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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

        온 세상이 어둡고 짙은 푸른색을 띄고 있는 이때, 앨리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잔 덕분에 허리와 등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단단히 굳어있었지만, 앨리스는 코로 숨을 내쉬며 강제로 굳은 허리를 들어 올려 우둑거리는 소리를 뿜어냈다.

        ​

        ​

        ​

        “흐우,”

        ​

        ​

        ​

        묵직한 통증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

        맨바닥에서 자는 게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

        분명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

        하지만 딱히 불만까지는 아니었다.

        ​

        지금이야 온 세상이 지옥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인간들의 세상 위에 자리 잡은 초록색 지옥이나 다름없던 이 누운 나무숲에서 지붕이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만큼 응석받이는 아니었으니까.

        ​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으니 말이다.

        ​

        앨리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두세 번 눈을 껌뻑거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언제나 그랬듯이 이 오두막의 주인이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오두막을 나서기 위해서였다.

        ​

        ​

        ​

        “가시려고요?”

        ​

        ​

        ​

        아차차, 

        ​

        오늘은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

        앨리스는 방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향해 대답했다.

        ​

        ​

        ​

        “일찍 깼네, 혹시 내가 깨운 거야?”

        ​

        “아니요. 안 잤어요.”

        ​

        “그래…”

        ​

        ​

        ​

        이 오두막의 주인인 가면의 사내.

        ​

        솔직히 사내라는 말보단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심약한 남자였지만, 그래도 키 하나는 멀대같이 컸으니 분명 성인일 것이다.

        ​

        사람의 시선이 닿으면 안 되는 기이한 병을 앓고 있다는데, 그런 병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

        하지만 마기로 가득 찬 이 숲속에서 지내다 보면 별 기괴한 일이 다 생기기 마련이기에, 앨리스는 굳이 그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

        자기가 의사도 아닌데, 아무리 자기가 앓고 있다고 해서 병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실제로 기겁하며 눈을 피하는 걸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

        어쩌면 앨리스 본인의 몸에 샘솟는 신성력으로 그를 치유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의리는 없었다.

        ​

        지난 며칠간 잠을 잔 대가는 밤마다 가져온 사냥감 정도로 충분할 테고, 그 역시 침대 하나조차 없는 거실 하나를 내어준 걸로 그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

        애초에 앨리스가 신성력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

        그녀는 기사 훈련은 받았을지언정 성녀로서의 교육받아 본 적은 없었기에, 어처구니없는 양의 신성력을 퍼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

        효율 나쁘게 신성력을 퍼붓다 보면 웬만한 상처는 단숨에 낫지만, 타인의 병을 낫게 할 만큼 섬세한 조작은 못 하는 것이다.

        ​

        물론, 그의 몸에 신성력을 쏟아붓다 보면 언젠간 병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간 앨리스의 하루 계획이 망가지고 말 텐데, 앨리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

        설령 하루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해도, 그런 소중한 휴식을 이름도 모르는 그를 위해 쓰고 싶지도 않았다.

        ​

        ​

        ​

        ‘내가 마왕을 잡고 살아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뭐 그땐 모르겠지만.’

        ​

        ​

        ​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흉갑을 착용했다.

        ​

        방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흘러나왔다.

        ​

        ​

        ​

        “솔직히 심문관님도 안 주무실 줄 알았어요.”

        ​

        “…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

        “네.”

        ​

        ​

        ​

        어젯밤, 그는 앨리스에게 말해주었다.

        ​

        앨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부하들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고.

        ​

        자세히 따져 묻자, 그는 몇 달 전, 마물에 의해 공격받은 다섯 구의 시체를 발견해 이전에 살던 마을에 묻어두었다고 했다.

        ​

        자세한 위치와 넓은 묘지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묻자 그는 ‘애초에 마을 사람들만 묻혀있는 자그마한 공동묘지이기도 하고 이름을 알 방법이 없어 그저 명복을 빌어주는 문구만 비석에 새겨 두었으니, 어떤 비석인지 찾기도 쉬울 것’ 이라고 설명했다.

        ​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혹시 다른 실종자는 본 적이 없는지 물었다.

        ​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다니던 동료 외에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답했다.

        ​

        앨리스는 어젯밤 그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 동시에 떠올랐던 고양감과 죄책감을 다시 한번 조용히 음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오히려 그래서야. 정말 내 부하들이라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마주할 수는 없으니까.”

