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억 –
“신분을 밝혀라.”
백작가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에 기사와 병사들이 나를 막아섰다.
영감님들이랑 다닐 때는 이런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분 모셔오는 건데….
“클로셀 영감님의 소개로 왔어요. 저는 크리스고…”
몸을 돌려 등을 살짝 내밀었다.
“얘는 성녀에요.”
“꺄르륵!”
“….”
“….”
갑자기 싸한 정적이 흘렀다.
“끌어내라.”
“예!”
“….?”
끌어내?
나를?
“아, 맞네.”
생각해 보니, 클로셀 영감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성녀라는 이름 역시 대단했고 말이다.
웬 평민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름을 들먹인다고 믿어 주기에는 너무 큰 이름이라는 소리다.
“건들지 마요! 루나 건들면…”
“음?”
“바로 성전이 일어나요.”
“끌어내라!”
정말로 영감들 중에 한 명을 데리고 왔어야 했다.
하다못해 알루어드라도 말이다.
어제까지 못 들어가던 곳이 없다 보니 이런 경우는 상상도 못 했다.
“란돌프경 없어요?”
“감히, 평민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구나!”
“아 건들지 말라니까요? 나 건들면 동티난다니까!”
괜히 몸주신의 미움을 사서 재수가 안 좋아질 수도 있었다.
나와의 실랑이로 소란스러워지자 문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열리는 작은 문.
“무슨 소란이냐?”
“란돌프경!”
다행히도 아는 얼굴이었다.
“….”
“영감님 소개로 영지대장간에 가야 하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란돌프경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예를 취해 왔다.
“모시겠습니다.”
“….?”
원래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이랬던가?
내 표정을 읽은 듯 란돌프경이 답을 해 왔다.
“곧 귀족의 작위를 받으실 분이다. 모두 예를 갖추도록.”
“허…헙! 실례많았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참나.”
받지도 않을 작위가 이렇게 효과가 좋은 것이었다니.
새삼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평소대로 하셔도 돼요. 어차피 작위는 못 받을 테니까.”
“….”
자작과 일어난 일을 모두 목격했던 란돌프 경이다.
이내 수긍을 했는지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작위를 받지 않아도 이미 그대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소.”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군. 따라오시오.”
또 나를 두고 뭔가 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보였다.
주변에서 일이 한두 가지가 일어나야 신경을 쓰지….
란돌프 경을 따라가다 보니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까앙 –
까앙 –
후끈한 열기도 함께 느껴졌다.
불이 뜨거운 게 아니라, 안에 있는 기운들이 뜨거웠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도 말이다.
“사주가 아주 불 천지네.”
누가 대장장이 아니랄까 봐 불이 정말로 많았다.
사주는 보통 오행을 기반으로 한다.
화, 수, 목, 금, 토를 기반으로 기운의 조화를 보는 것이다.
각각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을 따라 성격이나 삶을 가늠해 보는 것.
보통 사주에 화가 많으면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 많다.
정열적이고 화끈하다고 해야 할까.
“이곳이오, 작업 중에는 그들을 방해할 수가 없소.”
종족이 하나 같이 장인이라고 했다.
클로셀 영감도 작업 중에는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했다.
“들었어요.”
수많은 대장장이들 안쪽으로 다른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 저곳에 드워프가 있을 것이다.
벌써 새어 나오는 느낌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다 비슷한 사주를 가지고 있구나…”
작업을 하는 대장장이들의 느낌이 하나 같이 비슷했다.
화, 금, 토의 기운을 강하게 가진 이들.
완고하고 고집스러우며 불같은 사람들.
대장장이 그 자체였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어르신이 냅다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혼을 실으란 말이다!”
“…옙!”
까앙 –
“네놈들의 망치질 하나하나에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
까앙 –
“동작 한 번에도 집중이 흐트러 지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온몸이 딱딱한 근육으로 들어찬 영감이 젊은 사람이 만들던 쇳덩이를 집게로 들어 올렸다.
“형편없군. 이래서야 병사들이 제대로 몸을 보호할 수도 없겠어.”
콰앙 –
영감의 망치질 한 번에 부서져 버리는 시뻘건 갑옷.
아직 식지도 않은 쇠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타는 소리를 만들어 냈다.
“다시!”
까앙 –
“이놈아! 혼을 불어 넣으래도? 옳지! 그렇지!”
드디어 영감의 마음에 드는 동작이 나오는 듯, 칭찬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전혀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혼이 안 들어가는데…?”
찌릿 –
영감의 날카로운 눈이 나에게로 향했지만, 어쩌란 말인가.
진짜로 혼이 안실리는데.
“네놈은 누구냐?”
“어…음…”
아까처럼 소개를 했다가는 또 믿지 않을 것이다.
잠시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에 영감의 속사포 같은 말들이 터져 나왔다.
“장인의 혼은 일반인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망치도 안 잡아본 것 같은 놈이 무얼 안다고…쯧쯧.”
망치를 안 잡아 본 것도 맞고 대장간일을 모르는 것도 맞다.
