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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7

        

         지나치게 오만했다.

         감히 주제를 모르고 날뛰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흐으…… 흡…!”

         

         내 선택, 실수가 불러온 참사를 바로 앞에 둔 나는 더없이 위축되었으나 그렁그렁한 눈물을 테이블에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다소곳이 무릎 근처를 움켜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분함, 억울함, 아쉬움 등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은 감정들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친다.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무책임하게 현실을 외면하는 타입의 인간이 나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거늘, 이 망할 몸뚱아리는 주인의 믿음도 배신한 채 그저 질질 짜고 싶어했다.

         

         아직 무너질 때가 아니다 이 연약한 육체야.

         앞서서 머리를 들이민 싸움에서 약간 불리해졌다고 도망치는 건 어디서 배워 먹은 버릇일까?

         

         작전상 후퇴를 시행하기엔 이제 막 첫 삽을 뜬 수준에 불과한데.

         

         – …억지로 이러실 필요가 정말 있습니까? –

         

         “스읍… 흐, 이건 내 책임이야. 으…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해…!”

         

         괜히 결심이 약해지게.

         나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제로를 쏘아붙이고, 눈앞의 적에게 다시 온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침범해 들어온 건 압도적인 붉은 물결.

         선혈보다도 짙은 빨강색이 정신을 사로잡고 격렬한 자기주장을 펼쳤다.

         

         적의 규모는 작다. 군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인 데다가 써져 있던 경고문을 믿는다면 일 인분… 그러니까 나 혼자서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양일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건 감당하기 어려웠으니.

         

         그야말로 지옥의 솥뚜껑을 함부로 열어버린 것 같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비주얼.

         지글지글 부글부글. 해소되지 못한 잔열로 인해 아직까지도 끓어오르는 용암이 연주하는 심포니.

         이제 익숙해질 때가 되었음에도 아랑곳 않고 코 속을 찔러 대는 강렬한 아로마까지.

         

         과거의 나라면 감미롭다고 느꼈을 그것들은 현재의 나를 이 자리에 옭아매는 족쇄로 변해버렸다.

         

         …아니, 변해버린 건 내 쪽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불구대천의 숙적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은 그대로다.

         

         꿀꺽꿀꺽…!

         

         “후아! 좋아….”

         

         우유…라기보단 밀○스에 가까운 단맛나는 음료수로 입안을 헹구자 고통이 좀 수그러들었다.

         비열하다 못해 거의 사도에 가까운 미봉책이었지만 이걸로 또 한 번 전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잠깐 내려놓았던 둥근 무기를 집어 들고, 작열하는 웅덩이로부터 한국인의 소울 푸드를 한 숟가락 퍼 올린다.

         

         – 아샤님…. –

         

         주인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고문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불안하게 내 몸을 스캐닝하느라 바쁜 제로가 안타까웠다.

         

         매운맛은 통각의 연장이라 했던가? 그렇게 자세히 따지고 보면 고문이 맞을 수도 있으나, 연약하기 따로 없는 사람의 중추신경은 때로는 고통을 쾌락으로 인식한다.

         

         그러니 너도 나중에 소화 기관까지 달린 안드로이드로 갈아타게 되면 소외감 느끼지 않게 잘 가르쳐 줄게.

         

         정말 낡아빠져서 지키는 사람도 안 남은 테이블 매너일 뿐일수도 있으나… 이곳, 식탁을 지배하는 규칙이자 정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는 걸.

         그리고 그건 바로… 자기가 주문한 음식은 다 먹어 치우는 것.

         

         흘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뜬 김치찌개를, 이 빌어먹을 찌개를 포함한 한상차림보다도 다섯 배는 족히 비쌌던 진짜 공깃밥에 살포시 얹었다.

         

         밥알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국물이 대단히 위협적이지만 괜찮다.

         아까 삼킨 맛보기용 첫 숟갈로 놈의 전투력은 충분히 파악했으니까.

         

         내 냉정한 계산이 맞다면 이 맵찔이 육체가 한계를 맞기 전에 뚝배기는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나는 만족스럽게 식당 문을 나서리라…!

