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온 세상이 어둡고 짙은 푸른색을 띄고 있는 이때, 앨리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잔 덕분에 허리와 등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단단히 굳어있었지만, 앨리스는 코로 숨을 내쉬며 강제로 굳은 허리를 들어 올려 우둑거리는 소리를 뿜어냈다.
“흐우,”
묵직한 통증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맨바닥에서 자는 게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분명 영원히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앨리스는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불만까지는 아니었다.
지금이야 온 세상이 지옥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인간들의 세상 위에 자리 잡은 초록색 지옥이나 다름없던 이 누운 나무숲에서 지붕이라도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만큼 응석받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으니 말이다.
앨리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두세 번 눈을 껌뻑거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오두막의 주인이 눈을 뜨기 전에 먼저 오두막을 나서기 위해서였다.
“가시려고요?”
아차차,
오늘은 늦어버린 모양이었다.
앨리스는 방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향해 대답했다.
“일찍 깼네, 혹시 내가 깨운 거야?”
“아니요. 안 잤어요.”
“그래…”
이 오두막의 주인인 가면의 사내.
솔직히 사내라는 말보단 소년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심약한 남자였지만, 그래도 키 하나는 멀대같이 컸으니 분명 성인일 것이다.
사람의 시선이 닿으면 안 되는 기이한 병을 앓고 있다는데, 그런 병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하지만 마기로 가득 찬 이 숲속에서 지내다 보면 별 기괴한 일이 다 생기기 마련이기에, 앨리스는 굳이 그에게 따져 묻지 않았다.
자기가 의사도 아닌데, 아무리 자기가 앓고 있다고 해서 병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닐 테고, 실제로 기겁하며 눈을 피하는 걸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앨리스 본인의 몸에 샘솟는 신성력으로 그를 치유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럴 의리는 없었다.
지난 며칠간 잠을 잔 대가는 밤마다 가져온 사냥감 정도로 충분할 테고, 그 역시 침대 하나조차 없는 거실 하나를 내어준 걸로 그 이상의 대가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애초에 앨리스가 신성력을 잘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기사 훈련은 받았을지언정 성녀로서의 교육받아 본 적은 없었기에, 어처구니없는 양의 신성력을 퍼붓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효율 나쁘게 신성력을 퍼붓다 보면 웬만한 상처는 단숨에 낫지만, 타인의 병을 낫게 할 만큼 섬세한 조작은 못 하는 것이다.
물론, 그의 몸에 신성력을 쏟아붓다 보면 언젠간 병이 나을지도 모르지만, 그랬다간 앨리스의 하루 계획이 망가지고 말 텐데, 앨리스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설령 하루 이틀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해도, 그런 소중한 휴식을 이름도 모르는 그를 위해 쓰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마왕을 잡고 살아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때까지도 내가 죽지 않는다면… 뭐 그땐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흉갑을 착용했다.
방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흘러나왔다.
“솔직히 심문관님도 안 주무실 줄 알았어요.”
“… 그런 이야기를 들어서?”
“네.”
어젯밤, 그는 앨리스에게 말해주었다.
앨리스가 그토록 애타게 찾는 부하들이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고.
자세히 따져 묻자, 그는 몇 달 전, 마물에 의해 공격받은 다섯 구의 시체를 발견해 이전에 살던 마을에 묻어두었다고 했다.
자세한 위치와 넓은 묘지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묻자 그는 ‘애초에 마을 사람들만 묻혀있는 자그마한 공동묘지이기도 하고 이름을 알 방법이 없어 그저 명복을 빌어주는 문구만 비석에 새겨 두었으니, 어떤 비석인지 찾기도 쉬울 것’ 이라고 설명했다.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혹시 다른 실종자는 본 적이 없는지 물었다.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다니던 동료 외에 사람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답했다.
앨리스는 어젯밤 그 소식을 들었던 그 순간, 동시에 떠올랐던 고양감과 죄책감을 다시 한번 조용히 음미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히려 그래서야. 정말 내 부하들이라면,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마주할 수는 없으니까.”
“… 미리 말 못해서 죄송해요.”
“일부로 숨긴 건 아니잖아.”
“…”
“일부로 숨겼니?”
앨리스는 대답을 망설이는 그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허둥지둥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 그으… 그게, ”
머릿속에서 적절한 대답을 고르는 데 한참이 걸린다.
저런 얼빵한 모습에 왠지, 어린 시절 자주 보던 남자애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도 지금은 없을 그 아이가.
“아, 설마 사제분들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남자는 상념에 빠지려는 앨리스의 의식을 밀쳐내듯 황급히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앨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숲을 탐사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사제복을 입고 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애초에 내가 인상착의를 설명한 것도 아니고, 설명했어도 얼굴 같은 건 이미 잊었을 것이고.”
“… 그렇… 죠?”
“무엇보다, 아직은 그 시체가 내 부하들이 맞는지 아닌지도 모르잖아.”
“어떻게 알 방법이 있나요? 설마 시체를 파내려는 건…”
남자의 발칙한 상상력에 앨리스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시체 근처만 가도 알 수 있어. 신성력으로.”
“신성력이 그런 것도 알 수 있나요?”
“신성력을 지닌 사람은 시체에도 미약하게 신성력이 남는데, 여신교에 소속된 이들은 모두 비슷한 분위기의 신성력을 띄니까 대충 알아볼 수 있어.”
“… 분위기요?”
