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7

    붉은 달을 처치한 뒤,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황금 사신 정원을 현실에 소환하는 능력.

    일대를 전부 뒤덮어 버릴 수도 있고, 정원에 있는 일부만 떼어올 수도 있는 응용하기 좋은 능력이었다.

    열화 버전인 것을 생각할 때, 꽤 괜찮은 능력이었다.

    정원에 있는 것들은 황금 사신들의 꿈과 희망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산물인데, 그걸 물질화해서 가져올 수 있다니!

    아마 황금 사신이가 실용적인 상상을 하기 시작하면, 더욱 좋은 능력이 될 것으로 보였다.

    뭐, 지금은 언제 어디서든 과자를 꺼내 먹을 수 있는 능력이지만 말이다.

    나는 정원에서 빵 하나를 소환해서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옴뇸뇸.

    뭐, 무인도로 표류해도 굶을 일은 없겠네.

    심심하니까, 새로 얻은 능력 테스트나 해봐야겠어.

    ***

    늦은 오후, 세희 연구소 뒤뜰.

    회색 사신이와 나는 돗자리 위에 누워서 피크닉을 즐기고 있었다.

    옴뇸뇸. 

    사신이는 소라빵을 집어 들고는 작게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어먹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빵을 집어 먹는 사신이.

    하지만 다람쥐처럼 빵빵해진 채, 먹느라 쉬지 않고 움직이는 볼을 보면 맛있게 먹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연구소에서 즐기는 평범한 피크닉 타임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나무 위에 열린 소라빵. 

    강물처럼 흐르는 핫초코. 

    구름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시멜로.

    마치 동화와도 같은 풍경이 연구소 뒤뜰에 펼쳐져 있었다.

    오늘 피크닉은 세희 언니도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세희 언니는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쁜지 소장실에서 뭔가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동화와 같은 휴식은 좀처럼 없는 일인데, 언니가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회색 사신은 현실을 침식해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냈는데, 이런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력을 선보이는 사신이를 보면서 한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저번에도 갑자기 능력을 선보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세희 언니가 납치됐을 때였나? 

    세희 언니를 구해온 뒤에 갑자기 매력적인 향기가 나기 시작했었지.

    도봉구 때도 미니 황금 사신을 갑자기 불러냈었고 말이야.

    너무 귀여워서 잊고 있었네.

    갑자기 능력들이 생겨나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뭘까.

    헉 설마, 사신이가 힘을 숨김?

    ***

    두꺼운 암막 커튼이 쳐진 오피스텔.

    검은 요원이 몰래 마련해 둔 안가.

    그곳에서 금발 소녀와 검은 요원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앉아 있었다.

    심각한 검은 요원과 희희낙락한 금발 소녀의 표정이 대조적이었다.

    “아가씨, 그러면 알고 계시는 걸 조금 공유해 주시죠.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이 아는 건 아니에요. 괴물들에게 습격당해서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갑자기 오브젝트로 변해 있었으니까요.”

    소녀는 손바닥을 펼치고 ‘후우’하고 숨을 뱉자, 그 위로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오브젝트의 특징인지, 제가 특별한 건지는 잘 몰라도.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는 알게 되었어요.”

    불꽃을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던 소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우선 태양에 닿으면 재가 돼버려요.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고, 박쥐로도 변신할 수 있어요.”

    “그건… 소위 말하는 뱀파이어 같네요.”

    “이 빨갛게 변한 홍채까지 포함해서 그런 느낌이긴 한데, 다른 점도 꽤 있어요. 불을 뿜을 수 있고, 심장에서 만들어 낸 불꽃이 온몸을 흐르는 게 느껴져요.”

    소녀의 손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그 형태를 바꾸던 불꽃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서 농구공처럼 커다랗게 변해 있었다.

    “뱀파이어라면, 피는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피는 먹어야 해요. 피를 먹어야 제 심장 안쪽에 있는 장작을 키울 수 있거든요. 장작이 꺼지면 태양 빛에 닿은 것처럼 제 핏줄에 흐르는 불꽃이 전신을 불태워 버리겠죠.”

    그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검은 요원.

    금발 소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가 괴물이라며 싫어하면 어쩌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최후의 수단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피는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먹어야 하는 겁니까? 현재 협회장님의 시선을 피하는 게 제일 중요한데, 가장 문제가 될 만한 게 ‘피의 섭취’로군요.”

    금발 소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검은 요원은 전혀 다른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왠지 핏줄을 흐르는 불꽃이 한층 더 뜨거워져 피부를 달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그렇게 많이 먹을 필요는 없어요. 아마 아저씨 피만으로도 충분할 만큼 적어요.”

    사실 다른 사람의 피를 먹고 싶지 않을 뿐이지만.

    “아! 그리고 애매한 정보도 있는데, 들으실래요?”

