앗아 앉거나.

        

       물론 그 자존심 높은 화영 고등학교 학생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 혹은 완전히 내 밑의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 소희는 당연히 투명 인간 취급하겠지만, 일단 하늘이는 그냥 나와 엄청 친한 인물일 뿐이었으니까. 굳이 상대할 이유를 못 느낀다는 분위기였을 뿐이지, 하늘이가 없는 인간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당연히—

        

       “야.”

        

       자신의 의자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는 하늘이를 보고,

        

       “여기는 내 자리야.”

        

       그렇게 화를 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하늘이도 대체 뭐에 짜증이 난 건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되물으며 말한 아이를 올려다보는 하늘이의 눈에는 하이라이트가 없었다.

        

       ……어, 짜증 났다기보다는 화났다는 것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설마 진짜로 내가 공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이렇게 화가 난 걸까?

        

       “뭐, 뭐?”

        

       평소에 이런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는지, 그 자리의 원래 주인은 하늘이의 싸늘한 반응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 학교는 돈으로 모든 것이 정해진다. 그런 규칙이 명확하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돈이 더 적은 아이들은 돈이 더 많은 아이에게 함부로 대들지 못한다. 학교 안에서 한 번 찍히면 졸업 후에도 꾸준히 그 이미지가 남으니까.

        

       어른이 된 이후에 실제로 일하게 되었을 때, 돈이 많은 쪽은 돈이 적은 쪽을 잘라내면서 딱히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몇 명 잘라낸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아래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그런 의미에서 기회의 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름망이기도 했다. 미리 줄을 서고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도 있지만, 사소한 실수로도 관계가 충분히 어그러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이는 먹이사슬로 치면 최하위였다. 성적이 좋아 봐야 결국 돈이 없으면 그냥 고용되는 처지일 뿐이다. 지난번에 윤다호가 하늘이에게 했던 말처럼, 원래대로라면 하늘이는 주변 아이들에게 최대한 싹싹하게 굴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좋은 대학교에 가서 여기서 생긴 연줄로 취업을 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말이지.

        

       뭐, 아무리 그래도 미연시 주인공이니 윤다호 같은 애와 사귀기 시작하면 아무도 함부로 깔볼 수 없게 되겠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그건 일어나지 않을 일 같으니 일단은 굳이 생각하지는 말도록 하자. 그런 놈이랑 하늘이가 사귄다는 생각만 해도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내가 사라랑 대화 좀 하겠다잖아. 잠시 자리 좀 양보해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정 앉고 싶으면 내 자리에 앉아있어도 돼.”

        

       당당하게 내 이름을 꺼낸다. 그럼 상대에게는 할만한 반응이 딱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내가 있는 곳에 아무도 없다는 듯 굴면서 무슨 소리를 하냐고 되묻는 것.

        

       그런데, 그건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 ‘없는 존재’가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직접 올려다보고 있었으니까. 한 해에 조 단위의 돈을 벌어들이고, 십수억 정도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메이드에게 수억 원씩의 돈을 쾌척하는 재벌 그 자체가.

        

       게다가 그 옆자리에는 한눈에 봐도 튀는 모습의 메이드가 앉아있었다. 지금은 메이드 복장은 아니긴 했지만.

        

       키도 크고, 인상도 날카롭고, 왠지 그렇고 그런 쪽으로 잘 놀 것 같아 보이고, 나에게 일 년에 수억 원씩 받고 일하는 메이드.

        

       그런 메이드도, 똑같이 그 아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협박이었다.

        

       “……뭐래.”

        

       결국, 그 아이는 눈을 파르르 떨더니, 교실 반대편에 앉아있는 자기 친구…… 아마 친구 맞겠지? 아무튼 그쪽으로 도망가듯이 자리를 옮겼다.

        

       “조금 너무한 거 아니야?”

        

       아니, 뭐. 원래 예사라가 당하고 살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그랬다. 교실에 있는 모두가 우리를 보고 쉬쉬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함부로 말을 걸면 안되고, 혹시라도 멋대로 말을 거슬렀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아침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우리 세 명에 대한 분위기는 그렇게 굳어져 버린 모양이었다.

        

       이거 완전히 악역 영애가 다 되어버렸네.

        

       처음에는 분명 악역 영애가 되는 길만큼은 피하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누가 누구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지금까지 당했던 걸 생각하면 이건 별것도 아니잖아.”

        

       하늘이가 아주 이성적인 말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들었는지, 우리 주변의 자리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내가 복수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하나하나를 모두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넘쳐흐르는데 그런 거 다 신경 쓰면 너무 피곤하다.

        

       ……만약 원래의 예사라가 돌아와서 좀 날뛰고 싶어 한다면 도와주기야 하겠지만.

        

       그때는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나는 나를 마주 보고 앉은 하늘이를 보았다.