하지만.
“제가 영혼을 볼 수 있는데, 진짜로 혼이 안 들어갔어요.”
“….”
“…..”
곧이어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큭! 요즘 그런 소문이 돌기는 했지.”
“뭐, 영혼을 보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더군. 북부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었나?”
내 소문이 어느새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기에서도 점을 봐주고 다닌지 한참이나 흘렀으니 말이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법도 했다.
“영웅이 등장하니, 역시나 따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군.”
“그러게나 말일세.”
“머리가 새하얗다지?”
힐끔 –
“등에 아이를 업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네.”
“그 아기가 성녀라지 뭔가?”
힐끔 –
웃음을 터뜨렸던 대장장이들이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작업을 하고 있던 대장장이들도.
“머리가 하얗고…영혼을 보고…아이를…?”
“푸,푸른색의 방울을 들고 다닌다는 소리도 있었네.”
힐끔 –
아까보다 많아진 시선이 내 허리춤으로 향했다.
“….”
“…”
“이 사람들아, 북부에 있을 사람이 여기에 왜 있다는 말인가?”
넉살 좋은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럼 그렇지.”
“난 또 진짜인가 싶었네.”
“란돌프경이 함께 계서서 진짜인 줄 알았지 뭔가?”
그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정적.
“….”
“….”
란돌프경이 입을 열었다.
“그분이 맞다.”
“허억…!”
“헙!”
경악의 반응들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망치를 들고 달려와 나를 훑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내 소문이 도대체 어떻게 났길래 이런 반응일까?
“어,언데드도 무서워할만큼 흉측하게 생겼다고…”
“분명히 목소리가 번개처럼 우렁차다 그랬는데? 온 성에 목소리가 울렸다고…”
“…예?”
뭔가 소문이 잘못되도 한참이나 잘못되어 있었다.
멀쩡한 사람한테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순간, 안쪽에 있던 건물에서 부서질듯 문이 열렸다.
콰앙 –
“영혼을 보는 놈이 왔다고?”
“그런 놈이 있어?”
“에고소드 만들기 딱이구만!”
덥수룩한 수염.
내 명치까지 올 만한 키.
다부지고 단단한 근육들.
소문으로만 듣던 드워프들이었다.
우르르 –
“이놈이 그 영혼을 본다는 놈인가?”
“몸은 형편이 없군.”
“같이 망치질은 못 하겠어.”
드워프 다섯 명이 내 주위를 둘러싸고 품평을 하고 있었다.
“드디어 에고소드의 비밀을 밝히나 했더니…”
그중에서도 유난히 다부진 인상을 가진 드워프가 나를 또렷이 보고 있었다.
“클로셀이 말한 인간이 네놈이냐?”
“맞아요.”
“만들어야 할 것이 있다고 들었다.”
연락해놓겠다더니, 역시나 벌써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드워프가 흥분한 기색으로 나에게 물어왔다.
“네크로맨서 놈들을 혼내줬다지? 무엇을 만들어 주면 되겠느냐?”
정말 눈빛이 뜨거운 종족이었다.
“언데드를 물리칠 검? 창이 필요한가?”
“아,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마법을 막을 갑옷? 훌륭한 방어 마법을 인챈트 해 주겠다. 성검을 담을 검집은 필요 없나?얼른 말해 보거라.”
무언가 굉장한 물건들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만들 물건이 저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뻘쭘하게 입을 열었다.
“밥 그릇이랑, 국 그릇이랑… 숟가락?”
“….”
“….”
드워프 들의 수다가 뚝 멎었다.
괜스레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물씬 올라왔다.
그러게 사람 민망하게 왜 저런 거 부터 말해가지고….
“혹시, 네크로맨서의 피를 담을 그릇인가?”
“소문대로 무서운 인간이군. 숟가락으로 눈을 파버릴 것이 분명해.”
도대체 내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걸까.
나는 다시 한번 기대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다.
“상 차릴건데요…”
“….”
“…”
드워프들이 서로 미묘한 눈빛을 교환했다.
나는 더 뻘쭘해졌고 말이다.
어쨌든 드워프의 첫인상은 굉장히 특이했다.
오행의 기운들이 제멋대로인 종족.
화, 금, 토를 제외한 수, 목의 기운들이 없다시피 할 만큼 희미했다.
그래도 생명이니 존재는 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
“….”
저렇게 오행의 기운이 안 맞으면 팔자에 부족한 것이 생긴다.
보통 물가 근처에 살라고 하거나, 산에 자주 가라고 하는 말들도 기운간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드워프 들은 수와 목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결핍이 있다는 말이다.
인생에 꼬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눈빛을 교환하던 드워프들이 시큰둥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나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지.”
“시간이 이르니 간식은 어떠한가?”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드워프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꺼내었다.
아공간 주머니인 듯 제법 커다란 컵이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사람 머리만한 잔.
“맥주나 한잔 하지.”
나는 깨달았다.
드워프들이 수와 목의 기운을 채우는 방법을.
“….이래서 맥주를 좋아하는거였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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