앨리스는 강철 장화의 코 부분을 바닥에 통통 두드려 발에 꼭 맞추고는 말했다.
“여신교의 사제들이 품은 신성력은 묘하게 모범생 냄새가 나. 멜번이라는 사제는 특히 그랬고.”
“… 다른 냄새가 나는 신성력도 있나요?”
“있지.”
“예를 들면요?”
남자는 자꾸만 질문을 해댔다.
마치 앨리스를 보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앨리스는 그런 남자의 질문이 조금도 귀찮지 않게 느껴지는 것에 조금 놀라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미소를 지었다.
“나.”
“…?”
“내건 쇠 맛이 나거든.”
엉뚱한 대답이라 들리겠지만, 사실이었다.
앨리스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오두막의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남자는 또다시 말을 걸었다.
“저, 저기.”
“음?”
소리가 조금 가까워진걸 보니, 앨리스가 나가는 뒷모습이나마 배웅하기 위해 가까이 온 모양이었다.
앨리스는 혹여나 자신의 시선이 닿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몸, 조심하세요.”
“…응.”
“아, 그리고…”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봬요.”
앨리스는 되물었다.
“무슨 의미야?”
“무슨 의미냐죠…? 말 그대로인데요.”
“그래?”
“그냥 인사에요. 왜 그러세요?”
“…흠, 그런 말 정말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아서.”
앨리스는 문을 열고 나섰다.
또 보자는 말.
아마, 안될 걸 알기에, 같은 말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잘 있어.”
앨리스는 마기가 꿈틀거리는 숲속으로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떤 지며 나아갔다.
*
남자가 가르쳐 준 장소는 호숫가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불타버린 폐허는 앨리스조차 지나가며 몇 번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설마, 이 안에 자신이 사지로 보내버린 이들이 묻혀 있는 묘지가 있으리라고는 차마 상상해보지 못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살아있기를 바라서 였을까.
이제 와서 그들의 무덤을 본다고 눈물이 나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마왕에게 도전해 높은 확률로 죽음을 맞이할 그녀에게 있어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과거의 실수이자 후회였다.
앨리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확실히 그들이라고 결정 난 것은 아니니까 속단하지 말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을의 폐허 구석에 위치한 작은 공동묘지에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아…”
확인할 것도 없었다.
그녀가 묘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천천히 미약하게 남은 신성력의 조각이 그녀의 몸에 스며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올곧고 모범적인, 재미없을 정도로 딱딱한 신성력.
멜번이었다.
“…하, 젠장.”
앨리스는 천천히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확실히, 빈 곳이 많은 비석은 이 좁은 묘지에선 한눈에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앨리스는 천천히 손을 모으며 기도했다.
아무리 신앙심이 적은 그녀라도 여신교의 중요한 사람이니, 이 기도가 그들에게 닿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미안합니다. 멜번. 정말로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있을 리가 없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당연한 만큼 잔인한 사실이었다.
“마음이 후련해지실지는 모르지만, 나도 곧 죽습니다. 재수 없으면 더 빨리 죽을 거고요. 재수가 몹시 없다면 오래 고통받으며 천천히 죽을 겁니다.”
마기로 가득 찬 숲에는 더 이상 새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오늘따라 바람 소리도, 부스럭거리는 짐승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그녀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그녀의 가슴 안쪽에 박힌 채 윙윙거리다 이따금 덜커덩거리는 규칙적인 기계 소리 뿐이었다.
살이 녹아내릴 만큼 뜨거운 열기엔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더욱 가슴이 아파져 왔다.
“미안해요…”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며 손을 풀었다.
차마 용서해달라고 빌지는 않았다.
어차피 용서 따위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행해온 복수처럼, 그들도 나를 원망하고 복수한다고 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동안 여신교에 속해 벌어온 모든 돈을 그들의 가족을 부양하는 데 써 버린 것 역시 조금도 아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가면, 마음껏 저를 욕하고, 때리고, 베고, 원망하셔도 좋습니다.”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제 미적거릴 핑계도 사라졌으니, 정말 갈 때가 된 것이다.
마왕의 성이 자신의 무덤이라면 그걸로도 아주 만족스럽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마왕을 잡는다는 명예, 세상을 구원했다는 명성.
그런 것보다는 마왕성 어디에선가 죽어있을 마리아의 곁에서 죽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황님의 계시와 에릭의 조사, 그리고 전에 붙잡은 제3 왕자를 심문한 끝에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발더 그 개자식 역시 마왕성에 숨어있음이 거의 확실한 상황이었다.
친구의 원수를 갚고, 친구가 누운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실력이 모자라 용사 파티에 끼지 못했던 것을 평생토록 후회한 앨리스는 그런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제 갈 때가 되었네요.”
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숲에 들어오기 전 짧게 자른 짙은 갈색의 단발머리가 천천히 나부꼈다.
천천히 몸을 돌리려는 그때,
그녀의 시야 끝에 무언가가 보였다.
“…?”
비석이었다.
다섯명의 부하들이 묻힌 비석 옆에 조금 더 화려한 모양에 조금 더 빽빽하게 내용이 새겨진 아름다운 비석.
그 비석에 쓰인 어떤 단어 하나가 앨리스의 시야 속으로 마치 빨려 들어가듯 들어왔다.
“라일라 스태프.”
.
아 몸이 왜이러지,
연휴동안 어디 놀러갔다 왔더니 코로나라도 옮아온건지 몸이 좀 으슬으슬하네요잉. ㅠ
다들 몸 조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