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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이건…일기인가?”

       

       단순한 호기심. 가벼운 마음으로 엘리는 요나가 품고 있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

       

       짜악!

       

       “세워. 너 같은 다리 병신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잖아.”

       

       술에 취해 그리 말하는 그녀의 입가는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허나 그 멸시가 향하는 곳은 그녀의 앉은뱅이 연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향한 조소였으니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진실은 곪고 짓무른 상처가 되어 그녀를 망가뜨렸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폭력이라는 형태를 입어 태어난다. 그녀가 때린 것은 분명 그의 뺨이었지만, 이는 자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기에.

       

       잠시 자신의 뺨을 부여잡은 그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는 그녀가 홉 고블린 부락에서 겪은 일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이 겪었던 일은 안다.

       

       썩은 양파를 연상시키는 체취. 추잡한 욕망이 드러나는 얼굴. 노골적인 손길. 약에 취했다고는 하나 그의 몸은 이에 반응했고, 때로는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 아양을 떤 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가 미웠다.

       

       홉 고블린 따위에게 더럽혀진 자신이 밉고, 멋대로 개발되어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몸뚱이가 밉고, 그렇게 수치를 뒤집어쓰고도 앉은뱅이가 되어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미웠다.

       

       그렇기에 그녀의 폭력은 그에게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다.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중이었다.

       

       ***

       

       “…….”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은 엘리.

       

       순식간에 마지막 한 장까지 훑어내린 엘리는 술이 확 깨다 못해, 창백해진 안색으로 종이를 돌려놓았다.

       

       지독한 이야기였다.

       

       분명 야설의 형태를 띠고 있고, 성애 장면은 과격할지언정 살짝 흥분될 정도로 야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안락한 수렁. 제 손으로 파멸을 택하는 어리석음. 일그러진 소유욕. 망가지는 관계. 피폐해져가는 몸과 마음. 뒤늦은 후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눌어붙은 타르처럼 끈적한 집착.

       

       사랑의 여신의 영향으로 온갖 종류의 성애가 허용되는 세상이다. 단순히 수위만 보자면 이보다 더한 것들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겠지.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불문율이 있다. 사랑의 여신의 계율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가 합의한 관계만을 그린다는 것.

       

       그러한 관점에서 요나의 글은 어떠한가.

       

       ‘아슬아슬해.’

       

       어느 한쪽이 강제로 당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건전한 관계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분노와 짜증을 폭력으로서 풀어냈고, 남자는 이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전부 받아준다.

       

       결국 자괴감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눈앞에서 목을 매는 그 순간까지. 남자는 결코 여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건 모난 인간들이 만났는데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인…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그런 이야기다. 

       

       동시에 명백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요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너무 어둡고, 찝찝하지만 어쨌든 마지막엔 자살에 실패한 여주와 남주가 오해를 풀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글 자체는 훌륭했다. 적어도 처음 쓴 사람의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시중에 판매되는 야설의 70퍼센트 이상을 읽어본 미친 야설 중독자 엘리의 눈으로 본 것이니 확실하다.

       

       다만, 엘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글의 분위기나, 미성년자가 쓴 야설이라거나, 과격한 플레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황혼을 삼키는 자가 홉 고블린으로 바뀌고, 두 캐릭터가 과장되게 일그러진 관계긴 하지만….

       

       구도 자체는 엘리와 요나의 이야기를 쏙 닮았다는 점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에 박힌 것이지.

       

       ‘설마 요나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건가? …아냐. 주인공은 여주 하나만이 아니지.’

       

       엘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요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외출한 이후로 쉬지 않고 쓴 탓인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주가 아니라 남주.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투영…?’

       

       작중의 남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그에게 자기 자신은 홉 고블린에게 더럽혀진 더럽고, 쓸모없는 앉은뱅이였으니까.

       

       그리고 요나가 황혼을 삼키는 자의 실험체였을 무렵. 무슨 짓을 당했는지 엘리는 안다.

       

       최근에는 리디아로부터 요나가 어쩌면 상당한 고위 귀족 태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들은 것도 있고.

       

       아예 무지렁이 같은 판 그레이브의 고아였다면, 먹고 살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거나 몸을 파는 그런 밑바닥 인생이었다면 차라리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나가 만약 고귀한 피를 타고났다면. 그에 걸맞는 교육을 받고, 그에 걸맞는 정조 관념을 지녔었다면.

