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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어떻게."

       "구하러 왔어요."

       "하지만 그건 임자 있는 물건…"

       "빌렸어요."

       "제대로 다루려면 천재라도 시간이 걸리는…"

       "그래서 인정받았어요. 타른헬름에게. 좀 늦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게 뭐냐. 이게 뭐냐고!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있다. 그것도 이 사지라고 널리 일컬어진 파라메르의 안에!

         

       "무섭지 않았아요?"

       "무서워요."

       "그런데 왜 왔어요?"

       "당신이 여기 있으니까."

         

       아이린이 내 몸을 감쌌다. 백색의 갑옷에 달라붙은 붉은 불꽃들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저 따뜻했다.

         

       아이린이 눈을 흘겼다.

         

       "선배로서 혼을 내고 싶지만…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이네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대한 살점의 표면이 불타고 있었지만, 데미지는 없어 보였다.

         

       하긴. 저건 철벽의 요새와 같다. 끝없이 재생하는 마의 물건이다.

         

       정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짓이기지 않는 한, 저걸 이길 방법은 하나뿐이다.

         

       피에르와 아리스. 둘을 떼어 놓는 것.

         

       썩은 자들의 군주가 그르릉거렸다. 탁한 목소리 속에서 대검을 잡았다.

         

       "선배님."

       "네. 후배님."

       "저기 가슴에 박힌 보옥 보이죠?"

       "…네. 보여요."

         

       썩은 자들의 군주의 몸에서 유일하게 검게 일렁거리는 구슬.

         

       "저길 깨야 해요."

         

       특수 패턴 중 하나를 파훼하는 핵심 요소!

         

       아이린은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다. 그저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세요."

         

       아이린의 백색 대검에 불이 붙었다.

         

       "제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아이린은 확실히 천재다. 하지만 천재라고 해도 한계는 있다. 사람의 성장 속도는 크게 제한되기 마련.

         

       그녀 혼자 여기로 올라왔다면 분명 말렸겠지.

         

       허나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몸에 있는 건 타른헬름이다. 내가 라의 성물 중에서 가장 탐내던 물건. 하지만 낮의 무녀들을 심기를 건드린다 생각해 일찌감치 포기했던 성물이다.

         

       저거라면 믿을 수 있다. 나는 단검을 꽉 쥐었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대검을 눕혔다.

         

       숱한 시간 속에서 청부살인을 하던 괴물. 그리고 그 괴물이 죽인 이들 중에는 고위 기사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날것도 강하지만, 그 위에 검술까지 얹는 녀석이다. 측정 레벨은 90.

         

       그리고 이쪽은 그보다 낮은 대략 능력치 70대의 둘이다. 타른헬름을 끼고 있다는 건, 육체적 레벨만으로는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

         

       그래도 적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전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

         

       '그녀' 또한 있으니까.

         

       "자하드."

         

       뱀처럼 미끄러져 들어온 그림자 속에서 누가 솟아났다. 뱀의 사도 에스텔.

         

       나이스! 80짜리도 합류다!

         

       하지만 이 여자를 전력으로는 쓸 수 없다. 에스텔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가장 약체화된 시점에, 아리스와 피에르를 떼어놓는 것.

         

       에스텔이 짧게 물었다.

         

       "뭘 해?"

       "여기 있다가, 틈이 보이면 저 껍데기 안에 있는 사람을 분리해 주세요."

       "도움은?"

       "후방 지원만 조금 부탁해요. 힘을 최대한 아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분리할 때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할 테니까."

         

       나는 아이린과 어깨를 맞댔다. 그녀의 옆에 섰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그르릉거렸다. 대검의 끝이 꿈틀거리며 톱날처럼 듬성듬성 파였다.

         

       아까보다 한층 더 강하겠군.

         

       "선배님."

         

       분명 긴장되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슬쩍 말을 건넸다.

         

       "이렇게 같이 싸워보는 건 처음이네요."