        ​

        “… 미리 말 못해서 죄송해요.”

        ​

        “일부로 숨긴 건 아니잖아.”

        ​

        “…”

        ​

        “일부로 숨겼니?”

        ​

        ​

        ​

        앨리스는 대답을 망설이는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남자는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했다.

        ​

        ​

        ​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 그으… 그게, ”

        ​

        ​

        ​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고르는 데 한참이 걸린다.

        ​

        저런 얼빵한 모습에 왠지, 어린 시절 자주 보던 남자애 하나가 떠올랐다.

        ​

        아마도 지금은 없을 그 아이가.

        ​

        ​

        ​

        “아, 설마 사제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

        ​

        ​

        남자는 상념에 빠지려는 앨리스의 의식을 밀쳐내듯 황급히 대답했다.

        ​

        그의 대답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 숲을 탐사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사제복을 입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내가 인상착의를 설명한 것도 아니고, 설명했어도 얼굴 같은 건 이미 잊었을 것이고.”

        ​

        “… 그렇… 죠?”

        ​

        “무엇보다, 아직은 그 시체가 내 부하들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

        “어떻게 알 방법이 있나요? 설마 시체를 파내려는 건…”

        ​

        ​

        ​

        남자의 발칙한 상상력에 앨리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

        ​

        “시체 근처만 가도 알 수 있어. 신성력으로.”

        ​

        “신성력이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시체에도 미약하게 신성력이 남는데, 여신교에 소속된 이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의 신성력을 띄니까 대충 알아볼 수 있어.”

        ​

        “… 분위기요?”

        ​

        ​

        ​

        앨리스는 강철 장화의 코 부분을 바닥에 통통 두드려 발에 꼭 맞추고는 말했다.

        ​

        ​

        ​

        “여신교의 사제들이 품은 신성력은 묘하게 모범생 냄새가 나. 멜번이라는 사제는 특히 그랬고.”

        ​

        “… 다른 냄새가 나는 신성력도 있나요?”

        ​

        “있지.”

        ​

        “예를 들면요?”

        ​

        ​

        ​

        남자는 자꾸만 질문을 해댔다.

        ​

        마치 앨리스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

        앨리스는 그런 남자의 질문이 조금도 귀찮지 않게 느껴지는 것에 조금 놀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

        ​

        ​

        “나.”

        ​

        “…?”

        ​

        “내건 쇠 맛이 나거든.”

        ​

        ​

        ​

        엉뚱한 대답이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

        앨리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

        오두막의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남자는 또다시 말을 걸었다.

        ​

        ​

        ​

        “저, 저기.”

        ​

        “음?”

        ​

        ​

        ​

        소리가 조금 가까워진걸 보니, 앨리스가 나가는 뒷모습이나마 배웅하기 위해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

        앨리스는 혹여나 자신의 시선이 닿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

        ​

        ​

        “몸, 조심하세요.”

        ​

        “…응.”

        ​

        “아, 그리고…”

        ​

        ​

        ​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또 봬요.”

        ​

        ​

        ​

        앨리스는 되물었다.

        ​

        ​

        ​

        “무슨 의미야?”

        ​

        “무슨 의미냐죠…? 말 그대로인데요.”

        ​

        “그래?”

        ​

        “그냥 인사에요. 왜 그러세요?”

        ​

        “…흠, 그런 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서.”

        ​

        ​

        ​

        앨리스는 문을 열고 나섰다.

        ​

        또 보자는 말.

        ​

        아마, 안될 걸 알기에, 같은 말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

        ​

        ​

        “잘 있어.”

        ​

        ​

        ​

        앨리스는 마기가 꿈틀거리는 숲속으로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떤 지며 나아갔다.

        ​

        ​

        ​

        ​

        ​

        ​

        ​

        ​

        ​

        ​

        *

        남자가 가르쳐 준 장소는 호숫가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이 불타버린 폐허는 앨리스조차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

        하지만 설마, 이 안에 자신이 사지로 보내버린 이들이 묻혀 있는 묘지가 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해보지 못했다.

        ​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살아있기를 바라서 였을까.

        ​

        이제 와서 그들의 무덤을 본다고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왕에게 도전해 높은 확률로 죽음을 맞이할 그녀에게 있어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과거의 실수이자 후회였다.

