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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적어도 엘리자베타 본인에겐.

         

         칠용장을 참하라는 명령서에 직인을 찍어야 했던 10년 전 이후로, 지금처럼 긴장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부왕을 유폐하고 오라비의 측근과 외척을 모조리 숙청하던 지난날에도 오늘만큼 긴장하진 않았다!

         

         

         “전하.”

         

         

         엘리자베타는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애써 등 뒤로 감췄다.

         

         

         “컨디션은 어떤가.”

         “평소와 같습니다.”

         “준비는?”

         “평소와 같습니다.”

         

         

         평소와 같다. 즉 숨쉬는 모든 순간이 만전이라는 의미다. 이 우직한 사내의 말은 그렇게 해석해야 했다.

         

         잘 벼려진 장검과 같다. 아니, 잘 손질된 채 화약을 머금은 화포와 같다. 언제든 방포할 준비를 마친, 전쟁 직전의 병기고와 같다.

         

         엘리자베타는 ‘평소와 같은’ 그 모습에 내심 안도를, 그리고 어떤 종류의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이 남자라면 믿을 수 있다. 이 차가운 세상 속에도, 혈족조차 믿을 수 없는 외딴 섬 속에서도.

         

         그러니,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나를 놓치지 말아다오.

         

         그런 마음을 담아서,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반에게 다가갔다.

         

         

         “본인의 명령 또한 그 전과 같다네, 반카. 기억하고 있는가.”

         “예, 전하.”

         “압도적인 승리를 쟁취해서, 본인에게 바쳐다오.”

         “전하께오선 부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명령을 내리시지요.”

         “승리하게. 그 무엇을 상대하더라도. 반드시.”

         “예, 전하.”

         

         

         철컥.

         

         이반은 투구의 바이저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주가 어색했다. 하지만 토너먼트란 결국 기사시합의 발전형. 이 고풍스러운 갑주는 그 자체로도 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

         

         어깨어림에 걸린 휘장은 낯설었다. 그로서는 단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귀족가의 휘장이었다.

         

         이반은 도끼 한 자루와 칼 한 자루를 양 허리에 찬 채로 걸음을 옮겼다.

         

         철컥, 철컥. 무거운 갑옷이 바닥을 힘차게 내려 누른다.

         

         어떤 행색을 하고 있더라도 그는 왕실의 요원이다. 왕실근위대의 후예이자, 절멸부대의 생존자이며, 방첩사령부의 수장이다.

         

         따라서, 기사의 차림을 하고 있으되 그는 결코 기사가 될 수 없다. 최선을 다한 후의 명예로운 패배나 무인들 사이의 찬란한 무훈 따위를 바란 적도 없다.

         

         오늘도 그는 왕실의 요원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서의 직인뿐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명령은 언제나와 같았다.

         

         반드시 승리해라.

         

         그리고 그 명령에 회신하는 대답 또한 언제나와 같다.

         

         

         그리 되리라.

         

         

        *

         

         

         세르게이 안토노비치 투르게예프는 투르게예프 백작가의 장남이다.

         

         그는 화려하게 장식된 마력 보조형 판금갑을 입은 채로 당당하게 토너먼트 회랑 위로 올라섰다.

         

         

        -와아아아아—!!

         

         

         그가 등장하자마자 온갖 찬사가 울려퍼졌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몸이 떨리는 것인 것인지, 아니면 관중들의 환호가 이 가설 무대를 흔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바이저를 열고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환호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투르게예프 백작가의, 세르게이 안토노비치 투르게예프 경이 입장합니다!!]

         

         

         흥을 돋우기 위해 배석한 사회자가 크게 외쳤다.

         

         관중들이 던지는 꽃과 환호를 맞으며 그는 내심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왕녀와 혼인하고, 껍데기만 남은 왕가를 손아귀에 쥐고.

         

         우리 가문이 이제 왕혈을 이어 그 버러지 같은 ‘입헌군주정’이란 제도를 쓸어버린 뒤에, 내가 이 나라의 왕작에 앉아 군림하리라.

         

         이 잘생긴 귀족 청년은 당당하게 시합대 위에 올라 외쳤다.

         

         

         “주여, 제 검을 가호하소서! 오늘 이 자리의 명예는 온전히 저 하늘의 주님과 이 나라의 국본께 바치겠나이다! 오라, 명예롭게 싸우고 귀족답게 승복하라!!”

         

         

         그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무대로 향하는 어둑한 통로가 보였다.

         

         쨍한 햇살 아래에도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초라한 입구였다. 마치 그의 상대처럼.

         

         예르모프 자작가? 북방토호 중 하나라 했다.

         

         그리고 북방토호란 곧 한줌의 병력으로 소작농들이나 등쳐먹고 사는 버러지들이다. 사냥꾼이나 산지기들이 제가 귀족입네 하고 콧대 세우고 다니는 하찮은 것들일 뿐이다.