       "…괜찮아요. 앞으로는 쭉 같이 있을 테니까."

       "네?"

       "집중해요."

         

       아이린의 백색 대검이 불이 붙었다.

         

       "와요."

         

       썩은 자들의 군주가 포효했다.

         

         

         

         

       . . .

         

         

         

         

       사도 에스텔은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썩은 거인의 등에 박힌 검.

         

       나가의 성물이다. 틀림없다. 저게 왜 여기 있을까.

         

       파라메르 안에 숨겨져 있던 걸 자하드가 꺼내오기라도 한 걸까.

         

       보면 볼수록 기이한 남자다. 에스텔은 파공음 속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쓱 쓸어올렸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대검을 움직인다. 그 미중유의 거력에 공간 자체가 부서진다.

         

       콰직.

         

       소리는 짧았다. 내리친 대검이 모든 걸 집어삼켰다. 동시에 터져 나오는 붉은 뼈의 가시들까지.

         

       괴물이다. 에스텔은 저것과 정면에서 맞서 싸워 일대일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두꺼운 피부를 가르고 그 안에 데미지를 박아넣으려다 도리어 당하겠지.

         

       하지만 놀랍게도, 자신보다도 약한 둘이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몰아치는 단검과, 거세게 움직이는 대검.

         

       "…라의 교단은."

         

       에스텔이 한숨을 내쉬었다.

         

       "발톱을 숨기고 있었네."

         

       무거운 갑옷이 움직였다. 투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올 때면, 백색 대검이 거칠게 불타올랐다.

       단순한 화력에 기교가 섞인다.

         

       썩은 자들의 군주.

         

       자신도 할 수 없는 괴물과 지금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부딪힐 때마다 공간이 터져나갔다. 불꽃이 화륵 거리며 밀리고 있기는 해도, 분명 버티고 있었다.

         

       거기다가…

         

       틈을 노리는 단검까지.

         

       자하드가 움직였다. 기묘한 움직임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가는 뱀의 이빨처럼 드러난 약점을 노렸다.

         

       부딪히고 가른다. 마치 무언가를 노리듯이 눈동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유효타는 없었지만, 까다로운 듯 썩은 자들의 군주가 분노를 토해냈다.

         

       전방위 광역공격.

         

       우득하고 힘을 준 썩은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내려친 대검에 썩은 거인의 등이 쩍 하고 갈라졌다.

         

       꾸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살점이 몰아쳤다. 피의 비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에스텔은 사복검을 꽉 쥐었다.

         

       그 누가 믿을까.

         

       이 광경이 모두가 저물어가는 해라고 생각하던, 교단들의 전투라는 것을.

         

       "…읏챠."

         

       마디마디가 갈라진 사복검이 채찍처럼 늘어났다. 간단한 손짓 하나로 튕기듯 앞으로 날아갔다.

         

       막을 수 없는 각도에서 아이린을 내려치는 공격. 그 대검의 측면을 때려 궤도를 비튼다.

         

       살점을 노리던 대검이 바닥에 처박히고, 그 순간 둘의 유효타가 썩은 자들의 군주를 파고들었다.

         

       콰가가가가각!!

         

       세 명의 합공.

         

       사도급 실력자의 합심.

         

       에스텔은 사복검을 회수했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틈을 살폈다. 해야할 건 후방 지원. 그 이상은 도와주지 않는다.

         

       자하드가 말했다. 힘을 비축하라고. 그렇다면 무언가 방법이 있으리라.

         

       애초에 저걸 상대로 오래 시간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이 있는 거겠지.

         

       …보여 줘. 자하드.

         

       이 사람들이 네게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

         

         

         

       . . .

         

         

         

       "크으으윽!!"

         

       지면이 갈라졌다. 나는 발을 삐끗했다. 정신적 피로. 비교적 스펙이 부족한 나로서는 몸으로 때울 수도 없다. 몰아치는 썩은 뼈들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해, 공격에 얻어맞았다.