        ​

        앨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

        아직, 확실히 그들이라고 결정 난 것은 아니니까 속단하지 말자.

        ​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의 폐허 구석에 위치한 작은 공동묘지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

        ​

        ​

        “아…”

        ​

        ​

        ​

        확인할 것도 없었다.

        ​

        그녀가 묘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천천히 미약하게 남은 신성력의 조각이 그녀의 몸에 스며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올곧고 모범적인, 재미없을 정도로 딱딱한 신성력.

        ​

        멜번이었다.

        ​

        ​

        ​

        “…하, 젠장.”

        ​

        ​

        ​

        앨리스는 천천히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

        확실히, 빈 곳이 많은 비석은 이 좁은 묘지에선 한눈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앨리스는 천천히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

        아무리 신앙심이 적은 그녀라도 여신교의 중요한 사람이니, 이 기도가 그들에게 닿지 않을까.

        ​

        그런 생각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미안합니다. 멜번. 정말로요.”

        ​

        ​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있을 리가 없었다.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당연한 만큼 잔인한 사실이었다.

        ​

        ​

        ​

        “마음이 후련해지실지는 모르지만, 나도 곧 죽습니다. 재수 없으면 더 빨리 죽을 거고요. 재수가 몹시 없다면 오래 고통받으며 천천히 죽을 겁니다.”

        ​

        ​

        ​

        마기로 가득 찬 숲에는 더 이상 새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

        오늘따라 바람 소리도, 부스럭거리는 짐승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그녀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그녀의 가슴 안쪽에 박힌 채 윙윙거리다 이따금 덜커덩거리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 뿐이었다.

        ​

        살이 녹아내릴 만큼 뜨거운 열기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더욱 가슴이 아파져 왔다.

        ​

        ​

        ​

        “미안해요…”

        ​

        ​

        ​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손을 풀었다.

        ​

        차마 용서해달라고 빌지는 않았다.

        ​

        어차피 용서 따위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자신이 행해온 복수처럼, 그들도 나를 원망하고 복수한다고 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

        그동안 여신교에 속해 벌어온 모든 돈을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써 버린 것 역시 조금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제가 가면, 마음껏 저를 욕하고, 때리고, 베고,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

        ​

        ​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

        이제 미적거릴 핑계도 사라졌으니, 정말 갈 때가 된 것이다.

        ​

        마왕의 성이 자신의 무덤이라면 그걸로도 아주 만족스럽다고,

        ​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마왕을 잡는다는 명예, 세상을 구원했다는 명성.

        ​

        그런 것보다는 마왕성 어디에선가 죽어있을 마리아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

        게다가 교황님의 계시와 에릭의 조사, 그리고 전에 붙잡은 제3 왕자를 심문한 끝에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발더 그 개자식 역시 마왕성에 숨어있음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다.

        ​

        친구의 원수를 갚고, 친구가 누운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

        실력이 모자라 용사 파티에 끼지 못했던 것을 평생토록 후회한 앨리스는 그런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

        ​

        ​

        “이제 갈 때가 되었네요.”

        ​

        ​

        ​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

        숲에 들어오기 전 짧게 자른 짙은 갈색의 단발머리가 천천히 나부꼈다.

        ​

        천천히 몸을 돌리려는 그때,

        ​

        그녀의 시야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

        ​

        ​

        “…?”

        ​

        ​

        ​

        비석이었다.

        ​

        다섯명의 부하들이 묻힌 비석 옆에 조금 더 화려한 모양에 조금 더 빽빽하게 내용이 새겨진 아름다운 비석.

        ​

        그 비석에 쓰인 어떤 단어 하나가 앨리스의 시야 속으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들어왔다.

        ​

        ​

        ​

        “라일라 스태프.”

        ​

        ​

        ​

        ​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 몸이 왜이러지,

    연휴동안 어디 놀러갔다 왔더니 코로나라도 옮아온건지 몸이 좀 으슬으슬하네요잉. ㅠ

    다들 몸 조심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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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I Can’t Run Away from the Woman Who Saved Me.

나를 살려준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
Score 4.2
Status: Completed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Having lost all my family, I fled. As I was running away, she saved me when I was on the brink of death due to an accident. The moment our eyes met, I knew I couldn’t leave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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