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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EP.87

     

   가만히 집중하여 듣고 있다 보면 병원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소리가 들려온다.

     

   병실 밖의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가습기가 끓어오르는 소리.

   모든 병실이 그렇지는 않으나 간혹 중환자실에 심박수를 체크하는 기계가 반복적인 소리를 만들기도 하고 손님이 있을 경우 과일을 깎는 소리도 간간이 들려오는 곳이 병원이었다.

     

   사각사각.

     

   “세영이 사과 깎을 줄 알았어? 아니, 이거 시집가도 되겠네.”

   “아빠는 무슨 겨우 사과 깎는 거 가지고…”

   “어휴. 이렇게 듬직한 딸인데 아까워서 어쩌나?”

     

   가만히 사과에 집중하고 있던 서세영이 고개를 들어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팔다리에 드문드문 깁스를 하고 있지만 얼굴만큼은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나의 배려였다.

   사고 이후로 딸이 너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달래주기 위한 과장된 언행.

     

   정말 스무 살의 서세영이었다면 알 수 없었을 부모님의 배려였지만,

   이제 어느 정도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인 그녀는 그것이 얼마나 큰 부모의 사랑인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엄마는 사과로 되겠어? 다른 먹고 싶은 건 더 없고?”

   “딸이 깎아주는 사과면 충분하지. 세영이는 뭐 먹고 싶은 거 없니? 엄마가 이번에 보험금이 좀 많이 나올 것 같아서 돈이 좀 많아.”

   “말이나 못하면……”

     

   장난스런 웃음을 짓는 어머니의 농담에 서세영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오랜만에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릴 때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이야기나 크리스마스 때 아버지가 산타 분장을 하고 나타났던 시시콜콜한 과거들.

     

   웃으며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유쾌한 두 부모님을 보고 있자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 원래 이런 가정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행복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미 이것은 지나간 일.

   농담을 던지는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가만히 과일을 정리하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우울감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응? 우리 딸 어디 가?”

     

   아버지의 목소리에 서세영은 울음을 참으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환상. 과거. 미련.

     

   그 어떤 단어가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었으나,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감정에 잡아먹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냥. 과일이 좀 부족할 거 같아서 사다 놓으려고.”

   “사과 정도면 됐지. 그리고 아빠 부하직원들도 오면서 이것저것 싸올 거라 굳이 더 안 챙겨도 괜찮……”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슬쩍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녀와 우리 딸.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인자한 어머니의 미소가 서세영을 배웅했다.

   조심스럽게 병실 밖으로 걸음을 옮긴 그녀…… 안에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눈치를 좀 챙기라는 구박을 하는 것 같았지만 서세영은 애써 모른 척했다.

     

   “…너무 똑같잖아.”

     

   이것이 탑이 보여주는 환상임을 그녀가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두 사람이 떡하니 자신의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그녀에게는 그것을 부정할 냉정함이 부족했다.

     

   “일단 걷자…”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애써 옮겼다.

   서세영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병원 사람들. 그녀의 기억 속에는 없는 사람들인 것 같았지만 언젠가 한 번쯤을 보았으니 이 환상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휘이이…

     

   병원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가을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때도 이런 바람이 불었었다. 두 분의 교통사고 이후, 장례식을 마쳤을 때.

   당시의 그녀는 무심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덧없이 느껴졌고, 날씨가 시원해졌다며 웃으며 병원을 나서는 사람들이 괜히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거… 위험해……’

     

   지금은 당시의 부정함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재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큰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평생 머무르고 싶다는 욕심과 함께, 모든 욕망이 소실되어 버린 듯한 과한 만족감.

     

   짝! 짝!

     

   그녀는 자기 뺨을 두어 차례 소리가 나게 때린 뒤, 정면에 보이는 횡단보도를 향해 걸었다.

     

   병원 근처에는 작은 편의점이 있었다.

   나름 이름 있는 브랜드 편의점이지만 규모는 타 매장에 비해 작은 그런 편의점이.