        

       만약 진짜 예사라가 돌아오면, 이 아이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원작의 그 표독한 악역영애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예사라가 평범하고 행복한 일주일을 느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뭐, 그건 그때 가면 알겠지.

        

       “그럼, 공부 시작하자.”

        

       주변 상황이 나름대로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하늘이가 말했다.

        

       나는 다시 길게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쉬는 시간까지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

        

       “…….”

        

       “어, 미, 미안…….”

        

       나름대로 열심히 하늘이의 말을 받아적었는데, 하늘이의 반응이 신통치가 않아서 얼른 사과부터 했다. 그렇다. 10년 전에 배운 내용은 나에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때도 공부를 열심히 한 편이 아니었고, 당연히 대학생 때 고등학교 시절 수학을 다시 들여다보지도 않았으니까.

        

       하늘이가 말해주는 내용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연히, 나는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보통 이렇게 다시 회귀하면 전생의 기억으로 성적 좀 잘 나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래도 나는 그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어, 아니, 아니야.”

        

       내 노트를 노려보고 있던 하늘이가, 나의 말을 듣고 나서 손을 내저었다. 내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보고 진심으로 당황한 듯, 조금 급해 보이는 몸동작이었다.

        

       “뭐든지 노력하려는 자세가 중요하지. 결과는 그냥 따라오는 거고.”

        

       안타깝지만 노력하는 자세가 있더라도 결과가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예체능이나, 그쪽 머리가 분명하게 필요한 수학 같은 것이 특히 그랬다. 수식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대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야 수학 공식을 쓰는 것이 즐거운지 모르겠다.

        

       뭐 하늘이는 그런 성격은 아니겠지만. 원작에서도 딱히 좋아서 공부한다기 보다는 그냥 성실해서 계속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선택지에 따라 안 할 수도 있었고.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아, 이건 일단 접어두고, 다음 쉬는 시간에 이어서 하자.”

        

       “이어서 하는 거야……?”

        

       “그야 당연하지.”

        

       나의 물음에, 하늘이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직 공부가 안 끝났잖아. 그래도 아직 초반이라 다행이야. 며칠 정도 방과 후에 시간 잡고 공부하면 간신히 따라잡을 정도는 되니까.”

        

       아니, 나는 바로 조금 전에 한 공부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는데……?

        

       “괜찮아! 걱정하지 마! 원래 공부라는 건 계속 반복해서 하면 머릿속에 남는 법이니까!”

        

       그러니까, 내 머리 안에 뭐라도 남을 때까지 꾸준히 공부시키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하늘이의 시선은 내 옆에 앉아있는 소희에게로 향했다.

        

       “…….”

        

       소희는 슬쩍 시선을 돌렸지만,

        

       “너도 마찬가지야. 노트에 아무것도 안 적혀 있잖아.”

        

       하늘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그리고, 너는 더 잘 알아야지. 사라가 모르면 옆에서 가르쳐줘야 할 거 아니야?”

        

       “큭…….”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은데.

        

       하늘이에 이어서—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소희까지 나를 가르치겠다고 들면, 그야말로 ‘정말로’ 학교에 다시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학교 밖에서야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어도, 막상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시험 같은 것을 보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토나오는 일이다.

        

       하지만 의지가 가득한 하늘이의 눈을 보면, 아무래도 그건 나의 정해진 미래인 듯하다.

        

       ……하긴, 내가 지금 학교에 와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아마 앞으로 무슨 대단한 일이 일어나 내가 내 몸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다면, 졸업할 때까지는 계속 학교에 다녀야 할 거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수업이 시작된 후에도, 유하늘은 영 수업에 집중하질 못했다.

        

       바로 조금 전에 수업을 집중해서 들어라, 반복해서 복습해라,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정작 유하늘 자신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아까 사라의 노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노트에 쓰인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따지자면 내용 때문이 맞긴 할지도. 어쨌거나 사라가 써둔 그 내용을 보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거니까.

        

       말을 못 알아들어서, 공부를 건성으로 해서 속이 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거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었다.

        

       유하늘이 진짜로 신경 쓰이는 이유는—

        

       예사라가 써둔, 노트의 그 글씨 때문이었다.

        

       그래, ‘글씨 그 자체’.

        

       최대한 빠르게 쓰고 그만두고 싶은 듯 마구 날려쓴, 날카로운 그 글씨체는,

        

       적어도 유하늘이 기억하는 ‘사라’의 글씨체와는 모양이 많이 달랐다.

        

       그래. 양혜인이 보여준, 그 유서에 쓰인 글씨체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였다.

        

       ……아무리 날려쓴다고 하더라도, 분위기가 저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아니면 설마.

        

       유하늘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다. 속단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만약 사라가 아닌 누군가가 그 유서를 작성했다면, 그리고 그걸 친구인 유하늘, 이수아, 신소희에게 보여줄 생각을 했다면.

        

       ……최대한 빠르게, 그 유서를 다시 한번 확인해봐야겠다고, 유하늘은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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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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