         

         심지어 3남이라.

         

         대를 이을 수 없으니 편력수행을 하며 돈에 무력을 팔아야 하는 매검자들이다. 방랑기사란 뜻이다.

         

         그런 하찮은 용병 나부랭이 따위가, 감히 신분상승이란 헛된 꿈을 꾸고 수도에 상경했으니 이를 가련하게 여겨야 하나, 혐오해야 하나.

         

         세르게이는 실실 웃으며 검을 곧게 세웠다.

         

         곧, 사회자가 외쳤다.

         

         

         [예르모프 자작가, 이반 페트로비치 예르모프 경이 입장합니다!!]

         

         

        -와아…?

        -아…?

         

         

         유력한 대귀족이자 사교계에서도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세르게이와는 달리, 저 북방토호의 지방 귀족은 이 도시에서 명망이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이반, 그 흔한 이름을 보라. 선대왕 이래로 이반이란 이름은 그저 ‘우람한 남자아이’에게 아무렇게나 붙이는 이름에 불과했다.

         

         관중들의 미묘한 환성 아래에, 통로의 그림자 사이에서 천천히 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철컥. 철컥.

         

         

         익숙하지 않다는 듯 무겁게 걸음을 옮긴다.

         

         우스꽝스럽다. 갑주의 무게를 고스란히 딛는 저 발걸음은, 그 자체로도 저 자의 미숙함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철컥, 철컥, 철컥.

         

         

         아무 장식 없이 검은칠된 갑주와, 어깨어림에 그려진 낯선 휘장. 가문 휘장임에도 눈에 익지 않다는 것은 변변치 않은 가문 출신이란 뜻이다.

         

         

        -철컥.

         

         

         마침내 단상 위에 올라온 사내는 아무런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내려보고 있었다.

         

         투구 바이저 아래로 새파란 눈동자만 언뜻 스쳐 보일 뿐.

         

         

         “본관은 세르게이 안토노비치 세르게예프. 세르게예프 백작가의 장남이며, 사적으로 친우들에게는 사자의 기사라 불리고 있네. 그대의 이름은?”

         “….”

         

         

         시선은 그에게 못박힌 채로, 여전히 눈 앞의 변방 기사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뭐, 됐나. 긴장했나보군. 이해하네. 첫 출진인 듯한데, 하필이면 상대가 내가 아닌가. 아쉬운 노릇이지.”

         “….”

         

         

         두 사람은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곧게 세운 검을 가볍게 까딱이며, 천천히 허리를 낮춰 예를 표한다.

         

         토너먼트는 시작 부저나 출발신호탄 같은 것이 없다. 두 사람의 결투자가 서로를 마주한 순간부터 시작되므로.

         

         그러니 대화는 사실 의미가 없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첫 상대가 이렇게 풍류를 모르는 자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하지만 좋다.

         

         아무리 허술한 상대라 할지라도 완전히 압도하는 모습으로 왕녀에게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 테니까.

         

         자, 이제 네 미래의 부군의 모습을….

         

         

        -콰직!!

         

         “커…흑…?!”

         

         

        *

         

         

         관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는 것조차도 잊었다.

         

         두 기사가 절차대로 서로에게 예를 표하고, 검을 곧게 고쳐쥔 직후의 일이다.

         

         

        -콰앙!!

         

         

         소리는, 명백히 현상보다 늦게 도달했다.

         

         관중들이 폭음을 들은 그 순간, 이미 검게 칠한 갑주의 기사가 상대의 정면에 도달해 있었다.

         

         

        -콰직!!

         

         

         황급히 대응한 검격, 교본 그대로의 깔끔한 일격이 내려 쳐졌다.

         

         그 검격의 결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진 장검 한 자루가 크로스가드의 틈에 검날을 물고 비튼다.

         

         물이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연계, 그러나 그 결과는 부드럽지 않았다. 칼날이 튕겨나간다.

         

         동시에, 달려든 기사의 어깨가 상대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우직, 으지직. 마력 강화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그 갑주가 통째로 으스러지고.

         

         

         “커흑…! 크흐윽…!!”

         

         

         신음이 들린다. 맨손으로 황급히 저항하려는 듯 허우적거리며.

         

         기사는 쓰러진 상대에게 다가서며 검을 놓았다. 콰직, 하고. 바닥 깊이 검날이 틀어 박혔다.

         

         그렇게 맨손이 된 채로,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

         

         

         “귀관의 충성은 어디로 향하나.”

         “크흑… 컥… 그, 그게 뭐… 무슨…!”

         

         

        -콰직!!

         

         

         주먹이 투구에 틀어 박혔다.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 담금질이 된 고가의 판금갑 투구가 종잇장처럼 찢어져 나갔다.

