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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휴고가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장갑을 벗어 떨어트리고 주먹을 쥐자 팔뚝에서 힘줄이 솟았다.

     

    목표는 층계참에서 기사들을 상대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바위족 족장이다.

     

    “흡.”

     

    휴고가 양팔을 크게 휘두르며 가슴께에서 마주쳤다.

     

    ―화아악!

     

    강력한 파동이 뿜어지고 돌풍이 일었다.

     

    그의 검은 손에서 오염된 신성력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며 주문을 이루었다.

     

    “해주가 유효하다… 저 야만족이 주술사라고 하셨지요.”

     

    내 처방에 기운을 차린 타냐가 머리칼을 흩날리며 내게 물었다.

     

    “아무리 덩치가 큰들 저만한 신체능력을 순수하게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단장을 힘으로 부딪쳐서 밀어낼 정도잖아?”

     

    “그랬습니다.”

     

    “저놈이 목에 걸고 있는 거 보여?”

     

    내가 층계 위의 족장을 가리켰다.

     

    그의 목에 걸린 홈이 파인 아뮬렛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전설급 아티팩트야. 상급 이하의 저주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일종의 토속신앙 부적이야.”

     

    “저주? 주술사도 저주를 씁니까?”

     

    “주술도 대가를 지불해 강화 효과를 얻는 디버프라는 점에서 저주와 같은 계열이야.”

     

    “축복과는 다릅니까?”

     

    “축복을 쓸 때 필요한 건 신성력뿐이야. 반면 저주나 주술은 피나 영혼, 심하면 목숨까지 제물을 대가로 해. 그만큼 효과는 좋지만 금지된 주문이지.”

     

    타냐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악하군요. 놈도 힘을 얻기 위해 다른 목숨을 산제물로 희생시켰단 뜻입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는 필요 없겠군요.”

     

    타냐가 검을 고쳐잡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투지가 불타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저놈의 반칙을 휴고가 없애줄 테니까.”

     

    휴고의 준비가 끝났다.

     

    해주 주문으로 구성된 신성력이 기묘한 형태로 일렁였다.

     

    마법진처럼 정교한 도형은 아니다.

    주문진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계속해 모습을 변화한다.

     

    “흐읍!”

     

    ―팟!

     

    휴고가 양손을 뻗어 신성력을 통째로 족장을 향해 쏘아냈다.

     

    검은 파동에 노출된 족장이 기사에게 돌칼을 휘두르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휴고의 해주주문이 거슬린다는 듯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 쪽을 노려본다.

     

    “으음!”

     

    휴고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부릅떴다. 야만족과 시선을 맞추고 눈꺼풀 하나 까딱이지 않는다.

     

    “그르라아아아―!!”

     

    여태 조용히 위엄을 지키던 족장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포효를 내질렀다.

     

    고막이 떨어질 듯한 강력한 위협이다.

     

    위협해온다는 건 위협을 느낀다는 뜻.

     

    해주 주문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명확하게 족장을 적으로 인식한 해주 주문이 주술을 반발시킨다.

     

    족장의 피부가 수분이 마른 마냥 쩍쩍 갈라지며 벗겨져 간다.

     

    더욱이 휴고의 신성력은 그의 손 때문에 자체로 저주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노출되기만 해도 꽤 아프겠지.

     

    “음…!”

     

    휴고의 앞에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구체가 나타났다.

     

    선이 이리저리 그어지고 여러 조각으로 분해할 수 있게 생긴 것이, 퍼즐과도 같다.

     

    저주의 술식을 도식화한 물건이다.

    여기가 해주 주문의 본편이다.

     

    “그락―!!”

     

    쿵, 쿵.

    족장이 거대한 발소리를 내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맞서기 위해 도약을 준비하는 타냐에게 내가 팔을 내밀어 저지했다.

     

    “아직이야. 타이밍을 기다려.”

     

    휴고가 구체를 빙글 돌리며 살폈다.

    그간 저주를 연구한 성과 덕에 주술의 술식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구체를 분해하는 휴고.

     

    콰직!

     

    휴고가 첫 조각을 떼어내어 손안에서 분쇄했다. 동시에,

     

    ―퍼엉!

     

    “그륵?!”

     

    족장의 등 뒤로 마나가 폭발하며 첫 번째 강화 주술이 깎여나갔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지만 뜀박질은 멈추지 않는다.

     

    쿵, 쿵! 족장이 계속해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온다.

     

    “흠!”

     

    휴고가 두 번째 조각을 깨부쉈다.

     

    “그르라락―!!”

     

    족장은 괴로워하면서도 위협적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거리는 앞으로 15미터.

     

    “휴고, 몇 개 남았어?”

