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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6

        

         탕… 탕….

         

         바닥을 차는 소리에마저 초조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반개한 눈으로 수술실…이 아니라, 매장 내부 조립실을 훑다가 조립 라인에 매달린 채로 멀뚱멀뚱 이 편을 바라보는 제로와 시선이 마주쳤길래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지 몸을 헤집는데 자체 마취-절전 모드-라도 할 것이지 저렇게 말똥거리기는.

         

         세상에 자식이 아프다는데 병원비를 아끼는 부모는 없다.

         설령 의사로부터 감당 못할 지출이 예고되었다한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판단하고 일단 치료를 우선시하겠지.

         

         하지만… 그…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기계 수리는.

         그것도 부품 변경이나 업그레이드가 자유로운 로봇 수리는 전자제품 구입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아주 골치가 아팠다.

         

         “…….”

         

         “마음이 바뀌셨다면 지금이라도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아뇨, 사양할게요.”

         

         이걸 고치느니 차라리 새 걸 다는 게 낫다. 이왕 신품으로 바꿀 거라면 조금 더 써서 상위 모델을 쓰는 것도 괜찮다.

         다른 부위가 균형이 안 맞게 여기만 고치지 말고, 아예 전체 구성을 비슷한 규격으로 통일하는 게 성능 증진에도 유리하다.

         케어봇 한 대로 부족하시다면 이 참에 본격적인 전투용 드로이드도 살펴보시는 게 어떠냐.

         

         그런 염병할 감언이설을 일삼던 철가면 매니저를 노려봤지만, 서비스직 종사자 특유의 능청스러운 멘트만 돌아왔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애당초, 나는 그냥 파손된 손과 작살난 장갑 부분만 깔끔하게 고쳐 달라고 부탁했는데 이게 무슨 정신나간 영업 세례인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도 가장 악질인 점은 한 번도 구체적인 액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이 동네는 무슨 서비스 비용에 대한 고지 의무 같은 것도 없나 보다. ……망할.

         

         여기는 그를 샀던 엑사테크 매장.

         

         그래도 얼마 전에 제로를 납품 받았던 가게라고. 쥐꼬리만 한 상호신뢰와… 확실하게 맞는 예비부품을 보유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재방문한 건데, 아쉽지만 딱 반쪽짜리 정답이었을지도.

         

         덜컹!

         짤깍, 짤깍…!

         

         “어때?”

         

         바닥에 내려선 제로가 교체된 손가락을 요란하게 움직였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잘만 활개쳤으면서 막상 허전한 건 본인이 제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 동기화 및 출력 전달, 모두 이상 없습니다. 언제든지 출격 가능합니다. –

         

         “출격은 무슨 그냥 출발이지! 니가 무슨 공격용 전투 헬기야?”

         

         호전적인 단어 선택도 정정할 겸 작은 핀잔을 주었다.

         

         – 상시 동행하기 어려운 몸체라도 만약 원하신다면 빠르게 적응해보겠습니다. –

         

         “내가 말을 말지.”

         

         ……핀잔은커녕 시답잖은 농담으로도 안 들어준 것 같지만 상관없다. 본인이 다시 쌩쌩해졌다면 만사 오케이니까.

         

         그러니 마지막으로 정리해보자.

         

         날씨는 조금 쌀쌀하지만 여행을 떠나기엔 딱 좋게 쾌청하다.

         따로 밀린 일이나 숙제도, 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원한 관계는 당연히 없고.

         어젯밤의 대강하로 인해 담이 걸렸던 목덜미도 덕지덕지 붙인 파스가 열일해서 괜찮아진 데다가.

         제로 녀석이 다소 험하게 다루긴 했지만, 잃어버린 물건 없이 짐도 완벽하게 챙겼다.

         

         그래서… 남은 골칫거리가 뭐냐?

         

         고개를 돌려.

         이른 시간부터 수리 공정과 반 강제적인 제품 상담, 그리고 단골…? 고객을 위한 음료와 간식거리까지 아낌없이 손수 제공해준 엑사테크 소속 매니저 씨를 마주했다.

         

         “…저희 매장에서 헬기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만, 침투용 드론이라도 보여드릴까요?”

         

         “장난은 됐고, 그래서 총 얼마가 나온거에요?”

         

         이제 정말 빼도박도 못하게 됐으니까, 청구서를 좀 일목요연하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물건 살 때는 선결제 방식을 도입해 놨으면서. 이미 손님 명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에게는 쓸데없이 관대함을 보여서 오히려 곤란했다.

