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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  

        

       마하렛은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뒤로, 한참을 그 자리에 굳어있었다.

        

       충격으로 인해 머리가 얼어버린 탓이었다.

        

        

       당황, 실망, 분노, 역겨움.

        

       소름 끼치도록 부정적인 감정들이 그녀의 마음 속을 스쳐 지나가며, 진한 발자국을 남긴다.

        

       가슴팍이 쿡쿡 쑤셔온다.

        

       정신이 멍해지는 감각에 마하렛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대, 체… 어떻게 이런…”

        

        

       경악에 젖은 채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입술.

        

       그것은 곧 허무한 한마디를 흘렸다.

        

       허나, 그 짧은 목소리조차도 온전한 문장을 이루지 못하며 부서졌다.

        

       소녀의 숨결은 길게 늘어지는 말꼬리와 함께 겨울의 한기로 흩어져 버렸다.

        

        

       -휘이이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편지지가 팔랑거린다.

        

       새하얀 표면 위로 새겨진 글자들의 나열이 소녀의 동공에 아른거린다.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

        

       마하렛은 그것을 애써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라이덴… 당신은 정말로, 최악의 인간이에요…”

        

        

       소녀의 목은 가느다란 원망을 품고 있었다.

        

       마하렛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떨궜다.

        

        

       “……분명히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망나니의 모습을 벗고.

        

       이제는 점점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참 바보 같네요.”

        

        

       실망감, 그리고 배신감에 젖은 독백이 허탈하게 튀어나온다.

        

       넘실거리는 감정의 수면을 따라서, 소녀의 미간을 일그러진다.

        

        

       “나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초조하고, 괴로워했는데…”

        

        

       전부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고뇌하던 시간들도.

        

       당신의 존재와 과거를 조금이라도 이해해보기 위해 잠을 뒤척이던 새벽도.

        

       전부.

        

        

       “……”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니, 견디기 어려운 비참함이 몰려왔다.

        

       마하렛은 지그시 입술을 씹었다.

        

       가녀린 손가락이 치마를 꽉 움켜쥐며, 옷자락으로 선명한 주름을 남긴다.

        

        

       울렁거리는 감정들.

        

       잠시 휘청이던 마하렛은, 이내 눈을 부릅 뜨며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성녀님께서 변을 당하시기 전에, 서둘러야 해요.”

        

        

       흐트러진 분위기를 바로잡으며, 마하렛은 편지를 교복 앞섬에 챙겨넣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돌리며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소녀의 발이 향하는 곳은 아카데미의 제 1관.

        

       앨런을 비롯한 성녀의 학우들이 대기를 하고 있는 장소였다.

        

        

        

       ***

        

        

       한편.

        

       라이덴의 기숙사.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는 한창 수술이 이어지고 있었다.

        

       소파 위에 흐트러진 자세로 누워있는 흑발의 소년.

        

       그리고 그런 소년의 앞에서 양손을 모은 채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백발의 소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의 주인이시여, 어린 양이 부름을 짖습니다. 부디 죽어가는 숨을 당신의 자애로 품어주소서.”

        

        

       작은 기도 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나아간다.

        

       그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찬란한 신성이 소녀의 손끝으로 피어오른다.

        

        

       -치이이익…

        

        

       칠흑이 몰아치는 주변을 순간마다 비추는 섬광.

        

        

       번쩍이는 빛은 찰나를 스치며 내부를 밝힌다.

        

       그렇게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방안의 풍경은 정말이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진한 피비린내를 머금고 있는 공기.

        

       검은색 웅덩이가 흥건하게 고여있는 바닥.

        

       얼룩이 번져있는 수건들, 그리고 중심에 쓰러져있는 만신창이의 소년.

        

       저절로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그런 살벌한 그림 안에서.

        

       백발의 소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로레인은 떨리는 숨을 씹어 삼키며, 신성으로 가득 젖어있는 손을 라이덴에게 갖다 대었다.

        

        

       -치이이익…!

        

       “끄흑…! 끄아아악!!!”