     

    “세 개입니다. 이제 둘.”

     

    족장에 걸려있던 강화 주술이 하나씩 해주되어간다.

     

    거대했던 덩치는 조금씩 쪼그라들고, 근육에서 힘이 빠지며, 날카롭던 이빨이 뭉툭해졌다.

     

    슬슬 때가 다가온다.

    나도 준비할 때였다.

     

    이에는 이, 강화에는 강화다.

     

    수첩을 펼치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근력의 축복, 신속의 축복.”

     

    내 신성력을 감은 타냐의 몸이 찬란하게 반짝인다.

     

    전투에 지쳐있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그르라아아아―!!”

     

    우렁찬 괴성.

     

    족장이 우리의 머리까지 도달해 머리통을 부숴버릴 기세로 돌칼을 휘둘렀다.

     

    “하나, 끝났습니다!”

     

    “단장!”

     

    ―파앗!

     

    내가 그녀의 이름을 외칠 것도 없이 타냐가 먼저 반응했다.

     

    도움닫기와 함께 쏘아진 타냐의 검이 정확하게 족장의 목을 노린다.

     

    날카롭게 제련된, 마치 타오르는 듯한 색의 검기가 아름다운 직선을 그었고.

     

    “―그륵.”

     

    족장은 순식간에 머리와 몸체가 양단되며 힘을 잃었다.

     

    ―쿠구궁!

     

    달려오던 족장의 몸이 관성에 의해 우리의 뒤로 날아가며 성벽 난간에 부딪쳤다.

     

    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난간 벽을 부수며 그대로 떨어진다.

     

    나는 족장이 떨어진 너머로 고개를 슬쩍 빼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휘오오오

     

    세찬 바람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바닥도 보이지 않는 깊은 절벽이다.

     

    “휴.”

     

    타냐가 멋들어지게 검을 닦고 착검하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타냐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느낀 순간이었다.

     

    “수고했어, 휴고.”

     

    “꽤 재미있었습니다.”

     

    나는 휴고와 주먹을 부딪쳤다.

     

     

     

    족장이 쓰러졌기에 중앙 성채 점령전은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

     

    남은 야만족 잔당은 군집할 수도 없으니 무리 없이 토벌할 수 있다.

     

    “덕분에 족장을 쓰러트릴 수 있었습니다. 빚을 졌군요, 선생님.”

     

    “수고했어, 단장. 검 실력 끝내주던데. 나중에 나도 그 검기 좀 가르쳐 줘 봐.”

     

    “무리입니다. 타고나야 합니다.”

     

    검에 한해서는 칼같은 타냐였다.

     

    “그렇긴 해도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후방에 있어야 할 치유사, 심지어 주치의이신 몸이 직접 최전선 한복판에 뛰어드시다니요.”

     

    “결과가 좋았으니 됐잖아. 아셀라에게 혼날지도 모르니 빨리 돌아가야겠어.”

     

    층계참을 내려가려는데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3층, 점령했습니다!”

    “복도도 점령했습니다! 지하로 가는 길은 안 보입니다!”

    “민간 피난민,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숨어있다던 백작과 피난민은 못 찾았나.

     

    지하 어딘가에 있다는 정보였는데, 혹시 야만족과 대치 중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다 몰살당했다는 결과만 아니면 좋겠는데. 이 생고생을 해서 겨우 이겼건만.’

     

    내가 타냐에게 물었다.

     

    “단장, 지하로 가는 길은 못 찾았어?”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중앙 성채는 꽤 넓습니다. 수색을 위해 지역 점령을 시도하던 중에 족장을 만났습니다.”

     

    “아직 곳곳에 야만족 잔당이 있으니 서둘러야겠어. 우선…”

     

    샥.

     

    그때 내 시야에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잡혔다.

     

    “뭐였지?”

     

    가까이 가보니 구석 틈새에서 어린 남자아이 한 명이 겁먹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봐, 소년.”

     

    “헉… 사, 사람이다!”

     

    “그래, 사람이야. 설마 야만족으로 보이지는 않지?”

     

    “구, 구해주러 오셨어요?!”

     

    “그래. 제도에서 왔어.”

     

    “살았다….”

     

    소년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기도 잠시, 소년이 고개를 붕붕 젓고는 긴박한 얼굴로 외쳤다.

     

    “저기, 좀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야만족과 싸우다가 많이 다치셨어요!”

     

    생존자였던 모양이다. 옷은 고급인 것이 기사의 아들이라고 생각됐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 행색은 꾀죄죄했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어. 피난민들은 어디에 있어? 넌 어떻게 나왔고?”

     

    “바로 이 밑에 있어요. 저는 저기로 나왔어요.”