         

       "푸흡?!"

         

       피가 세차게 입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장이 조각나는 듯한 충격.

       지면을 굴렀다. 세차게 튕겨난 몸이 한순간 조종권을 잃었다.

         

       "자하드?!"

       "오지 마세요…!"

         

       긁어내는 목소리로 어떻게든 대답했다. 몸을 일으켰다. 나가 또한 비틀거리고 있었다.

         

       "침식률을 막는 것도…이제 한계…!"

         

       [침식률 : 72%]

         

       정신이 흐려지고 있다. 앞이 뿌얘지고 있다. 나는 헐떡였다.

       숨을 다 잡으려 노력했다. 어떻게든 앞을 바라보았다.

         

       썩은 자들의 군주.

         

       타른헬름의 부속물인 백색 대검에 금이 갔다.

         

       "으으윽!!"

         

       굽혀지는 아이린의 한쪽 무릎. 나는 단검을 내던졌다.

         

       내달리며, 미스틸테인을 썩은 거인의 등에서 뽑아들었다.

         

       "자하드?! 그, 그건 침식률이 더 오르는 직접 접촉…!"

         

       [침식률 : 81%]

         

       안다.

         

       여기서 정신을 잃었다가는 모든 것이 끝장이란 걸.

         

       하지만 검은 뿌리가 내 몸속에 박히면 박힐수록, 내게는 더 큰 힘이 다가왔다. 미스텔테인은 양날의 칼날.

       내가 다침으로써, 적 또한 다칠 수 있게 만든다.

         

       [악의 씨앗(SSS)이 꿈틀거립니다.]

         

       썩은 살점을 디디고 검날을 늘어트린다. 썩은 자들의 군주가 흠칫 고개를 돌린다.

         

       꾸득 하고 쥐어지는 손. 부풀어 오른 썩은 근육이 한순간 거칠게 달아오른다.

         

       미중유의 거력.

         

       이제껏 맞아본 적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저건 넘어서지 못한다. 번번이 죽었던 패턴이다.

         

       이게 게임 속이라면, 분명 여기서 죽었겠지.

         

       …하지만!

         

       "으득!"

         

       아이린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무너져가던 무릎이 다시 세워진다. 쥔 백색 대검의 끝에서 다시 한번 불꽃이 새어 나온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계에 한계까지 긁어모으는 듯한 소리. 떨어지는 백색 대검에 썩은 군주의 대검의 궤적이 한순간 비켜나간다.

         

       미중유의 거력으로 내려친 공격이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오른팔이 어깨죽지부터 잘려 뒤로 날아간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몸을 틀어 튕겨 나가던 미스틸테인을 왼팔로 부여잡았다.

         

       내달리는 고통 속에서 손을 뻗었다. 마지막 한 수. 한계까지 오르는 침식률이 간신히 두꺼운 외피를 뚫게 해주었으니.

         

       "꿰뚫어주마!"

         

       검은 보옥.

         

       [스며든 어둠 – 사나예(Sanajeh) (S)를 사용합니다.]

         

       둘이서 줄곧 노리던 약점 속으로 미스틸테인이 깊게 파고들었다.

         

       "……"

       "……"

       "……"

         

       침묵이 모두를 집어삼켰다. 검은 보옥의 표면에서부터 시작한 균열은 이내 물건을 완전히 뒤덮었다.

         

       쏟아지는 조각. 떨어져 내리는 검은 보옥.

         

       아리스가 썩은 자들의 군주의 몸속에서 웃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다 들리도록 속삭였다.

         

       "아리스는…그걸로 죽지 않아…헛수고야…"

         

       쥐고 있던 미스틸테인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로 넌 죽지 않겠지."

         

       떨어져 나간 오른팔의 단면에서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와 함께-

         

       줄곧 잠들어있던 내 성력에 불꽃이 붙었다.

         

       "다른 거라면 다르지만 말이야!"

