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7

       *

         

         

         에텔플라트 코엔울프의 이름을 보자마자 이반이 떠올린 것은 차가운 겨울밤 침엽수림의 전선이었다.

         

         이제 막 왕실근위대에 배속되었던, 그 미숙했던 시절의.

         

         

        *

         

         

         외국인과 함께 작전에 나설 때면 느끼는 것이 있다.

         

         이 녀석들, 이름이 너무 어렵다. 라고.

         

         웃기는 일이다. 한자문화권에서 20년 넘게 살아왔던 이반에겐 크라실로프의 작명법이나 다른 외국들의 작명법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이 판타지-러시아 세상에서 10여 년을 살고 보니, 이젠 외국인 이름이 더 어렵다.

         

         적어도 크라실로프는 애칭이 보편화되어 있는 세상이 아닌가. 그를 아는 사람은 보통 반카라고 부른다. 그러기 전에도 애초에 이반이란 이름 자체가 어렵지도 않다.

         

         하지만 외국 병력을, 그것도 귀족을 마주하고 살다보면 이름을 부를 때마다 혀가 굳는 것만 같았다.

         

         

         “코엔울프 경.”

         

         

         깊은 숲이었다. 눈이 내리는 침엽수림, 사방에서 피냄새가 진동을 하는 겨울밤이었다.

         

         이반은 다소간의 긴장감과 얼마간의 두려움으로 발을 내딛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떨어진 지도 어느덧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명의 등지에서 마주하는 전선은 두렵기만 하다.

         

         그래도 발을 내딛는다. 그는 왕실근위대였으므로. 두려움이 그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왔니?”

         “예. 수색 결과….”

         “말해줄 필요 없단다. 이 숲엔 더 이상의 잔존 세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알고 있어.”

         “…예?”

         “엘프는 귀가 밝아. 이반. 이따금씩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듣는 소리는 물질 세상의 영역을 벗어나곤 하지. 숲이 말해주더구나. 더 이상의 마족은 없다고.”

         

         

         이게 무슨 개소리지. 노환이 오신 건가?

         

         이반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궁시렁거렸다. (속으로. 엘프는 귀가 좋기 때문이다.)

         

         

         “불만이 가득하구나?”

         “오해십니다.”

         “에이. 다 들린다니까. 안전이 확실하다면 이 추위에 왜 두 시간이나 척후를 보냈냐는 거지?”

         “….”

         

         

         이반은 두꺼운 장갑 아래에서도 곱은 손을 애써 주무르며 힘겹게 입을 다물었다. 자칫하다간 쌍욕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으므로 숨쉬는 것보다 쉽게 사람의 목을 썰어버리는 괴물에게 비난을 하지 않는다.

         

         절대, 결단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는 왕실근위대이기 때문이며, 왕실근위대는 결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명상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명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예의 끝에 마주하는 참오. 고요한 밤, 숲 속에서. 내가 베어낸 이들의 시체를 마주하고 침잠하는 순간이 필요했단다. 나 또한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음을, 단지 나보다 강한 자 앞에 서기까지 찰나의 생을 유예 받았음을 깨닫는 순간이지.”

         

         

         유아퇴행형 노환이 확실하군.

         

         추워 죽겠다. 일단 군영으로 복귀하고, 불가에 앉아서 몸을 좀 녹인 뒤에, 영양바를 구워 먹을 생각만 들었다.

         

         고요? 지금은 겨울이다. 북부전선의 겨울은 혹독하다. 겨울철 이 근방엔 언제나 눈보라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지금처럼.

         

         그러니까, 귓가를 에이는 이 바람과, 눈이 침엽수림을 후려치는 소음은 결코 고요하고 거룩한 밤의 요건이 될 수는 없다.

         

         이반은 긴장했다.

         

         

         ‘치매에 걸린 미치광이 엘프가 검의 달인이라면 과연 내가 막아낼 수 있을까?’

         

         

         그는 냉철한 사람이었으므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순식간에 파악해냈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 같은 천것과는 달리 엘프의 무인들이야 그런 돈오 속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겠으나, 날이 궂습니다. 군영으로 복귀하시어 전투 피로를 달래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밤산책도 좋은 경험이지.”