       

       그랬다면 실험체로 지낼 때의 기억은 분명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였으리라.

       

       ‘평소의 그 발랑까진 모습도….’

       

       자포자기해서 몸을 막 굴리는 사람 같은 건 판 그레이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이다.

       

       당장 엘리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처음 고용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느낌이지 않았나.

       

       쿵!

       

       순간 심장 위에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

       

       직접 사정을 들은 것은 아니나, 지금껏 나름 요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엘리였던 터라 더욱 충격이 컸다.

       

       “하아….”

       

       딱히 상처가 아려오는 것도 아니건만, 마력초 담배가 절실한 엘리.

       

       그녀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요나를 내려다보았다.

       

       비단결처럼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남자아이가 사내로 거듭나는 과정의 중간쯤 되는 꽃봉오리 같은 분위기.

       

       무방비하게 드러난 볼따구는 오늘따라 왜 이리 촉촉해 보이는지….

       

       평소라면 잠깐이나마 음심이 동했을 엘리.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요나가 이 이야기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심한 수준은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이러한 어둠이 마음속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은 눈부시기까지 하다.

       

       “아.”

       

       그제야 엘리는 깨달았다. 왜 천 년간 침묵하던 사랑의 여신이 요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어쩌면 성자일 수도 있다는 카렌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낮의 촛불은 큰 가치가 없지만,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의 촛불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요나 또한 그러하다.

       

       절망 앞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어두운 현실 앞에서 용기를 부르짖던 엘리였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

       

       엘리가 조심스레 자고있는 요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애정. 죄책감. 감탄. 그리고 연민이 뒤섞여 떨리는 손.

       

       스윽 스윽.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고, 손끝에 걸리는 귀의 감촉에 절로 엘리의 몸이 떨려온다. 그리고.

       

       “으음….”

       

       잠꼬대하듯 엎드린 머리를 비비적대는 요나.

        

       그 고양이 같은 모습에 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휴. 잘 거면 침대에서 자지 궁상맞게 책상에 엎드려서는.”

       

       그리 말하며 잠든 요나를 번쩍 들어 끌어안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요나의 존재감. 확 풍겨오는 좋은 향기. 어려도 남자는 남자인지 묘하게 탄탄한 골격과 근육.

       

       하나하나가 엘리를 자극하는 요소였지만, 결국 그녀가 요나를 덮치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성욕보다 다른 감정이 더 우선시되고 있기도 하고…뭣보다 엘리에게는 그냥 그럴 배짱이 없다.

       

       쫄보지만 사람은 착한 엘리가 요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째서인지 이불 안쪽에 대량의 건조 마력초가 숨겨져 있었지만…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 듯하여 옆으로 슬쩍 치운다.

       

       그리고는 요나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려다가 차마 그런 남사스러운 짓은 하지 못하고 그냥 이마끼리 맞대는 엘리.

       

       그렇게 한참을 잠든 요나와 이마를 맞대던 엘리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젠 괜찮아. 괜찮을 거야.”

       

       왜냐면 엘리 자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엘리가 방의 조명을 끄고는 조심스레 문밖으로 빠져나가 완전히 문을 닫기 전. 작은 틈새에 대고 속삭였다.

       

       “잘자.”

       

       그렇게 요나가 기대하고 또 기대하던 면간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유니콘 단검만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을 뿐.

       

       ***

       

       “그에에에엑!”

       

       전신에서 느껴지는 묘한 뻐근함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뭐 하다 잤더라….”

       

       기억이 조금 불분명해 집중해서 되짚어 보았다. 분명 글을 쓰다가…쓰다가….

       

       “아, 그대로 잠들었구먼?”

       

       어찌어찌 본능적으로 침대를 찾아 드러누운 건가. 밤새워서 글 쓰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 잘 안다.

       

       몸은 피곤하지만, 오랜만에 뭔가 끼적인 덕분일까. 머리는 참 상쾌하단 말이지.

       

       “흠흐밍~”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어두운 창밖. 이제 보니 아예 하루를 통째로 잠들고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깨어났나 보다.

       

       이제보니 그냥 너무 오래 자서 몸이 뻐근했던 건가 보다.

       

       …하긴.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 한번쯤 피로가 터질 때가 되긴 했다. 그게 오늘이었던 건가.

       

       어차피 1층도 클리어했고, 교황의 대응을 살필 겸 며칠은 몸을 사리기로 했으니 상관없지만.