         

         당연히 돈이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한 모양인데 생각보다 내 지갑 사정은 많이 빡빡하다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구질구질한 협상이 필요할 수도 있었….

         

         “어디… 극세 관절형 핑거 파츠에 124만, 파열된 내부 회로 기판에 39만, 바꿔 달은 복합 장갑이 105만 어치에… 깎인 표면에 대한 재도금 처리 대금 23만까지. 도합 291만 크레딧 되겠습니다!”  

         

         “……콜록.”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려는 음료를 태연한 척 닦아냈다.

         이거 얻어먹은 다과도 뱉어 내야겠는 걸…?

         

         “그럼 고객님?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시발. 왜 그 용병 친구들이 나보고 부르주아니 뭐니 하며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는지 알겠다.

         일반적인 생필품이나 약품, 탄약 지출과는 궤를 달리하는 지출에 거의 다 나았던 근육 경련이 다시 올 것 같았다.

         

         대체 화약 냄새 풍기는 전장에서 본격적으로 구르기 시작하면 얼마나 더… 어우, 생각하지도 말자.  

         

         소비자 과실 비율을 감안하더라도 어떻게 소급 적용받을 수 있는 AS(After Service)는 없나?

         …여기 기준으로는 그냥 CS(Customer Service)던가, 하여튼.

         

         불편한 내 기색을 눈치챈 매니저가 잊은 게 있다는 듯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아! 깜빡할 뻔했군요. 엑사테크에서도 연말 특가 정책이 시행 중이라 0.4% 할인율을 적용하면 2,898,360 크레딧이 정확한 요금입니다.”

         

         “그것 참 눈물 나게 고맙네….”

         

         천장을 슬쩍 올려다본다.

         구체적으로는 천장이 아니라 더 위쪽에 있는 경치 좋은 고층 사무실에 있을 누군가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내 소심한 반항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으니….

         

         “저기… 일시불 말고, 다른 방식으로 결제할게요.”

         

         “내규상 가능한 처리 방식이 많이 없습니다만… 어떤 걸 원하시는지?”

         

         그나마 내 지불 능력에 의문을 품은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게 바싹바싹 마르는 입안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는데 정말 이래도 되나? 이렇게 질러 놓고 퇴짜맞으면 어떻게 하지?

         

         ……에이씨, 저쪽도 오밤중에 전화해서 이래라저래라 했는데, 설마 전략적 동반자에게 출장비도 안 쥐어 줄라고.

         

         “파라다이스 코퍼레이션 메인 타워 48층, 전략기획부서실 아론 드레이퓨스 앞으로 전액 달아주세요.”

         

         “…….”

         

         이런 걸 두고 상공업 용어로는 뭐라 하더라… 지급 어음? 외상 매입?

         맞는 표현이 어느 쪽인지는 잘 몰라도, 가면 속 매니저 씨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는 건 알겠다.  

         

         역시 염치가 너무 없었다.

         현물(금전, 크레딧 이외의 물품)로 대금을 치르는 것도 눈살 찌푸려지는 행위일진대 무책임한 구두 약속이라니.

         

         그냥 얌전히 빚을 지고, 채무 이행을 약조한 후 나중에 차액을 송금하는 게 낫겠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라다이스 측과 교차 검증 끝났습니다 고객님. 오늘 저희 매장을 이용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어.”

         

         정중한. 무도회장에서나 볼 법한 과장된 신사의 인사가 훅 치고 들어왔다.

         고 잠깐 사이, 아마 기업명이 나온 순간부터 다방면으로 연락을 시도해서 성공한 걸까? 무섭다 무서워 기업 간 커넥션, 수면 아래에서는 얼마나 서로 피 터지는 신경전을 벌이는 건지.

         

         물론 인맥으로 돈 계산을 마치려는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억 단위 크레딧도 푼돈이라 거들먹거리는 재력가님이 인심 써 주셔서 이번엔 살았다.

         

         그럼 이제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점심이나 먹고 기차역으로 떠나야…… 떠나야….

         

         “…제로? 혹시 가지고 싶다던 장난감… 크흠, 미안. 부품 리스트 따로 정리해둔 거 있어?”

         

         내가 무슨 억대 횡령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 300만이나 400만이나 아론에게는 비슷한 숫자 아니냐고 하면 지나친 비약인가?

         원래 회식도 법인 카드로 하는 게 제일 흥겹다고, 기회가 왔을 때 올라타는 것도 처세술의 일부라고 주장-변명-하겠다.

