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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89. 성검, 그리고 맹세(4)

       

       

       역에서 내려 목적지로 향하는 길.

       

       나는 자연스레 루시와 함께 걷게 되었다.

       물론 성격이 성격인지라 저쪽에서 말을 걸어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대화는 생각보다 그럭저럭 이어졌다.

       시엘이랑 같이 다니면서 말 없는 상대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익숙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가 나온 이야기 한 가지.

       

       “너는 왜 제국 기사단에 들어간 거야?”

       

       내 입장에서는 그냥 가벼운 화젯거리 삼아 던진 말이었는데. 어째서일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루시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진다. 내 말에 언제나 성실히 답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혹시 지뢰라도 건드린 건가 싶어서.

       답하기 곤란하면 대답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리 이야기하려던 순간이었다.

       

       “…그건 동경하는 사람이 있어서였습니다.”

       

       무언가를 골똘히 떠올리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루시가 그런 말을 꺼낸다.

       

       “예전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저를 구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서 기사가 되기를 희망했고요.”

       

       분명 훈훈한 이야기일 터인데. 어째서인지 조금 창백해진 얼굴.

       

       허나 왜 그런 것이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었다.

       

       “…용사입니다. 그것도 당신과 같은 이름의 용사가, 예전에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 또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으니까.

       

       여태까지 전대 용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루비아 씨, 시엘, 리엔.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어떤 도서와 기록 속에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던 용사.

       

       그 실마리가 뜬금없이 이 소녀에게서 나온 것이다.

       

       “…대체 왜 제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걸까요?”

       

       루시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리 중얼거렸다.

       

       나는 이후로도 몇 번이고 루시에게 전대 용사에 관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녀가 해 준 이야기는 단순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누군가의 공격으로 인해 불타고 있는 저택에서 어린 자신을 구해 주었다는 모양.

       

       그리고 그 사람의 반짝반짝 빛나는 검을 보고, 어린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소문의 용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거고.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째서 용사에 대한 것을 모두가 잊어버린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이건 이것 나름대로 꽤 큰 수확이었다.

       

       적어도 전대가 있던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전작의 주인공은 확실히 존재했다.

       

       그것도 아마 내가 쓰던 캐릭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 

       

       이안이란 건 내가 즐겨 쓰는 닉네임이었으니까. 검은 머리색은 따로 커스터마이징을 하지 않았을 때의 기본설정이고.

       

       전작에 루시나 발리에르 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전개가 좀 틀어진 것 같긴 하지만.

       

       일단 용사의 존재 자체는 확실해졌다는 이야기.

       

       ‘그건 다시 말해서, 누가 억지로 용사에 대한 걸 이 세상에서 지웠다는 거지.’

       

       원작 전개가 어떤 식으로 꼬인 건지.

       대체 누가 그 이변의 원인인지.

       사람들의 기억을 지운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밝혀낼 만한 근거는 아직 부족했지만.

       

       가장 유력한 용의자만큼은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제국 그 새끼들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지랄맞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일단 제국을 지목하면 십중팔구는 맞아떨어지니까.

       

       이번에도 그 새끼들이 뭔가 한 게 분명했다.

       

       자연스레 내 얼굴이 찌푸려진다.

       

       용사를 직접 보아 강렬한 기억이 남았을 터인 루시마저, 지금 겨우 기억을 되찾았다.

       

       그건 다시 말해, 루시 정도의 강자에게도 먹힐 만한 정신지배를 누군가 행하였다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조작한다는 것이 대마법사나 쓸 수 있는 고위마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런 걸 대규모로 벌일 수 있는 존재는 대체 얼마나 논외의 괴물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

       자연스레 내 머리가 어질어질해졌지만….

       

       나는 한숨 한 번에 근심을 털어냈다.

       

       ‘결국, 어찌 되었든 내가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숨겨져 있던 사실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앞으로 내가 마주할 상대들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만 확실해져 간다.

       

       허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 당해줄 생각 따위 추호도 없으니.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 전부 해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열심히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힘을 쌓고, 훗날 다가올 멸망에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내가 하던 일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특이한 소음이 귓가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망치 두드리는 소리.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낸다.

       

       활기 가득한 분위기와 이색적인 풍경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대장장이 거리.

       우리의 목적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늘어서 있는 대장간.

       그 사이를 루시와 함께 걸어간다.

       

       아까 전의 충격이 아직 좀 남아있긴 하지만. 확실히 이 거리를 직접 걸어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전작을 플레이할 때에도 장비를 마련하려 자주 들렸던 공간. 

       

       ‘바뀐 것도 있고 바뀌지 않은 것도 있네.’

       

       이 10여년 간.

       문을 닫은 걸로 보이는 곳도 있는가 하면, 사람만 바뀌고 그대로 운영하는 곳도 있다.