       

       오늘도 손님이 잔뜩 온 건지 소란스러운 1층. 그 시끌벅적함을 즐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어제와 달리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엘리가 있었다.

       

       거친 인사의 잿빛 머리카락. 쫑긋 솟은 늑대 귀. 텅 빈 오른쪽 소매를 펄럭이며 사나운 미소를 지은 엘리가 한 손을 수상쩍게 흔들고 있었다.

       

       

       

       

       

       

       

       “일어났냐? 너무 늦어서 방에서 남몰래 은밀한 시간이라도 보내는 줄 알았지.”

       

       마치 일전의 NTR플레이…아니, 사건? 아무튼 그 일은 정리가 끝난 건지 평소의 장난스러운 텐션.

       

       이에 호응해 나 또한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에이. 엘리는 처녀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남자는 여자랑 달리 횟수 제한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렇게 오래는 못해요.”

       

       “…에. 진짜? 하지만 책에서는.”

       

       “그건 창작물이니까 그런 거죠. 어차피 일은 대부분 웨이터 형님들 시켜서 안 바쁘죠? 이리 와봐요. 제가 엘리를 위해 성교육을 좀 해줄 테니까.”

       

       키득이며 카운터 안쪽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어버버 거리면서 물러나는 엘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지금 같은 일상이 참 좋단 말이지. 한동안 오늘 같은 날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행복해졌다.

       

       

       

       쿠웅!

       

       

       

       카운터 위에 폴짝 뛰어올라 이쪽을 내려다보는 보라색 머리 꼬맹이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랬었다.

       

       “야. 네가 리디아가 말한 그 짐꾼 꼬마냐?”

       

       “…너도 꼬마면서 왜 반말이냐?”

       

       유교 스위치 ON!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엘리 일러스트!!! 끼에에에엥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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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EP.87





       “이건…일기인가?”


       


       단순한 호기심. 가벼운 마음으로 엘리는 요나가 품고 있던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


       


       짜악!


       


       “세워. 너 같은 다리 병신 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잖아.”


       


       술에 취해 그리 말하는 그녀의 입가는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허나 그 멸시가 향하는 곳은 그녀의 앉은뱅이 연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향한 조소였으니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할 진실은 곪고 짓무른 상처가 되어 그녀를 망가뜨렸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폭력이라는 형태를 입어 태어난다. 그녀가 때린 것은 분명 그의 뺨이었지만, 이는 자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여전히 그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기에.


       


       잠시 자신의 뺨을 부여잡은 그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는 그녀가 홉 고블린 부락에서 겪은 일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이 겪었던 일은 안다.


       


       썩은 양파를 연상시키는 체취. 추잡한 욕망이 드러나는 얼굴. 노골적인 손길. 약에 취했다고는 하나 그의 몸은 이에 반응했고, 때로는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 아양을 떤 적도 있다.


       


       그는 스스로가 미웠다.


       


       홉 고블린 따위에게 더럽혀진 자신이 밉고, 멋대로 개발되어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하는 몸뚱이가 밉고, 그렇게 수치를 뒤집어쓰고도 앉은뱅이가 되어 제 발로 걷지도 못하는 신세가 미웠다.


       


       그렇기에 그녀의 폭력은 그에게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다. 잘못을 하면 벌을 받는다.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중이었다.


       


       ***


       


       “…….”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은 엘리.


       


       순식간에 마지막 한 장까지 훑어내린 엘리는 술이 확 깨다 못해, 창백해진 안색으로 종이를 돌려놓았다.


       


       지독한 이야기였다.


       


       분명 야설의 형태를 띠고 있고, 성애 장면은 과격할지언정 살짝 흥분될 정도로 야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안락한 수렁. 제 손으로 파멸을 택하는 어리석음. 일그러진 소유욕. 망가지는 관계. 피폐해져가는 몸과 마음. 뒤늦은 후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눌어붙은 타르처럼 끈적한 집착.


       


       사랑의 여신의 영향으로 온갖 종류의 성애가 허용되는 세상이다. 단순히 수위만 보자면 이보다 더한 것들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겠지.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불문율이 있다. 사랑의 여신의 계율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가 합의한 관계만을 그린다는 것.


       


       그러한 관점에서 요나의 글은 어떠한가.


       


       ‘아슬아슬해.’


       


       어느 한쪽이 강제로 당하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건전한 관계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분노와 짜증을 폭력으로서 풀어냈고, 남자는 이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전부 받아준다.