         

         

         

         ★ ☆ ★ ☆ ★

         

         

         

         “미스터 드레이퓨스, 총무부에서 엑사테크에 유용될 공금이 있었냐는 질문이….”

         “배정된 적 없는 예산안이 존재했나요?!”

         

         “그것에 관련된 기록은 지워 버리시죠. 저쪽에서도 명확히 지정하지 않았습니까? 48층의 아론 드레이퓨스라고. 이건 기업 간 거래가 아닌 제 개인적인 지출에 불과하니. 그렇게 전하면 와이즈맨도 군말 않고 닥칠 겁니다.”

         

         비스듬하게 꼬아진 다리가 까딱거린다.

         

         동시다발적으로, 사내 부처 여기저기서 쏟아진 질문들을 아론은 단숨에 치워버렸다.

         

         값비싼 안드로이드를 운용하는 장점 중 하나다.

         널리 퍼져서 좋을 게 없는 얘기도 먼저 캐치하고 대응할 수 있고, 부처에 대한 장악력도 드높일 수 있으니까.

         

         덧붙여서… 긴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사무실에 굳이 다른 직원들을 들일 필요도 없었고.

         

         지이잉….

         

         마치 영화 상영관처럼, 유리창에 펼쳐졌던 데이터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고 이내 정리된다.

         

         최근 파라다이스의 속내를 떠보는 경향이 강해진 에나마와의 분쟁, 과한 네트워크 부하를 핑계로 자금 유치를 요청하는 엘리시움, 위성 사용료를 재협상하자는 엑사테크 등 온갖 숨막히는 과업들이 전부 구석으로 처박힌다.

         

         대신 그 공간을 메꾼 건 한낱 로봇 매장의 영수증.

         24시간이 전부 업무 시간이나 마찬가지인 아론이기에 용서되는 일탈이었다.

         

         “흐음…….”

         

         매장에서 적용한 할인을 역산해보면 총 1462만 크레딧의 결제액.

         그 미묘한 숫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애타게 흔들렸다.

         

         엄밀히 따져보자면 이건 아나스타샤 발렌타인이 계약 이후 처음으로 시도한 연락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뭔가 뜻하는 바가 있을 터인데… 그녀에 비하면 불민한 그로서는 단번에 밝혀내기 어려웠다.

         

         사내에 있는 암호 해독 전문가라도 불러야 하나?

         하지만 타인에게 이 메시지를 넘겨주는 것도, 이거 하나 해결 못해서 손을 벌리는 것도 아론은 탐탁치 않았다.

         

         “…오호라?”

         

         그래도 전략적 동반자를 지나치게 괴롭힐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수줍은 방식으로 답안지가 적혀 있었으니까.

         

         영수증의 세부 내역, 수리 및 교체 사안을 확인한 정치가이자 모략가의 머리가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로봇의 잘린 손가락 두 개, 이건 아마 파라다이스의 이인자 자리를 굳히겠다고 선언한 자신을 뜻하는 상징.

         

         표준 이상으로 보강된 통신 부품과 메모리, 자신이 네오 헤이븐으로 떠나더라도 연락과 계약을 소홀히 하지말라는 충고인가?

         

         무엇보다 머리와 목 바로 옆 어깨에 난 자상은….

         

         꿀꺽.

         

         흥분, 기대, 환희. 몰아치는 다양한 감정들이 결정으로 변해 아론의 눈동자와 더 깊은 곳에 깃든다.

         

         “…회장님께서도 알아서 결판 지으라며 방관하시던 이 개미지옥을, 기어이 끝내라고 제 등을 떠미시는군요.”

         

         급소를 피해서 쳐라. 썩은 부위를 도려내라.

         당하기 전에 앞서서 나서라.

         

         장기간 교착 상태에 머물렀던 권력 구도를 정리할 피바람이 몰아쳐야겠다는 결심이 방금 섰다.

         다들 순순히 협조해준다면…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서열이 확실히 정해질 뿐.

         

         게다가 당장에야 불어 닥칠 내홍으로 인해 흔들리고 약해지겠지만 폭풍이 지나간 후에 파라다이스는 더 견고한 거목으로 자라나리라.

         

         그리고 아론 드레이퓨스는, 한층 더 그녀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거듭날 것이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 공짜다, 공짜!
    아론의 무시무시한 곡해 능력과 아나스타샤는 무관합니다. 아마도.

    또 엄청나게 지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연재시간 공지가 무색할 수준의 상습범이지만 나름 일일연재를 지켜보려고 분투 중이라는 것만 기억해주신다면…!

    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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