        

        

       인두로 살을 지지는 듯한 소음이 울리고.

        

       뒤를 이어 고통에 찬 비명이 화음을 쌓는 것처럼 뻗어나간다.

        

        

       “하아, 하아….”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라이덴 씨. 이제 반 정도 되었으니까…”

        

        

       입술을 씹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로레인.

        

       그에 숨을 헐떡이고 있던 라이덴이, 알겠다는 신호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럼, 다시 갈게요…!”

        

       “……!!”

        

        

       -치이이익…!

        

       다시금 신성을 갈무리하며 수술을 재개하는 로레인.

        

       찬연한 빛무리가 상처 부위로 녹아들며, 속으로 스며있던 마기들을 불태운다.

        

        

       이 지독한 싸움이 시작된지도 어느새 한 시간.

        

       툭툭 떨어지는 땀방울들이 바닥으로 흐릿한 물자국을 찍어낸다.

        

       로레인의 호흡은 이전보다 확실히 거칠어진 상태였다.

        

        

       “후우… 상처가 너무 심각해요. 마기의 독이 깊은 곳까지 침투해버렸어요.”

        

        

       로레인은 미간을 굽히며 생각에 잠겼다.

        

       투명한 백안이 처참하게 짓이겨진 복부를 조심스럽게 훑는다.

        

        

       ‘이 상처는 분명… 이틀 전에 있었던 마물들의 침공 때 입은 상처겠죠…’

        

        

       마기란, 본래 마물들과 마족들만이 다룰 수 있는 힘이니까.

        

       아마도 후문을 홀로 사수하던 와중에 입은 상흔들이겠지.

        

        

       ‘그렇다면 적어도 이틀 전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는 대체 어떻게.

        

       이틀 동안이나 이 지독한 상처들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끄흑…! 하아, 하아…”

        

       “……”

        

        

       로레인은 말없이 신음을 흘리고 있는소년을 바라보았다.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로레인은 스스로를 뺨을 꼬집으며 잡념들을 털어냈다.

        

        

       “일단은, 여기에 집중하죠. 라이덴 씨를 살리는게 우선이니까요.”

        

        

       소녀는 다시 한 번 신성력을 끌어올리며 기도를 외우기 시작했다.

        

        

        

       ***

        

        

       그 시각.

        

       레이놀즈 아카데미의 1관.

        

       마물들의 침공 이후 1학년 생도들이 모여있던 장소로.

        

       임시 집결지의 역할을 맡고 있던 그곳에서는, 새로운 갈등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게, 전부 사실입니까 공녀님…?”

        

       “……네, 아카데미 본관의 복도에서 발견한 편지에요.”

        

        

       건물의 앞문 쪽에 위치한 외부 휴게실.

        

       그 안에는,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금색 머리칼에 금색 눈동자를 지닌 부드러운 인상의 미소년.

        

       다른 한 명은 은색 머리칼에 적색 눈동자를 지닌 미소녀.

        

       그들의 정체는 각각 레이놀즈 아카데미의 1학년 최고 유망주인 앨런 라인하르트와, 2학년 마법부 수석인 마하렛 파일러였다.

        

        

       “이 내용에 거짓이 없다면, 성녀님께서는 지금……”

        

        

       마하렛으로부터 건네받은 편지를 쥔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앨런.

        

       소년의 꽉 쥐어진 주먹을 따라서, 주변의 마나들이 기이한 소음과 함께 격동했다.

        

        

       -쿠구구구…!

        

       보기 드문 앨런의 분노한 모습에, 뒤에 서있던 여학생들이 다급히 소년을 말렸다.

        

        

       “애, 앨런! 일단 진정해…!”

        

       “너무 흥분했어,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성녀님께서 지금 그 빌어먹을 새끼한테…!!”

        

        

       전신의 기세를 폭발시키며 감정을 표출하는 앨런.

        

       평소 거친 단어를 입에 잘 담지 않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는 듯 했다.

        

        

       평소 로레인과 특별한 관계를 이어왔기에.