     

    소년이 성벽 난간으로 가더니 외벽 한참 아래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조그마한 틈새가 있었다. 지하실의 환풍구 같았다.

     

    “저기로 빠져나와서 기어 올라왔다고? 용기가 가상한데.”

     

    “좀 그런 편이에요.”

     

    나는 소년의 등을 쳐주며 물었다.

     

    “지하로는 어떻게 내려가?”

     

    “어…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피난할 땐 워낙 정신이 없었거든요. 그, 그보다.”

     

    “왜?”

     

    “모두 숨어있는 창고 입구를 야만족들이 발견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이 급해서 밖으로 나온 건데…!”

     

    “단장.”

     

    “예. 위치를 고려해 신속히 특정하도록 하겠습니다.”

     

    타냐가 빠르게 대답했다.

    우리가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가르르!”

    “그르락!”

     

    갑자기 머리 위에서 울음소리와 함께 야만족이 다섯 명쯤 뛰어내렸다.

     

    성채 옥상에 있던 잔당이었다.

     

    “선생님!”

     

    타냐가 빠르게 반응하여 내 어깨를 감싸려 했다.

     

    하지만 나는 순간 층계 바깥쪽에 있던 소년의 팔을 끌어당기느라 타냐의 범위에서 빠져나갔다.

     

    소년을 먼저 타냐의 품으로 던진다.

     

    야만족들이 우리가 서 있던 지면으로 착지하고.

     

    ―쿠구궁!

     

    이어진 전투로 약해진 지반이 그들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했다.

     

    어, 내 발밑도 훅 꺼지는데.

     

    “아이 진짜.”

     

    타냐를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택도 없이 놓쳐버렸다.

     

    얼어붙어서 미끄러운 벽돌에 발이 미끄러진다.

     

    중력이 마음의 틈도 주지 않은 채 내 몸을 잡아당기고 시야가 훅 상승했다.

     

    나는 순식간에 깊은 절벽 아래로 기약도 없이 떨어졌다.

     

     

     

    ***

     

     

     

    “전하, 중앙 성채의 야만족을 모두 토벌하고 점령했습니다. 지하에 숨어있던 피난민도 발견했습니다.”

     

    “블뤼허 백작은?”

     

    “무사하다고 합니다.”

     

    단장이 전한 소식에 아셀라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 승기가 깃들었다. 토벌전의 공은 온전히 아셀라의 차지다.

     

    첫 출전에도 월광궁의 전장지배능력은 완벽했다.

     

    자신의 지휘력이 황제에게 크게 어필할 것은 틀림없었다.

     

    “피난민 구출을 완료하는 대로 남쪽 성채로 돌아가 헤이케 군과 합류하겠어.”

     

    “하달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왜?”

     

    기쁨도 잠시, 아셀라는 단장이 이어 전한 비보에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고트베르크 선생님께서….”

     

    아셀라는 기품을 챙길 새도 없이 성채를 향해 달려나갔다.

     

    “타냐 공!!”

     

    타냐를 발견한 아셀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주변의 모든 기사가 처음 보는 주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타냐는 이미 구조대를 편성해 절벽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하.”

     

    “공자가 행방불명이라니, 무슨 소리야!”

     

    타냐가 입을 꽉 다물었다.

    침묵으로 돌아온 대답에 담긴 의미를 아셀라는 충분히 예상했다.

     

    “타냐 공!!”

     

    절규하듯 내지른 아셀라의 외침이 산봉우리 사이로 메아리쳤다.

     

     

     

    ***

     

     

     

    “원, 또 죽는 줄 알았네.”

     

    나는 허리까지 눈에 파묻힌 몸을 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량화 축복을 빨리 걸어서 다행이었어.”

     

    층계가 무너지며 절벽 아래로 떨어진 순간, 나는 축복을 이용해 내 몸무게를 줄였다.

     

    떨어질 때의 충격량을 최대한 감소시키긴 했어도 부상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운 좋게 절벽 아래엔 눈이 몇 미터는 깔려있어서 푹신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돌아간담.”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하니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뾰족한 수가 없나 주변을 둘러보던 도중,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오.”

     

    새하얀 눈밭이라 눈에 띈다. 아까 먼저 떨어졌던 바위족 족장의 시체였다.

     

    그 근처에 떨어진 반짝이는 물건.

     

    전설급 아티팩트인 족장의 목걸이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하람_219님 팬아트와 후원 감사해요!
    타냐는 살짝 보랏빛이 도는 적발 단발에 쿨한 장신 슬렌더 누님 느낌입니다! 나이는 라스와 몇 살 차이가 안 나지만 훨씬 성숙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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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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