       

       언제까지 처져 있는 채로 있을 순 없으니.

       

       나는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전작에서 애용했던 대장간의 현황을 찾아보려 이곳저곳을 살핀다.

       

       허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대장간이 아니라 루시였다.

       

       어째서인지 한 대장간을 아주 뚫어저라 바라보는 모습.

       

       “뭐 마음에 드는 거라도 있어?”

       

       내가 루시에게 그리 묻자 그녀가 대답하기보다 먼저 드워프가 이쪽으로 다가온다.

       

       “보기만 해서야 알 수 있는 게 있겠소?”

       

       관심 있으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며 우리를 이끄는 드워프.

       

       아주 능숙하기 그지없는 호객 행위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뭐, 이런 게 필요하긴 했으니까.’

       

       임시보호하고 있는 검은 송곳니 군대.

       

       나날이 제국과 최종보스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의심이 늘어 가는 상황에서.

       

       그놈들한테 무기와 방어구를 보급하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투자일 테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고급 장비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 드워프의 대장간을 살펴보았다.

       

       진열되어 있는 검과 갑옷.

       하나같이 화려한 것이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이 났다.

       

       가격은 꽤 비싸지만. 원래 드워프제 장비라는 것이 대부분 그런 법이니까.

       

       나는 적당히 검을 하나 들어보았다.

       

       “이거 휘둘러 보아도 괜찮나요?”

       

       만약을 위해 던진 질문.

       

       “그럼 당연하지! 직접 써보지 않으면 그게 자기한테 맞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나?”

       

       드워프는 당당하게 그리 선언한다.

       자기 실력에 어지간히도 자신이 있는 건가 싶은 모습.

       

       나는 적당히 그 검을 휘둘러 보았다.

       물론 저번 연무장 때와 같은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힘조절에는 최대한 주의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이건 또 왜 이래?’

       

       검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지만.

       그럼에도 이 검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엉망진창인 무게중심.

       전혀 베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오리할콘이라는 귀한 금속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 쓰여 있는데.

       

       이건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분명 다른 금속보다 가볍고 단단한 소재라고 게임 속 설정에 나와 있었는데도 말이다.

       

       나는 수상함을 느끼고 바로 그 검을 반납했다.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으니까.

       

       허나, 대장간의 입구를 막 빠져나가던 내 팔을 드워프가 붙잡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이 귀한 검을 대체 어떻게 다룬 게야!”

       

       분명 반납할 때만 해도 없었는데. 마법같이 방금 막 생긴 흠집을 가르키는 모습.

       

       그 노발대발하는 말투와 달리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엿보인다.

       

       지금 이 상황.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어쩐지, 뭔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애초부터 이런 목적으로 우릴 끌고 온 게 분명했다.

       

       그렇게 결국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 드워프와 시시비비를 따지려던 순간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주군의 뜻은 헤아렸습니다. 여긴 제게 맡겨 주시길.”

       

       루시가 갑자기 내 앞에 나선다.

       

       내 의지를 헤아렸다는 말.

       그리고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야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기회에 루시에 대해서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무리 기아스가 있다고는 하나 여태까지의 행보가 행보인지라 좀 불안한 부하.

       

       루시가 이 사기꾼의 억지를 어떻게 논파할지는 나도 조금 기대가 되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자마자, 루시는 저벅저벅 걸어가 대장간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시는 선언했다.

       

       “분명 시험삼아 검을 휘둘러 보아도 된다고 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애초에 시험삼아 검을 써보는 걸 허락한 건 너 아니었냐고.

       

       나는 내심 조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파인지라 두뇌 쪽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논리적인 지적.

       다음에는 어떤 설득이 이어질지 기대하며 나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루시가 꺼낸 이야기는….

       

       “그러니 저도 한 번 휘둘러 보겠습니다.”

       

       아주 생뚱맞은 말이었다.

       

       루시가 적당한 검을 집어들고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주 완벽한 발도 자세.

       

       …나는 그제서야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눈치챘다. 허나 말릴 시간 따위 없었다.

       

       “3식, 『난무(亂舞)』.”

       

       춤추듯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는 검.

       진열되어 있던 모든 물건, 화로와 온갖 장비, 벽과 기둥. 모든 것이 베어져 나간다.

       

       -콰아아아앙!

       

       이내 울려퍼지는 커다란 굉음.

       토막난 대장간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린다.

       

       자연스레 그 드워프와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말문이 막혔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모든 이의 반박을 차단하였으니.

       

       그건 따지고 보면 완벽한 ‘설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리 속성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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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How did you create a dark organization? 어쩌다 흑막 조직 만들어버림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game spoilers turned out to be fake. The characters I gathered thinking they were heroes are actually all villains. In other words, I accidentally created a villainous org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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