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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어쨌거나 이 게임은 JRPG다. 내가 90년대 JRPG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그 시절에는 분위기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2020년대에 발매되는 대부분의 JRPG는 오타쿠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이 차고 넘치는 애니메이션풍 게임인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무리 그래픽이 실사 풍이고 할리우드 영화 같은 연출의 게임이라도 내용을 파고들어 보면 여주인공이고 남주인공이고 할 거 없이 죄다 미남 미녀인 경우가 많다.

        

       성격도 영화 캐릭터 성격이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성격에, 분명 백인 캐릭터인데도 이상하게 영어 더빙보다는 일본어 더빙이 더 어울린다. 모션도 어딘가 과장되게 느껴지고.

        

       뭐, 그냥 그런 게임들을 즐기던 나의 고정관념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아제르나 전기’가 그 JRPG판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거침없이 ‘애초에 오타쿠가 아니면 버티기 힘든 게임’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캐릭터 디자인이 2D 일러스트를 기반으로 했다든가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다. 게임 자체가 평점 사이트나 ESD 플랫폼 내부 평가로 ‘대체로 긍정’ 같은 것을 받는 것과 별개로, 캐릭터들의 성격이나 행동이 대놓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법한데다가 그 캐릭터들을 공략하는 미연시풍 시스템까지 존재한다.

        

       하나의 큰 줄기로 이루어진 스토리는 존재하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짤막한 이벤트 중에서는 ‘대놓고 노린’ 이벤트가 꽤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채 해수욕장에 가는 에피소드는 이런 부류의 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여주인공들한테 정정당당하게 메이드복 비슷한 웨이트리스 복장을 입힐 수 있는 학교 축제 에피소드를 빼먹는 학원물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렇게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넣어진 에피소드 이외에도, ‘이건 좀 억지스럽게 노린 에피소드 아닌가?’ 할법한 내용도 이 게임에는 존재했다.

        

       예를 든다면,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라던가.

        

       ……게임 안에서 카지노라는 단어만 듣고도 대충 여주인공들이 무슨 복장을 하게 될지 연상했던 것을 보면 나도 참 뼛속까지 씹덕이었다.

        

       *

        

       일단 급한 불을 끄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 뭐, 택티컬하게 가는 거야 좋다 이거야. 이런 분위기가 이 세계관에는 거의 없으니까 먹히긴 하겠지. 남들이 보기에는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보일 내 기준으로는 그럭저럭 어울리는 전투 방식이다.

        

       전장에서 구를 만큼 구른 베테랑이 전훈을 얻어 깎아진 전투법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도 분명 인정해 줄 것이다. 내가 노리는 이미지도 그런 것일 거고.

        

       문제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밀어오던 신비주의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여러 컨셉을 한 번에 가진 캐릭터는 존재하지만, 그 컨셉들이 제대로 조화가 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잡탕 캐릭터가 되어버리는 법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 더 신중하게 캐릭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그리고 그런 생각에 빠진 나의 얼굴을 보고, 앨리스는 어김없이 내 기분을 읽어냈다.

        

       “큰 고민은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아무 일 없다는 듯 대답해도,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고 물어보았다.

        

       “그러니까, 그…….”

        

       정작 그렇게 말하는 앨리스도 뭔가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은 표정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나는, 너의 언니 같은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한테 말 못 할 고민이 있으면 나한테 말하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

        

       순간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려 앨리스를 빤히 쳐다봤더니, 앨리스의 볼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본인이 말을 꺼내놓고도 억지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더 자주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앨리스였고, 그런 앨리스에게 자존감을 불어넣어 주던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크흠.”

        

       하지만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앨리스는 그렇게 목을 풀었다.

        

       걷고 있던 우리는 어느새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없으니 앨리스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겠지만.

        

       “봐, 일단 생일은 네가 앞서지만.”

        

       “…….”

        

       “그 생일이라는 게 사실은 그렇게 신빙성이 있는 자료도 아니고…….”

        

       “…….”

        

       “그, 아버지 아래에서 더 오래 있었던 사람은 나고? 응? 그러니까, 네가 더 늦게 자식이 되었으니까…….”

        

       “…….”

        

       “네가 내 동생이라고 해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을, 까?”

        

       그렇게 확신하는데 왜 마지막 말끝에 물음표가 들어가는 걸까?