     

   하지만 그곳은 그녀에게는 나름 의미가 깊은 장소였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이후, 마지막으로 사과를 하나 사서 부모님을 따라가겠다며 들렀던 편의점에서 용기를 얻은 기억이 있었으니까.

     

   ‘그 사람… 아직 있을까?’

     

   그녀의 또래로 보였던 아르바이트생.

   덥수룩한 머리에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눈매를 가졌던 그 남학생은 다 죽어 가던 서세영에게 용기가 되는 말을 툭하니 던졌었다.

     

   정확히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사실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삶을 살아가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세영은 과거의 그에게 도움을 한 번 받아볼 생각이었다.

     

   딸랑.

     

   편의점의 풍경이 울리며 서세영의 입장을 내부에 고요하게 알렸다.

     

   ‘……있네?’

     

   좁은 공간에 덩그러니 서 있는 남자 한 명.

   혹시나 하는 마음에 편의점으로 걸음했던 서세영은 그를 보자마자 반가운 기분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서 오세요.”

   “……어?”

     

   익숙한 얼굴.

   당시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그 알바생의 얼굴은 김시인을 닮아도 너무나 닮아 있었다.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못 알아보네.”

     

   은행에서 박조철을 만났던 한가민은 반가운 마음에 고등학생 박조철에게 인사를 건넸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과거의 시간 선. 거의 8년 이후에나 알게 된 박조철이 초등학생인 한가민을 알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나저나 이건 좀 이상한데…”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조철을 미행했다.

   이것이 그녀의 기억이고 그녀의 시간 선이라면 박조철이 무엇을 할지는 그녀가 볼 수 없어야 정상.

     

   하지만 은행을 빠져나온 박조철은 곧장 ‘해피 캐시’라는 낡은 간판이 그려진 사채업 사무실로 들어갔다.

     

   “내 기억으로만 만들어진 세상은 아니란 말이지?”

     

   박조철이 은행 대출을 받았든 사채를 썼든 그런 사실 따위가 기억 속에 존재할 리가 없었던 한가민은 지금부터라도 주변에 더 신경 쓰며 움직이기로 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

     

   “……배고프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설정 때문인지 튜토리얼부터 쌓아왔던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지 않았다.

     

   볼 수 있는 것은 임무가 적힌 시스템 알림뿐.

   상태창도, 코인 상점도 열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당연하다는 듯이 의식주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뭐라도 먹어야겠는데…”

     

   과거의 나는 어땠던가.

   초등학생 한가민은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당연하다는 듯, 학교에서 급식을 왕창 먹고 아침과 저녁을 버티는 전략을 취했었다.

     

   어차피 급식은 생활 지원으로 무료로 먹던 상황.

   혹시나 요구르트 같이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생기면 그것은 은근슬쩍 급식을 두세 번 받으면서 챙기기도 했으니 나름 굶지 않고 선방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문제는.

     

   “왜 하필 방학이야!”

     

   당연하지만 방학에 초등학생은 학교를 안 간다.

   급식도 당연히 못 먹었으니 급식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던 한가민에게 방학이란 하나의 보릿고개와 유사한 위기였던 것이다.

     

   “내가 방학에는 어쨌더라.”

     

   그녀는 가물가물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방학 때도 그렇게 배가 고팠던 기억은 없었다. 초등학생 저학년 때는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으니 굶을 일은 없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

     

   한가민은 스스로 자신이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만큼 성실하고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틀을 내리 굶은 초등학생에게 허기는 감히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준법정신을 풀어서 내동댕이쳤고 그 결과는 곧이어 음식을 훔치자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나중에 커서 10배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생각.

   하지만 지금도 코인 상점을 열 수 없는 이상 음식을 조달할 방법이 없었고, 어차피 현실도 아닌 상황에서 음식을 조금 훔친다고 달라질 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죄책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그녀는 주변에 보이는 작은 편의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앞에 막상 서게 됐을 때, 떠오른 기억이 하나 있었으니.

     

   “어? 여기…?”