         

         

         

         “시발…! 씨발! 아— 이 나쁜 놈들…!! 찌개의 매운맛은 그냥 캡사이신이나 때려 넣어서 만드는 게 아니라, …헤엑. 은은한 감칠맛이 함께 하도록 끓여내야 하는 건데…!!”

         

         – ……해당 메뉴 제조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푸드 카트리지를 블랙 리스트에 추가하겠습니다. –

         

         “뭘! 위한… 흐엑. 블랙 리스트인데!”

         

         – 일단은, 재구매 의사 절대 없음으로 분류했습니다. –

         

         식당을 빠져나온 지 한참 지났음에도 억울함이 가시질 않는다.

         그야 망할 매운맛이 안 사라지니 분노 또한 같이 체류하는 거겠지만 이건 확실히 말해 놔야겠다.

         

         왜!! 덜 녹은 양념장이 뭉쳐 있다가 막판에 풀어진 거냐고!

         

         덜컹!

         치익….

         

         “으급…. 푸하…!”

         

         역사 바깥에 있는 약품 자판기에서 뽑은 위장 보호제를 뒤늦게나마 털어 넣는다.

         이미 가득 찬 배가 더 들어갈 공간이 없다고 하소연을 해왔지만, 이 참사는 내 잘못이 아니다. 나 또한 완벽한 자동 조리라는 허상에 속은 피해자다.

         

         자판기 옆에 달린 회수구에 빈 캔을 던져 넣자 10 크레딧이 지갑으로 환급되었다는 안내 음성이 출력되었다.

         

         경찰 일할 때도 군것질하면서 느낀 거지만 정말 관대하기 그지없다.

         …조금만 더 보태서 전망 좋은 집이라도 사면 딱 좋겠네.

         

         

         

         

       

       

         기차역 안으로 들어서니, 오히려 밖에서는 건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햇빛이 높은 곳에 위치한 채광창을 통해 입사되어서 눈이 부셨다.

         게다가 무수한 전광판과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발차 알림도 여기가 어딘지 잊지 말라는 듯 우리를 맞아주었다.

         

         웅성거리는 소음과 시끄러운 발소리는 덤이었고.

       

       

        거의 천장 근처까지 뻗은 역 전광판을 목이 부러져라 노려보는 아날로그 신봉자, 익숙하다는 듯이 사이버웨어로 데이터를 전송받아서 음미하는 넷 유저.

       

         

         여유가 있었다면 각자의 일정과 행선지를 맞추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꽤 괜찮은 여가활동이 되었겠지만, 저번과는 달리 이번엔 나도 이용객으로서 온 만큼 마냥 늦장을 부리기도 뭐했다.

         

         흔쾌히 빈 방을 내어 주기로 하신 슈나이더 씨네 가족들에게도 넉넉잡아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드린 상태라 더더욱.

         

         “어서 오세요! 우선 시민권부터 여기에 스캔해주시고, 행선지를 말씀해주시면 그동안 가능한 차편을 알아봐드리겠습니다!”

         

         “도착지는 네오 헤이븐. 그리고 최대한 일찍 출발하는 기차에 일반 좌석으로.”

         

         팔을 뻗어 빛무리에다 쑥 집어넣고, 매표소 직원에게 티켓팅을 부탁했다.

         

         아, 알아본다~ 알아보겠다~ 열심히 떠들어 놓고 미리 예매를 안 한 건 게으름을 부린 결과물 같은 게 아니다. 아무리 내가 아침에 약해도 그 정도로 나태하진 않다.

         

         알고 봤더니 무려 그린 등급 이하 시민은 도시 외부로 떠나는 교통편을 이용할 때, 신뢰할 근거가 부족하기에 현장 발권과 소지품 검사를 기본으로 하는 게 도시 법규란다.

         

         ……지들이 돈 받고 시민권도 팔아먹었으면서 책임 전가는!

         

         “보유하신 짐은 가방과… 그 드로이드가 전부이신가요?”

         

         “직접 가지고 움직일 거니까, 따로 탁송 수하물을 등록할 필요는 없…… 잠깐만, 얘도 짐 취급이야?”

         

         무심결에 접수원에게 대답하려다가 이상한 표현이 섞여 들어간 것 같아서 다급하게 되물었다.