    “뭐든지 말씀해 주시면 좋습니다. 지금도 정보가 너무 적은 상태니까요.”

    흠흠, 목을 가다듬은 소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달을 만들어라. 사막에 서라. 심장이 길을 인도할 것이다.”

    마치 성대모사를 하듯이 굵은 목소리를 흉내 내는 소녀. 

    “누군가에게 들은 말인 건가요? 왠지 그런 느낌이네요.”

    “눈을 뜨자마자 떠오른 말이에요. 누가 한 말인지, 왜 이런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어요. 제단에서 심장에 칼이 박힌 채 눈뜨자마자 뇌리에 새겨진 말이거든요.”

    “그 정보는 확실하게 기억해 두는 게 좋겠군요. 분명히 지금 상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정보 같습니다.”

    검은 요원은 간단하게 소녀의 대사를 메모하더니, 몇 가지를 추가로 적어 내려갔다.

    <달을 만들어라. 사막에 서라. 심장이 길을 인도할 것이다.>

    <달을 만들어라 – 붉은 달과의 연관성.>

    <사막에 서라 – 붉은 사막과 연관성.>

    <심장에 박힌 칼. 심장에서 만드는 불꽃. 길을 인도하는 심장?>

    <오브젝트 여부 불확실. 아가씨 신분증이 멀쩡함. ‘이름 없음’?>

    요원이 적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 소녀는 검은 요원의 볼을 잡고 자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어요. 그 트리니티 연구원들을 찾아내서 복수해야죠.”

    금발 소녀는 흉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

    서류 하나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내 소장실에 수많은 책과 자료들이 늘어서 있었다.

    “으으.”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공부하기 싫어.”

    사악한 ‘데일리 오브젝트’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검은 펭귄이 나타나서 수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은 뒤 갑자기 바뀐 법률 때문이었다.

    언론사를 포함해서 ‘오브젝트’를 다루는 모든 개인, 단체는 특정 자격증이 필요하도록 법이 바뀌었다.

    사실 연구소는 훨씬 전부터 필요한 자격증이었지만,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설립된 연구소의 경우 그 자격증 대신 격리 실적으로 갈음할 수 있었다.

    회색 사신을 격리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는 당연히 격리 실적으로 자격증 면제!

    그런데 이번에 생긴 법에서는 약 3개월의 계도 기간을 거친 뒤, 무조건 자격증을 요구하도록 바뀐 것이다.

    하지만.

    너무 어렵다.

    오브젝트 연구소 난립을 막기 위해서 자격증 시험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승리자의 웃음을 짓던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그때 비웃지 말고 미리미리 공부해 둘 걸.

    똑똑똑. 

    평범한 노크였지만, 왠지 열면 안 될 것 같은 노크가 들려왔다.

    똑똑똑.

    “이세희 연구소장님 계시죠? 빨리 문 여세요.”

    아, 역시 서아였어.

    나를 괴롭히려고 서아가 와버렸구나.

    오브젝트 연구소 대상으로 관리 시스템 관련 감사가 온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이겠지?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서 소장실 문을 잠그고 농성을 시작했다.

    “나는 관례대로 했을 뿐이니까! 잘못 없다고!”

    “빨리 문 여세요. 소장님!”

    쾅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무섭다.

    ***

    오무룡 저택의 개인실. 

    “할아버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가 오무룡에게 안겨들었다.

    “오, 그래 우리 손녀.”

    오무룡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면서 푸른 눈의 소녀를 쓰다듬었다.

    똑똑똑.

    절도 있는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할애비가 일해야 할 시간이구나. 방으로 돌아가서 놀고 있거라.”

    “네! 할아버지!”

    푸른 눈의 소녀와 엇갈리듯이 들어온 남자는 오무룡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절도있게 인사했다.

    “협회장님.”

    “그래, 무슨 일인가?”

    남자는 고개를 들고는 보고를 시작했다.

    “아가씨가 까치산 연구소로 갔었다는 모든 흔적을 제거했습니다.”

    “음.”

    오무룡은 만족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뒤로 돌아섰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남자가 방을 나서자, 오무룡은 벽난로 근처로 다가가 무언가 조작을 가했다.

    그러자 어두운 입구가 드러났다.

    공들여서 숨겨진 거창한 지하 비밀 통로.

    오무룡은 통로를 따라서 지하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승강기까지 이용해서 내려간 지하 깊숙한 곳은 첨단 실험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오무룡이 나타나자,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고개를 숙였다.

    그 지하 실험실 깊숙한 곳에 오무룡이 목표로 하던 것이 있었다.

    냉동 포트. 

    그 안에는 핏기 하나 없이 누워있는 금발 소녀가 누워있었다.

    오무룡은 자신의 품에서 로켓 펜던트를 꺼내서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잃어버릴 수는 없어.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그 펜던트 안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금발 소녀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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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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