     

   그녀가 은혜를 입은 장소.

   이제야 한가민은 그녀가 초등학생 방학 때, 왜 배를 쫄쫄 굶지 않았었는지가 기억났다.

     

   ***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한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선택하는 일거리 중 하나다.

   그리고 나 또한 가장 단순하게 거리에 많이 보이는 편의점을 선택했었고 무슨 이유에선지 면접을 본 다음날 곧바로 일을 시작했던 기억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일반적으로는 자주 편의점을 찾아오는 손님이 아닌 이상, 잠시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워낙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기도 했고, 애초에 그 사람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특이한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에는 강렬한 인상이 남기도 했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남았던 두 사람. 얼굴은 가물가물했지만 다시 보니 그 두 사람이 지금 들어온 손님들임을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사과 어디 있어요?”

     

   초췌함 또한 매력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소리치는 듯한 아름다운 외모.

   다 죽어 가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 여인은 아무리 봐도 서세영이 확실했다.

     

   “저기, 서… 코너에서 우측으로 돌면 낱개로 팔고 있어요.”

     

   꾸벅.

     

   나는 서세영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녀의 눈을 보고는 사과가 진열된 위치를 가리켰다.

   트라우마를 찾기 위해서는 과거를 크게 뒤틀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어차피 내 기억 속의 잔재일 뿐, 진짜 서세영이 아니기도 했으니까.

     

   나의 대답에 고개를 슬쩍 꾸벅이고는 자리를 벗어나는 그녀.

   하지만 나의 시야에는 그녀의 뒤를 따라온 초등학생 한 명도 아주 또렷하게 들어왔다.

     

   “흥흥.”

     

   아직 앳된 티를 벗어나지 못한 꼬마가 열심히 주위를 살피며 빵을 챙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저는 지금부터 빵을 훔치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듯한 의심스러운 발걸음과 콧노래.

     

   그리고 그녀의 그런 모습은 서세영의 시야에도 잡혔고 그녀는 가만히 나에게 다가와 예의 그 죽어 가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못 보신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데요… 지금 저 애가 뭘 챙긴 것 같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슬쩍 한가민을 바라봤다.

     

   흔들리는 동공.

   얼마나 긴장했던지 그녀의 두 눈동자에 아주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달아오른 얼굴과는 달리 이마에는 식은땀이 또르르 굴러떨어진다.

   원래도 키가 작았지만 초등학생이 위축되니 더 작아 보이는 한가민.

     

   나는 괜히 미안한 기분이 들어 한숨을 내쉰 후, 카운터를 열고 나와 벌벌 떨고 있던 꼬맹이에게 다가갔다.

     

   ***

     

   서세영은 김시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봤다.

   과거의 기억. 그녀에게 묘하게 힘이 되었던 그때의 사건.

     

   “여기서 기다려.”

     

   당장에라도 베일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

   김시인은 초등학생…… 그러니까, 한가민에게 그렇게 말한 뒤, 잠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런 어린 애를 상대로 신고라도 하려고 그러나…」

     

   당시에 서세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이 생각보다 각박하다고. 그리고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이 남자도 딱히 예외는 없는 것 같다고.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완전히 빗나갔음을 깨닫게 될 수 있었다.

     

   “자.”

     

   남자는 초등학생 꼬마에게 우유를 내밀었다.

     

   “도둑질은 나쁜 거야.”

   “……”

   “이건 내가 사주는 거니까 아직 너는 물건을 훔친 적이 없는 거야. 알겠지?”

     

   그는 허기진 아이에게 빵과 우유를 건넸다.

     

   ‘아니…’

     

   음식을 건네받는 아이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밀어진 구원. 그 순간 남자가 아이에게 준 것은 단순한 빵과 우유가 아니었다.

     

   “배고프면 언제든지 와도 돼.”

     

   그의 손을 통해 전해진 것은 양심의 결백과 작은 희망.

   과거의 서세영은 음식을 받은 아이를 보며 아직 그녀의 세상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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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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