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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엘라는 늘 입던 붉은색 연미복을 찾았다.

       어제 새벽에 비를 맞고 쫄딱 젖기는 했지만, 호텔의 세탁 서비스를 받으면 한나절 만에 뽀송뽀송한 상태가 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혹시나 원더스타인 대신 사회자를 맡을 상황을 대비해서 그 옷이 필요했다.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고 의사와 약속하긴 했지만, 만약 필요한 상황이다 싶으면 그녀는 기꺼이 무대에 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계획은 바로 좌절되었다.

         

       “세탁을 끝내고 보니 부단장님의 제복에 실밥이 풀어진 곳이 많더군요. 솜씨 좋은 재단사에게 수선을 맡겼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토요일 오후에 받아가라고 하더군요.”

         

       노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실밥 좀 정리하는 데 며칠씩이나 걸릴 리 없었다.

         

       거기다 토요일 오후라니. 노골적이었다.

       적어도 이번 대회에는 무대에 오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녀가 외출을 허락받는 순간, 바로 세탁실에 연락해서 옷을 치워버린 게 분명했다.

         

       엘라는 어제부터 그에게 번번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나이에 비해 머리도 잘 돌아가고 눈치도 빠른 편이었지만, 한 가문을 수십 년 넘게 받쳐온 집사의 관록에는 미치지 못했다.

         

       집사 바텔은 아나이스의 명령을 받고 베르그송 저택을 떠나 어제 오후에 루즈에 도착했다.

       서커스단이 이번 주 동안 시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후방지원하러 온 것이다.

         

       원더스타인은 때맞춰 도착한 그에게 엘라를 부탁했다.

       아무래도 호텔 직원들은 입장 상 엘라에게 강하게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늙은 집사는 엘라의 수법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건강이 좋지 않으면서도 일하는 데는 몸을 아끼지 않는 젊은 아가씨는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상대였다.

         

       그는 엘라가 어젯밤에 몰래 공연장에 가려는 것을 예상하고 창문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뛰어난 용병이었던 그의 몸놀림은 곡예로 다져진 엘라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녀가 건강한 몸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아픈 상태에서 그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거기다 그는 그녀가 안정제를 혀 밑에 몰래 감춰뒀다 뱉은 것도 눈치챘다. 그는 대신 그녀의 야식에 몰래 약을 타두었다. 덕분에 엘라는 오늘 낮 내내 푹 잠들었고 인스피라를 이용해 공연을 본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하루가 거의 다 간 것을 안 그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서둘러 공연장으로 가겠다고 우긴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복까지 뺏기다니.

       몇 번이나 자신의 수작이 격퇴당하니 화나는 건 둘째치고 왠지 민망했다.

         

       사부님과 재주 겨루기를 할 때마다 느끼던 굴욕감을 오랜만에 맛봤다.

         

       그녀는 마차 안에서 뾰로통한 얼굴로 턱을 괴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집사는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엘라는 그런 집사를 흘겨봤다.

         

       “쳇, 어린애한테 이기니 재밌어요?”

       “허허, 제 웃음을 오해하셨군요. 아닙니다. 그냥 아나이스 주인님의 어릴 적이 떠올라서요. 조금만 침착하게 계세요. 공연을 보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을 테니.”

       “그냥 걱정돼서 그래요.”

       “원더스타인 단장님을 못 믿으십니까?”

         

       그의 말에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를 못 믿는다?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믿을 사람이 따로 있지.

         

       그러나 차마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미우나 고우나 그는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서커스단의 단장이었다.

       외부인에게 콩가루 집안처럼 보이기는 싫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왜 그렇게 초조해하십니까?”

       “왠지 제가 직접 안 하면 걱정돼서…….”

         

       집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 양이 똑똑하고 재주 많은 건 압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을 좀 더 믿고 의지해보세요. 저희 주인님도 처음 회장직을 맡았을 때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덤볐습니다. 하지만 피에르 님 덕분에…….”

         

       집사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적절치 못한 예시였다.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결국 배신자로 드러났으니.

         

       “어쨌든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라면 맡기고 자리를 지키는 것도 덕목 중 하나입니다.”

       “알았어요. 얌전히 기다릴게요. 착한 아이처럼. 됐나요?”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좌석에 등을 기댔다.

       집사 할아버지의 말이 맞긴 했다.

       앞으로 2년은 더 남았는데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가 나서서 모든 걸 다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기다리는 것도 중요했다.

         

       “그건 그렇고 자작님은 안 오시나요?”

       “마지막 날에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분도 상당히 바쁘시네요.”

       “사실 그동안 게으름을 피우고 계셨던 거죠.”

         

       아나이스는 대상회의 주인이었다.

       가뜩이나 실무를 맡던 피에르가 사라지고 상회 내부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느긋하게 유람선을 타고 이동하거나 호텔에서 휴양하고 있던 상황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상회 내외부에서 마술사가 자작을 홀렸다는 소문이 설득력을 얻은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카바레에 도착한 엘라는 바로 3번 홀로 달려갔다.

       이제 막 공연이 끝난 참인지 관객들이 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등에 식은땀이 쫙 났다.

       혹시나 실망한, 분노한, 비웃는 그런 표정을 발견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다행히 사람들의 얼굴은 지쳐 보일망정 화난 기색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중간에 나가지 않고 쇼를 끝까지 봤다는 것 자체가 공연이 성공적이었다는 증거였다.

       스쳐 지나가는 말들이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대단하더라.”

       “연기도 잘하고.”

       “연기? 다 가짜였단 말이야?”