        

       로레인이 자신을 빌미로 협박을 받아, 그 망나니의 손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바로 쳐들어가겠어…! 이번의 일은 결코 그냥 넘어가지 못해…!!”

        

       “잠깐, 앨런…! 기다려!!”

        

        

       폭력적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서는 앨런.

        

       그리고 그런 소년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히로인들.

        

        

       난장판이 되어버린 상황을 보며.

        

       마하렛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씁쓸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슬픔이 묻어나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라이덴, 당신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인 걸까요.”

        

        

       허탈하게 뱉어내는 한마디.

        

       그것은 힘 없이 귓가에 부딪치며 떨어진다.

        

       마하렛은 잠시 입술을 씹고 있다가, 이내 늦은 걸음으로 앞서 가는 앨런 일행의 뒤를 쫓았다.

        

        

        

       ***

        

        

       목숨을 구걸하는 초라한 한마디.

        

       그것을 끝으로 나는 로레인 앞에서 의식을 잃었었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몽롱하던 정신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극도의 고통이었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아!!!”

        

        

       불로 달궈진 쇠꼬챙이를 몸속에 집어넣는 듯한 느낌.

        

       신성력을 머금은 손길이 상처 부위에 닿을 때마다.

        

       마기에 잠식되어있었던 살점들이 녹아내리고, 그 공백은 새로 차오르는 살들이 채워나간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조금만, 진짜 조금만 더…!”

        

        

       벌써 몇 번째일까.

        

       저 조금만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아득해지는 시야를 애써 붙들며, 뜨거운 호흡을 토해낸다.

        

        

       “하아… 하아…”

        

        

       씨발.

        

       내가 살면서 작열통이라는걸 실제로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내장이 녹아내리고, 살이 노릇하게 구워지는 고통.

        

       몇 시간을 견뎌도 도저히 적응이 불가능한 영역의 감각이었다.

        

        

       -띠링!

        

       [긴급 경고 메시지!]

        

       [극심한 육체적 충격으로 인해 시스템이 더욱 불안정해집니다!]

        

       [빠른 시간 내로 안정을 취할 것을 권고합니다!]

        

        

       “씨, 발…”

        

        

       이것도 벌써 몇 번이나 떠오른 메시지였다.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푸른색 창을 치워버렸다.

        

        

       씨발. 나도 안정을 취하고 싶다고.

        

       그런데 이걸 안 치료하면 당장 뒤져버릴 판인데, 어쩔 수 없잖아.

        

       속으로 상황의 불합리함에 대해 저주를 퍼붇고 있으면, 다시 한 번 아찔한 고통이 신경을 관통한다.

        

        

       -치이이익…!

        

        

       “끄아아아아!!”

        

       “이제 정말 마지막이에요…!”

        

        

       그렇게 한참 동안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아마 서른 번은 넘게 루프를 돈 것 같다.

        

        

       거의 한 시간 정도가 더 지나고.

        

       로레인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과, 내 몸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온 거실을 잔뜩 적시고 나서야.

        

       끔찍했던 수술의 시간이 막바지에 달했다.

        

        

       “끝났어요! 마지막으로 상처 부분이 터지지 않도록 봉합만 제대로 해준다면……”

        

        

       신성력이 담겨져 있는 손을 거두어 들이며, 붕대를 꺼내는 로레인.

        

       그것으로 조심스럽게 복부를 감싸며, 매듭을 지으려던 순간.

        

        

       -쾅쾅쾅!

        

       닫혀있던 현관문을.

        

       누군가가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리시트 공자님!! 당장 이 문 열어주십쇼!!!

        

        

       요란한 노크 소리를 뒤로 들려오는 것은, 어느 소년의 목소리.

        

       귀에 익은 음성에 우리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앨, 런…?”

        

       “앨런 씨가 왜 여기에……”

        

        

       초대한 적 없는 불청객이 내 방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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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s a Bastard Aristocrat

A Depressed Kendo Player Possessed by a Bastard Aristocrat DKPBA 망나니 귀족에 빙의한 우울증 검도 선수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Don’t worry, Mom.

This time I will be truly 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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