         분명히 호위용 로봇도 엄연한 병력으로 구분하면서 이럴 때는 발 달린 가방 취급인가?

         

         “걱정 마세요! 드로이드는 고가 귀중품 취급이니, 전용 화물칸에 따로 적재되어서 목적지까지 아주 안전하게 운반됩니다!”

         

         “…표 한 장 추가해줘. 좌석도 붙은 걸로 찾아봐 주고.”

         

         “알겠습니다!”

         

         보통 뭔가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생겼다면, 크레딧이 부족한 건 아닌가 잘 생각해보자.

         내가 내릴 결정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부드럽게 작업을 이어가는 직원을 흘겨보았다.

         

         어쩜 이렇게 능숙하게 벼룩의 간까지 빼먹는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접객업 종사자의 기본 덕목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 전 입석으로 동행해도 괜찮습니다. –

         

         마른 세수를 반복하는 나를 본 제로가 나쁘지 않은 경비 절감안을 제출해왔으나 별로 내키지 않았다.

         

         “대부분 객실형 열차라 네가 서서 가면 나까지 서서가야 하는데, 그러다간 내 다리가 아작나 욘석아.”

         

         그야 어제처럼 제로의 어깨 위에서 그네 타듯이 붙어 지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나마나 입석 객실은 질 안 좋은 놈들로 수두룩 빽빽할 텐데, 1억 크레딧짜리 ‘귀중품’ 씨와 함께 그런 곳에서 뒹굴다가 발생할 불상사를 경험해보고 싶냐 누가 물으면 나는 절대 사양하겠다.

         

         피할 수 있는 분쟁은 가능한 회피하는 게 서로에게도 좋지 않겠는가?

         

         여기서 쌓은 인맥…이라고 해봐야 별 것도 없긴 한데, 다른 도시에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기차에서 내려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기엔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다시 경력을 쌓고,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조용히 숙이고 지내는 게 상책이다.

         

         “어머…? 아나스타샤 발렌타인님 본인 맞으십니까?”

         

         “…맞는데요?”

         

         갑자기 조심스러워진 말투에 슬쩍 눈을 굴렸다.

         의례적인 신원 체크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할 이유가 있나?

         

         “확인했습니다! 아스트라 익스프레스 A-185호의 일등석 객실 예약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별도의 검사나 대기 없이 미리 승강장으로 향하시면 지금 바로 승차 가능하십니다!”

         

         “저기요, 시발.”

         

         너무 천연덕스럽게 안내해줘서 하마터면 그냥 끄덕이고 돌아설 뻔했다.

         이건 바가지 수준이 아니라 그냥 사기잖아!

         

         그나마 매표소 근처가 붐비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적어도 이 막돼먹은 일처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와중에도 눈치 볼 다른 이용자는 없었으니까.

         

         “일등석을 통째로 달라는 게 아니라…! 2인실이나 4인실에 있는 일반 좌석 두 개를 붙여달라니까요?! 애당초, 결제도 없이 어떻게 티켓 구매가 됐다는 거….”

         

         “…죄송합니다! 기업 VIP분들을 위한 지정 객실은 기차 종류를 불문하고 항상 비워져 있으니 거기로 안내해드리라는 지침이 있었습니다.”

         

         “아?”

         

         기업 VIP…? 내가?

         

         올라오는 헛웃음을 삼키고, 매표소의 창 너머로 비친 직원의 제복을 재차 살펴봤다.

         

         파라다이스 특유의 병아리 복장이 아니기에 그냥 무심코 넘겼거늘, 윗 단추 근처에 오아시스 모양 배지(Badge)가 달려있는 걸 이제야 확인했다.

         

         이거 아무래도… 유일하게 별 거 있는 인맥께서 날 빈손으로 보낼 생각이 없으셨나 보다.

         …그게 아니면, 아직 내가 멋대로 달아 둔 외상의 존재를 모르는 거던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옴뇸뇸.

    튀김우동이 안 맵다고 하는 시점에서 한국인의 매운 음식 기준점은 이미 망가졌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도 그 말을 듣고, ‘튀김우동에 매운 맛이 있어?’ 라고 반문했습니다.

    이상해요…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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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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