         

         

         정신나간 엘프 같으니.

         

         이반은 인종차별을 싫어하는 21세기의 문화 시민이었으므로 엘프를 혐오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미개한 세상에선 엘프가 혐오 종족에 속한다.)

         

         하지만 그 또한 사람인지라, 엘프들이 종종 보이는 저런 광태를 볼 때마다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물론 참아야 했다. 논리와 법률과 달리 이곳에선 무력이 진리로 통하고 있었다. 하여간 미개한 세상이다.

         

         

        *

         

         

         이반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엘프 의학에 치매 치료도 있을까? 장생족이라면 있을 수도 있다. 노환을 수백 년간 앓아야 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반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명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척안의 에델.

         

         짐승의 털처럼 부드럽게 퍼지던 새카만 머리카락과, 맹금류의 것을 닮은 황금색 눈동자. 그 한쪽을 칠용장에게 던져주었다고 웃으며 말하던 호걸을.

         

         실제로, 그녀가 이끌던 군단이 칠용장의 기습에 노출되었을 때, 그녀는 홀로 칠용장을 상대해 한쪽 눈을 잃은 채 생환했다.

         

         그건 놀라운 일이다. 이 세상 누구도 감히 그들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다는 게 상식이니까.

         

         에델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실제로 해낸 인물이다. 그녀의 군단은 최소한의 손실로 도주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그녀의 다른 별명, 이를 테면 ‘상승기사’나 ‘여왕의 대전사’, ‘전승자’. ‘단죄자’와 같은 호칭들은 부차적일 뿐이다.

         

         

         “에델이 출전한다고.”

         “그렇다니까요, 선배님. 캬, 저도 오랜만에 뵙겠네요. 그 양반 아직 정정하겠죠?”

         “정정하니까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겠지. 누가 사주했지?”

         “네?”

         “에델이 자기 손으로 참가 신청서를 내밀었을 리가 있나. 이 여자 대신 참가를 신청한 자가 누구냐.”

         “그리켄코스 양입니다.”

         “베올그린….”

         

         

         이반은 인상을 찌푸렸다.

         

         엘피헤라가 갑자기 이 대회를 망치겠다고 작정할 리는 없으니까, 이건 결국 베올그린의 사주라는 의미인데.

         

         베올그린이 이 나라 내정에 수저를 얹을 이유가 있나?

         

         알렉산드르의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엘리자베타의 정적이라면 거의 반드시, 알렉산드르의 계파에 속했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달리 하명하신 바가 있나?”

         “없습니다.”

         “그렇군.”

         

         

         왕녀가 마지막으로 내렸던 명령은 ‘압도적으로 승리하라.’. 단 한 문장뿐.

         

         그렇다면 그리 되어야 한다.

         

         훌륭한 요원은 작전에서 실패를 대비한 여러가지 계획을 세워둔다. 차선 목표와 차악 목표 같은 것들을.

         

         그러나 절멸부대의 요원들은 그렇지 않다.

         

         

         실패할 경우 어떤 것을 이루어야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

         

         실패 위협이 있을 경우,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오직 그것만을 대비한다.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부차적이다. 절멸부대에겐 죽음을 제외한 실패가 없으므로. 죽기 전까진 실패한 것이 아니며, 이들의 작전 수행을 최종적으로 훼방하고 싶다면 오직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런 훈련을 받아왔다.

         

         이반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남은 시간은 이틀.

         

         코엔울프를 꺾을 방법을 강구하며.

         

         

        *

         

         

         “완성… 완성… 완성했어….”

         

         

         하얗게 불태웠다.

         

         엘피헤라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눈으로 털썩 주저 앉았다.

         

         아버지에게 지혜를 빌려가며, 고대 유물들을 역설계해 가며, 이미 익혔던 주문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고, 작동 논리를 새롭게 구축해 가며.

         

         마침내 완성했다.

         

         

         “들리, 들리세요? 들리시나요?”

         

        -잘 들리네. 신기한걸.