         

         충격에 머리가 찌잉 하고 울렸다. 그 사이로,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귀관의 충성은, 어디로 향하나.”

         “이… 이익…! 이, 노오옴….!”

         

         

        -콰직!!

         

         

         다시 한번, 망치질을 하듯 주먹을 내려 꽂았다.

         

         양자가 검을 놓쳤으니 결투는 끝나지 않는다. 상대의 완전한 무력화, 즉 항복 선언 또는 실신 전까지는.

         

         그러니까, 실신하지 않을 정도의 힘만을 담아서. 우직하게. 하지만 기권을 제 손으로 선언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콰직, 콰직.

         

         

         주먹을 내려 꽂아서, 부서지지 않을 수준으로 정교하게 힘을 갈무리하여.

       

       

        이 멍청한 귀족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해’준다.

       

       

         

         받은 명령은 하나.

         

         압도적으로 승리할 것.

       

         

         작전의 목표 또한 하나.

         

         왕가에 역심을 품은 귀족들에게 ‘경고’할 것.

         

         감히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경고를 전해줄 것.

         

         감히, 취약해 보인다 한들 그 기휘를 범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이 도시에 거하는 고위 귀족들, 소위 대귀족들에게 보여줄 것.

       

         

         그것을 바라신다면, 그리 되리라. 이반은 주먹을 내려 찍었다.

         

         코뼈가 내려앉고 앞니가 빠진 귀족 청년이 입을 헤 벌리며 실신할 때 까지.

         

         

         “힘겨운 싸움이었군. 내 승리가 맞나?”

         

         

         이반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건틀릿을 절그럭거리며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얼어붙은 사회자는 더듬거리며 귀족들이 앉은 자리를 힐끔거렸다. 입을 떡 벌린 귀족들 사이에선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반은 고개를 돌려 왕녀가 앉은 높은 단을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녀는 탄식하며 이마를 감싸쥐었다.

         

         

         “스, 승자!! 예레모프 자작가의 이반 페트로비치 예레모프 경!!”

         

         

         환성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적도 없었다.

         

         이반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장내를 벗어났다.

         

         

        *

         

         

         “우와… 으… 오….”

         “오.”

         “어….”

         

         

         입에 넣은 팝콘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관중석에 앉아 있던 이자벨과 에시디스, 그리고 파벨은 멍하니 장내를 내려보았다.

         

         

         “저렇게…. 저렇게 진심이라고…?”

         

         

         저렇게까지 결혼을 하고 싶었다, 이 말이지?

         

         화를 내려다가도, 문득.

         

         훈련할 때, 대련할 때는 저런 모습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들은 모르는 따듯한 모습을 자신만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해졌다가.

         

         다시 한번.

         

         

         “아니 저렇게까지 결혼이 하고 싶었다고!?”

         

         

         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

         

         

         “어휴, 인간들이란. 저급하기도 하지.”

         

         

         한 엘프가 코를 손수건으로 가리고 투덜거리며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엘피헤라는 멍하니 장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만성과 고결함, 그 두가지 상반된 가치가 아름답게 뒤섞인 남자를. (그녀의 기준이다.)

         

         

         “멋…있어….”

         

         

         무릇 사내라면 저런 강단, 저런 패기, 저런 야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녀는 삼삼오오 앉아서 고급스러운 홍차를 홀짝이는 동족 남성들을 한번 흘겼다.

         

         저런 것들도 사내라고.

         

         

         [아하하하!!]

         

         

         그녀의 곁에 앉아있던 전신갑옷에서 낭랑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엘피헤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갑옷을 바라보았다.

         

         갑옷은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밝게 떠들었다.

         

         

         [저 성깔은 어디 죽지도 않았구나!! 아하하하!!]

         

         

         갑옷은 깔깔거리며 웃더니, 탁자를 탁탁 두드리고는 일어섰다.

         

         

         [자아, 이제 나도 보여줄 때가 되었구나. 아하하하!!]

         

         

         갑옷은 즐겁게 웃으며 관중석을 빠져나갔다. 그녀의 차례를 기다리지도 못하겠다는 듯이, 그녀는 대기실에 먼저 내려가 있겠다며 떠났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표지를 받았어요!!!!

    전쟁시절 엘리자베타와 이반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너무 기뻐어어어어엇!!!!!!!!!!!

    *

    주말엔!! 표지도 바뀐 김에!!

    그 전 표지를 제작해주셨던 지나가는나비 님에 대한 감사를 담아서!!!

    지금까지 받은 펜아트들을 모아 공지로 쏘아버리겠습니다!!!!

    감솸다!!!으ㅏ아아아아ㅏㅏㅏ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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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3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Prologue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
Score 7.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I got transmigrated into a game I’ve never seen before. I thought it was a top-notch RPG and spent 30 years on it. I retired as a war hero and planned to spend my remaining time leisurely. But it turns out, it was an academy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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