       


       결국 자괴감을 이기지 못한 여자가 눈앞에서 목을 매는 그 순간까지. 남자는 결코 여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이건 모난 인간들이 만났는데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인…서로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그런 이야기다. 


       


       동시에 명백한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요나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너무 어둡고, 찝찝하지만 어쨌든 마지막엔 자살에 실패한 여주와 남주가 오해를 풀고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글 자체는 훌륭했다. 적어도 처음 쓴 사람의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시중에 판매되는 야설의 70퍼센트 이상을 읽어본 미친 야설 중독자 엘리의 눈으로 본 것이니 확실하다.


       


       다만, 엘리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글의 분위기나, 미성년자가 쓴 야설이라거나, 과격한 플레이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황혼을 삼키는 자가 홉 고블린으로 바뀌고, 두 캐릭터가 과장되게 일그러진 관계긴 하지만….


       


       구도 자체는 엘리와 요나의 이야기를 쏙 닮았다는 점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마음에 박힌 것이지.


       


       ‘설마 요나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건가? …아냐. 주인공은 여주 하나만이 아니지.’


       


       엘리가 복잡한 표정으로 요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외출한 이후로 쉬지 않고 쓴 탓인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주가 아니라 남주. 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투영…?’


       


       작중의 남주는 마지막 순간까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그에게 자기 자신은 홉 고블린에게 더럽혀진 더럽고, 쓸모없는 앉은뱅이였으니까.


       


       그리고 요나가 황혼을 삼키는 자의 실험체였을 무렵. 무슨 짓을 당했는지 엘리는 안다.


       


       최근에는 리디아로부터 요나가 어쩌면 상당한 고위 귀족 태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들은 것도 있고.


       


       아예 무지렁이 같은 판 그레이브의 고아였다면, 먹고 살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거나 몸을 파는 그런 밑바닥 인생이었다면 차라리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나가 만약 고귀한 피를 타고났다면. 그에 걸맞는 교육을 받고, 그에 걸맞는 정조 관념을 지녔었다면.


       


       그랬다면 실험체로 지낼 때의 기억은 분명 어마어마한 트라우마였으리라.


       


       ‘평소의 그 발랑까진 모습도….’


       


       자포자기해서 몸을 막 굴리는 사람 같은 건 판 그레이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군상이다.


       


       당장 엘리의 가게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처음 고용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느낌이지 않았나.


       


       쿵!


       


       순간 심장 위에 무거운 돌이 떨어지는 듯한 감각.


       


       직접 사정을 들은 것은 아니나, 지금껏 나름 요나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한 엘리였던 터라 더욱 충격이 컸다.


       


       “하아….”


       


       딱히 상처가 아려오는 것도 아니건만, 마력초 담배가 절실한 엘리.


       


       그녀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요나를 내려다보았다.


       


       비단결처럼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분홍색 머리카락. 남자아이가 사내로 거듭나는 과정의 중간쯤 되는 꽃봉오리 같은 분위기.


       


       무방비하게 드러난 볼따구는 오늘따라 왜 이리 촉촉해 보이는지….


       


       평소라면 잠깐이나마 음심이 동했을 엘리. 하지만 지금은. 지금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어쩌면 요나가 이 이야기처럼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 심한 수준은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이러한 어둠이 마음속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은 눈부시기까지 하다.


       


       “아.”


       


       그제야 엘리는 깨달았다. 왜 천 년간 침묵하던 사랑의 여신이 요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어쩌면 성자일 수도 있다는 카렌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낮의 촛불은 큰 가치가 없지만,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의 촛불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요나 또한 그러하다.


       


       절망 앞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어두운 현실 앞에서 용기를 부르짖던 엘리였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


       


       엘리가 조심스레 자고있는 요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애정. 죄책감. 감탄. 그리고 연민이 뒤섞여 떨리는 손.


       


       스윽 스윽.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고, 손끝에 걸리는 귀의 감촉에 절로 엘리의 몸이 떨려온다. 그리고.


       


       “으음….”


       


       잠꼬대하듯 엎드린 머리를 비비적대는 요나.


        


       그 고양이 같은 모습에 엘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에휴. 잘 거면 침대에서 자지 궁상맞게 책상에 엎드려서는.”


       


       그리 말하며 잠든 요나를 번쩍 들어 끌어안았다.