        

       음, 뭐.

        

       사실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싸울 생각은 없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앨리스의 언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파고들면 애초에 여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니까.

        

       몸이야 여자고, 나름대로 이 몸으로 10년 넘게 살았고…… 고아원에 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따진다면 간당간당하게 10년이었지만, 시간을 돌려서 내가 경험했던 순간까지 포함하면 10년은 거뜬히 넘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남자로 살았던 삶은 여자로 살았던 삶보다 더 길다.

        

       그렇다고 내가 앨리스의 ‘오빠’라고 주장할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거기에도 꽤 큰 의문이 떠오른다. 따지자면 아저씨에 가까운 나이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시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뭔가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해서 납득이 안 가네.”

        

       앨리스 나름대로 농담 비슷한 거였을까? 그렇다기에는 꽤 진심인 것 같이 느껴졌는데.

        

       나를 대놓고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 클레어를 그냥 두었기에 앨리스 나름대로 질투심이 생겼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자매 비슷한 관계로 자랐으니까.

        

       클레어와 똑같이 언니라고 부르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뭐, 좋아. 반응이고 뭐고, 본인이 그렇다고 했으니 앞으로 그렇다고 칠게. 너는 이제부터 내 동생이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이없는 건 어이없는 거다.

        

       나는 루카스나 제이든에게도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당연히 앨리스를 언니라고 부를 생각도 없다. 앨리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우리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는 교정을 지나서, 아카데미의 정문 밖으로 나갔다.

        

       날씨는 론다리움을 기준으로 천천히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의 찌는 것 같은 여름보다는 훨씬 나았다. 설정상으로는 여름에도 30도를 넘는 날씨가 거의 없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여름이 덥지 않을 리는 없다. 기온은 기온이고, 내리쬐는 햇빛은 햇빛이니까. 애초에 덥지 않으면 여름에 굳이 바다를 찾아갈 이유도 없었고.

        

       “자, 먼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 둘이 도착한 곳은 카페였다.

        

       지난번에 파르페를 먹은 이후에 종종 오는 곳이다. 시간을 돌려 무표정을 유지하긴 했지만, 앨리스의 눈에는 내가 이 가게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가 좋았다. 이렇게 맛있는 디저트를 내놓으면서도 이상하게 손님이 없는 카페도 드물었으니까.

        

       “흐흥.”

        

       앨리스의 말대로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더니, 앨리스는 기분 좋은 듯 콧소리를 냈다.

        

       “슬슬 먹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어.”

        

       사실 슬슬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이런 것을 먹고 싶긴 했다.

        

       그야…… 달잖아. 나는 달고 맛있는 걸 좋아하니까. 이 몸이 되면서 달콤한 음식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기도 했고.

        

       아무튼 나에게 언니라는 사실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기분 좋기라도 했는지, 앨리스는 웨이트리스를 기다리지도 않고 얼른 계산대를 향했다.

        

       “…….”

        

       그리고 그런 모습이 들뜬 어린아이 같아서, 솔직히 그 모습만으로 ‘언니’라는 이미지를 가지기가 몹시 힘들었다.

        

       뭐, 본인이 그러고 싶다면야 협력은 하겠지만.

        

       조용히 앉아서 그 신난 뒷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에—

        

       “그럼 이제 누가 막내인지 정해진 건가?”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

        

       그 성숙한 여인의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자리에 한 사람이 앉아있었다.

        

       길게 기른 은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서 이마가 드러난 그 여인은 어딘가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피부는 조금 어두운 색이었지만 머리카락이나 나긋나긋한 눈썹, 그리고 긴 속눈썹까지 전부 은빛이라 몹시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세상만사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 회색 눈동자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흥미가 깃들어 있었다.

        

       어느새 빈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벨라.

        

       성은 팬그리폰이다.

        

       원작에서는 본편 시작 전에 죽었던 사복검의 원주인.

        

       “아, 루카스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서 멋대로 휴가를 내고 잠적했어. 하던 일은 내가 대신 맡았고. 아버지는 그렇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내가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긋나긋하고 조금은 느린 목소리로 술술 불어주는 이 캐릭터는, 사실 내가 조금 껄끄러워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다.

        

       하긴, 인제 와서는 레나만큼 예측하기 힘들다고 하긴 어려운 인물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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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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