       “이 자식은 우리와 같은 쇼를 본 게 맞아?. 배우들은 진짜고. 사람 잡아먹고 찢는 건 연기라는 거지.”

       “마지막에 모두가 나와서 인사하는 거 봤잖아.”

         

       엘라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관객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서커스 단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평도 좋았다.

         

       “소름 돋는군.”

       “괴물 서커스……. 우습게 볼 게 아니야.”

       “단순한 인간 전시회인 줄 알았는데.”

       “훌륭하게 엔터테인먼트로 승화시켰어.”

         

       덕분에 스텝 석으로 향하는 엘라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아는 장미 풍차 직원들이 인사했지만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지금 다른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동료들.

       그들이 보고 싶었다.

         

       집사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3번 홀의 연습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들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입구에 뻗어 있던 랫맨들이었다.

         

       “부단장?”

       “부단장! 왔다!”

         

       랫맨들이 찍찍대는 소리를 듣고 단원들이 고개를 돌렸다.

         

       “뭐?”

       “엘라가 왔다고?

         

       집사는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다들 무시무시한 괴물 분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야 엘라.”

       “네가 왜 여기 있어?”

       “몸이 다 나은 겁니까?”

         

       엘라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단원들을 둘러보며 괜찮다는 표시를 해보였다.

         

       “그것보다 여러분들은 어때요? 공연은 잘 했나요?”

         

       그녀는 소파에 앉아 단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서로의 연기가 어땠는지,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돌아가며 떠들어댔다.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엘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연습한 대로 잘한 것 같았다.

       사회자를 맡은 원더스타인 역시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광대 분장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수였다.

         

       그때, 엘라는 그들 중 누군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더스타인.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어디 갔어?”

       “그 사람? 아, 단장님이요. 저기 뒤편 휴게실에 혼자 계세요.”

       “왜?”

         

       우몬이 난처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자기가 있으면 단원들이 편하게 쉬지 못한다고.”

       “아…….”

         

       엘라의 안색이 굳어졌다.

         

       집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윗사람이 아랫사람들 틈에 있으면 자리가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엘라는 원더스타인이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단원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무대에 올랐지만, 원래 그는 엘라에게 일을 맡기고 단원들에게서는 떨어져 있는 게 보통이었다.

         

       평소라면 그녀도 그런 그의 행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에도 그가 그러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소란스러움이 조금 가라앉자 구석에 스케치북을 쥐고 쪼그리고 앉아 있던 마야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단장.”

       “앗, 마야! 너는 어땠어? 환상에 실수는 없었어? 아, 그리고 기획한 그 상품은 어떻게 됐어? 많이 팔렸어? 사람들 반응은 괜찮았고?”

         

       마야는 엘라가 자신의 어깨를 붙들고 흔드는 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감내했다.

       짜증스러움에 손을 쳐내고 싶었지만 아픈 사람에게 모질게 굴 수는 없었다.

         

       “다 잘 됐어. 상품도 잘 팔렸어.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아, 그래? 다행이다!”

         

       엘라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짓자 마야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네 몸 걱정이나 해. 이 바보.”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휙 돌아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들여다보며 하던 일에 다시 집중했다.

         

       엘라는 겸연쩍은 듯 뺨을 긁적였다.

       무감정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걱정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자, 그러고 보니 엘라 양도 왔겠다. 축하주를 듭시다!”

         

       난쟁이 요벨의 말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지.”

       “우리의 첫 공연이잖아.”

       “내일 공연도 있으니 딱 한 잔씩만 마시죠.”

         

       집사는 주방으로 가려는 단원들을 제지했다.

       그가 루즈에 온 것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쉬고 계십시오. 제가 간단히 곁들일 안주까지 준비해오겠습니다.”

         

       그가 떠나자 연습실은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거기에는 유라크네의 흉내를 내는 스벤의 연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호호호, 반가워요. 맛있어 보이는 인간 여러분.”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심지어 구석에서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던 마야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당사자인 유라크네만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고개를 파묻었다.

         

       “우으으, 그, 그만 하세요…….”

       “핫핫, 부단장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요. 그 다음 대사는 뭐였더라…….”

       “그, 그만 하시라니까요!”

       “크하하, 왜 그래, 유라 씨? 그만큼 호연이었다는 거잖아.”

       “맞아, 맞아. 오늘 그 ‘상품’도 유라 씨가 제일 많이 팔렸을걸?”

         

       단원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와중에 엘라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텅 빈 곳을 바라봤다.

         

       연습실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의자.

       단장인 원더스타인의 자리였다.

       그곳이 비어있었다.

         

       그는 이런 날에도 자리를 피했다.

       단원들이 불편해할까 봐.

         

       사실 얼굴을 마주하는 게 가능해진 지금도 마야를 제외하고는 그를 편하다고 느끼는 단원은 없었다.

       유라크네는 연정으로, 스벤은 농담으로, 엘라는 미움으로 그것을 극복했지만, 그가 진짜로 마음 놓고 편히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냥 편하게 다가가기에는 지금까지 그가 저지른 짓이 있는 것이다. 도통 알 수 없는 그의 목적과 속내도 그렇고…….

         

       솔직히 그가 없는 편이 분위기가 좋았다.

       엘라도 그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함께 무대 위에 올라가 공연을 치르고, 그것도 아픈 동료의 자리를 메꿔주기까지 했는데도 따돌림이라니.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은 아니었다.

         

       “어……나, 잠시만…….”

         

       그녀는 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원더스타인이 있는 휴게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도로시 님, 1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꾸준히 응원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마음을 다잡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몇 화 안에 루즈 편이 끝납니다.
    어제는 마무리에 대해 고민한다고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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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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