         

         

         그녀의 눈 앞엔 유려한 라인의 전신 판금갑옷이 서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난잡하게 펼쳐진 수많은 마도공학 부품들 사이에, 홀로 빛을 발하며 우뚝.

         

         저 갑옷에 박아 넣은 고위 주문이 대체 얼마던가. 대체 얼마나 많은 마력석이 저 갑옷의 동력원으로 갈려 나갔나.

         

         

         “딱, 딱 이틀만 운용 가능해요. 시험운행 해보시겠어요?”

         

        -그럴 필요 없단다.

         

         

         갑옷은 덜그럭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표정 없는, 바이저가 깊게 눌러쓰여 있는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엘피헤라는 저 갑옷이 웃고 있다고 여겼다.

         

         

        -과연 베올그린, 그 능구렁이의 딸이구나. 놀라워. 이런 기술이 딱 20년만 먼저 완성되었다면, 넌 정말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거란다.

         

         “과, 과찬이세요! 이건 고작 며칠만 작동할 수 있어서…. 애초부터 단기 결전만을 고려하고 만든 거라서 가능했던 거에요.”

         

        -겸손하기까지. 네 아비와 닮은 것은 외모와 재능뿐이구나. 축복받았어.

         

         

         엘프들의 마도공학 기술 중에 ‘원격 통신’이란 것이 있다.

         

         엘프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기술, 거기에 조금 더 정교한 기교를 더하자면 어느 정도 ‘흐릿한’ 잔상마저 투영할 수 있다.

         

         먼 거리에서도. 심지어 이 땅과 저 먼 칼리온까지도 단말을 이어낼 수 있는 고등 주문이다.

         

         그리고, 마력 단말을 보다 많이 설치하고 그 방향성을 달리 조작한다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음성의 입출력 구문을 제어해서, 특정 자극만을 입출력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원격 조작이 가능한 골렘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실시간 통제가 가능한 수준의.

         

         흐릿한 잔상만 볼 수 있고, 움직이는 데에 몇 초 정도의 지연이 걸리며, 골렘 특유의 둔중함 탓에 정교한 조작이 불가능했지만, 그것조차도 이틀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다지만.

         

         어쨌건, 칼리온에 있는 사람이 크라실로프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그녀 홀로 구축해낸 것이다.

         

         

        -움직임은… 지연이 조금 있구나.

         

         “그건 어쩔,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이걸로 논문을 써도 당장 졸업 학위를 따는 것에 문제가 없을 지경인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하고 있니.

         

         “헤헤, 감사합니다아….”

         

         

         오직 실력으로만 저 오만한 추밀원에서 ‘해결사’로 손에 꼽히는, 수백 년간 단 한차례도 패배한 적 없는 위대한 기사.

         

         저분의 업적 아래에 함께 따라오는 위명이 얼마던가. 저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역사서와, 전술교범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그런 존재가, 그녀처럼 어린 엘프를 향해 따듯하게 미소짓고 있는 것이다.

         

         엘피헤라는 흐물거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단한 학술적 업적을 달성한 학자 특유의 흥분과, 며칠 간 밤을 지새우며 고된 노동을 해야했던 피로가 동시에 몰려와서.

         

         그 탓에 그녀는 귓가를 파고드는 작은 속삭임을 미처 듣지 못했다.

         

         

        -그 꼬마가 얼마나 자랐을까, 기대가 되네.

         

         

         에델플라트 코엔울프, 그녀는 이 낯선 금속 육체를 조작해 장검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토너먼트 전날, 심야의 일이었다.

         

         

        *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 며칠간 프리첸카야를 뒤덮었던 혼란을 지우기라도 할 것처럼, 화려하게.

         

         엘리자베타는 국고를 아낌없이 털어 넣어 연회를 벌이고, 귀족들을 초청하고, 시민들을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마침내.

         

         토너먼트가 개최되었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델플라트의 위치는 정확히 말하자면 칼리온이 아닙니다.
    틸레스를 경유해서 크라실로프로 진입하는 상공에 있습니다.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서울에 있는 드론을 원격 조작하는 정도의 기분이 아닐까요?

    그러나 양식있는 문명인은 결코 비행기 안에서 인터넷 통신망을 이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화 보기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