       


       품에서 느껴지는 요나의 존재감. 확 풍겨오는 좋은 향기. 어려도 남자는 남자인지 묘하게 탄탄한 골격과 근육.


       


       하나하나가 엘리를 자극하는 요소였지만, 결국 그녀가 요나를 덮치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성욕보다 다른 감정이 더 우선시되고 있기도 하고…뭣보다 엘리에게는 그냥 그럴 배짱이 없다.


       


       쫄보지만 사람은 착한 엘리가 요나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어째서인지 이불 안쪽에 대량의 건조 마력초가 숨겨져 있었지만…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 듯하여 옆으로 슬쩍 치운다.


       


       그리고는 요나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가……려다가 차마 그런 남사스러운 짓은 하지 못하고 그냥 이마끼리 맞대는 엘리.


       


       그렇게 한참을 잠든 요나와 이마를 맞대던 엘리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젠 괜찮아. 괜찮을 거야.”


       


       왜냐면 엘리 자신이 그렇게 만들 테니까.


       


       희미한 미소를 지은 엘리가 방의 조명을 끄고는 조심스레 문밖으로 빠져나가 완전히 문을 닫기 전. 작은 틈새에 대고 속삭였다.


       


       “잘자.”


       


       그렇게 요나가 기대하고 또 기대하던 면간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유니콘 단검만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을 뿐.


       


       ***


       


       “그에에에엑!”


       


       전신에서 느껴지는 묘한 뻐근함에 눈을 떠보니, 어느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뭐 하다 잤더라….”


       


       기억이 조금 불분명해 집중해서 되짚어 보았다. 분명 글을 쓰다가…쓰다가….


       


       “아, 그대로 잠들었구먼?”


       


       어찌어찌 본능적으로 침대를 찾아 드러누운 건가. 밤새워서 글 쓰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라 잘 안다.


       


       몸은 피곤하지만, 오랜만에 뭔가 끼적인 덕분일까. 머리는 참 상쾌하단 말이지.


       


       “흠흐밍~”


       


       절로 흘러나오는 콧노래를 부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어두운 창밖. 이제 보니 아예 하루를 통째로 잠들고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간신히 깨어났나 보다.


       


       이제보니 그냥 너무 오래 자서 몸이 뻐근했던 건가 보다.


       


       …하긴. 요즘 이런저런 일이 많아 한번쯤 피로가 터질 때가 되긴 했다. 그게 오늘이었던 건가.


       


       어차피 1층도 클리어했고, 교황의 대응을 살필 겸 며칠은 몸을 사리기로 했으니 상관없지만.


       


       오늘도 손님이 잔뜩 온 건지 소란스러운 1층. 그 시끌벅적함을 즐기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곳에는 어제와 달리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엘리가 있었다.


       


       거친 인사의 잿빛 머리카락. 쫑긋 솟은 늑대 귀. 텅 빈 오른쪽 소매를 펄럭이며 사나운 미소를 지은 엘리가 한 손을 수상쩍게 흔들고 있었다.


       


       


       


       


       


       


       


       “일어났냐? 너무 늦어서 방에서 남몰래 은밀한 시간이라도 보내는 줄 알았지.”


       


       마치 일전의 NTR플레이…아니, 사건? 아무튼 그 일은 정리가 끝난 건지 평소의 장난스러운 텐션.


       


       이에 호응해 나 또한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에이. 엘리는 처녀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남자는 여자랑 달리 횟수 제한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렇게 오래는 못해요.”


       


       “…에. 진짜? 하지만 책에서는.”


       


       “그건 창작물이니까 그런 거죠. 어차피 일은 대부분 웨이터 형님들 시켜서 안 바쁘죠? 이리 와봐요. 제가 엘리를 위해 성교육을 좀 해줄 테니까.”


       


       키득이며 카운터 안쪽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어버버 거리면서 물러나는 엘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지금 같은 일상이 참 좋단 말이지. 한동안 오늘 같은 날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니 조금 행복해졌다.


       


       


       


       쿠웅!


       


       


       


       카운터 위에 폴짝 뛰어올라 이쪽을 내려다보는 보라색 머리 꼬맹이를 발견하기까지는 그랬었다.


       


       “야. 네가 리디아가 말한 그 짐꾼 꼬마냐?”


       


       “…너도 꼬마면서 왜 반말이냐?”


       


       유교 스위치 ON!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엘리 일러스트!!! 끼에에에엥ㄱ!!!!!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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