         

       [뜯어먹힌 라의 성력이 돌아옵니다.]

       [뒤섞인 성흔(A)이 꿈틀거립니다.]

       [뒤섞인 신성(A)이 꿈틀거립니다.]

       [더욱 강력해진 그림자 성력과 불의 성력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뒤섞인 성흔(A)과 뒤섞인 신성(A)이 하나로 합체됩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S)을 습득합니다.]

       [미스틸테인의 침식이 끝납니다.]

       [침식률 : 100%]

       [이성을 잃습니다.]

       [태양신의 기도가 이를 거절합니다.]

       [미스틸테인이 거칠게 울부짖습니다.]

       [악의 씨앗이 반응합니다.]

       [악의 꽃(SSS)이 완전히 개화합니다.]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불꽃의 성력. 뒷받치는 그림자의 성력.

         

       【자하드으으으으으읏!!!】

         

       잃어버렸던 목소리.

         

       -기어코 해냈구나! 이 망할 녀석아!

         

       어쩌면 다시 듣지 못했을 듯한 속삭임.

         

       "…어?"

         

       아리스의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없어져 버린 오른팔이 다시금 복구되기 시작했다.

       불꽃으로 뒤덮인 곳에서부터 새살이 돋아났다. 멈출 것 같았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아리스."

         

       줄곧 잠잠했던 귀걸이가 흔들렸다.

         

       [갈증과 허기짐.]

       [절망이 세상을 뒤덮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빛은 남아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 이름을 ‘브류나크’라 이름 지었다.]

       

       [신앙심으로 온몸이 충만해집니다.]

       [잃어버렸던 라의 빛이 세상에 도래합니다.]

       [성력이 최대치로 채워집니다.]

       [체력이 최대치로 채워집니다.]

       [성력의 운용이 2배로 뛰어오릅니다.]

         

       [빛을 삼키는 불 – 루인(Luin)(A)을 사용합니다.]

       [수많은 전투 경험에 빛을 삼키는 불 – 루인(Luin)(A)이 반응합니다.]

       [내뻗는 창에 힘이 실립니다.]

       [빛을 삼키는 불 – 루인(Luin)(A)이 거룩한 파괴 – 루인(Luin)(S)으로 변경됩니다.]

         

       외피 속, 얕게 박힌 미스틸테인을 놓았다. 몸을 빙글 돌렸다.

         

       현현하는 브류나크. 빛의 창이 손끝에서 빛났다. 창날이 붉게 물들고, 한순간 터져나간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썩은 자들의 군주의 눈이 일제히 경직했다.

         

       나는 씨익 웃었다.

         

       "그만 끝내자."

         

       처음부터 끝까지.

         

       길고 길었던 파라메르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마, 말도 안…"

         

       말을 집어삼키고, 더욱 깊게.

       보옥이 있던 곳을 넘어서, 두꺼운 외피 속으로.

         

       불타는 창끝을 미스틸테인의 자루에 강하게 박아 넣었다.

         

       ‘악의 씨앗(SSS)’이 개화한 ‘악의 꽃(SSS)’.

         

       한계까지 올라간 침식률에 피어난 미스틸테인의 파괴력이 썩은 자들의 군주를 꿰뚫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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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The Paladin Monopolizes the Sacred Relics

성기사가 성물을 독차지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In a world where magic reigns supreme and the influence of gods wanes, a young boy finds himself unexpectedly thrust into the role of an acolyte in the declining Sun God’s Temple. Blessed with the divine stigma of the Sun God, he must navigate the temple’s internal politics, the hostility of his fellow acolytes, and the challenges that come with his newfound powers.

As he delves deeper into the mysteries of the temple, he discovers hidden secrets and powerful artifacts that could change the course of his destiny. With the guidance of an enigmatic senior acolyte and the unwavering faith in his own abilities, he sets out to prove his worth and carve his own path in a world that has all but forgotten the true power of the div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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