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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그래도 벨라는 설정으로나마 존재하는 캐릭터였으니까. 본편에서는 죽어서 나오지 않더라도 회상 장면으로나마 등장은 하니까. 모델링도 없이 일러스트 한 장으로 때우긴 했지만.

        

       지금은 이렇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건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럴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더 음침한 성격이다. 눈도 언제나 반쯤 감고 다니고, 입가에 빈정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기도 하고.

        

       가슴골을 거의 언제나 드러내고 다니는 건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지금도 그런 복장이었다.

        

       딱 달라붙는 탱크톱에, 밑단이 아주 짧은 재킷을 입고 있어서 가슴 사이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솔직히 지하철 같은 곳에서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민망해서 시선 둘 곳을 찾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나마 21세기에서 살다 온 내 기준에서나 조금 민망하게 느껴질 뿐이지, 이 세계에서는 정말로 상상하기도 어려운 복장인 셈이다. 그것도 황녀라는 사람이 이렇게 입고 있으니.

        

       “아.”

        

       주문을 마치고 돌아오던 앨리스가 빈자리에 앉은 벨라를 보고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벨라는 그런 앨리스의 반응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원작에서 클레어와 앨리스의 사이가 쉽게 좁혀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황제의 딸이었던 앨리스는, 황제의 애정 표현이 다소 괴상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고급 식자재로 만든 식사를 했다. 본인도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만, 사실 그 노력을 뒷받침해주고도 남을 만큼 배경이 좋았다.

        

       하지만 클레어는 그렇지 못했다. 창관에 팔려 가 온갖 끔찍한 일을 당하고 나온 클레어는 앨리스의 사고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고, 사사건건 부딪쳤다.

        

       황제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레어처럼 독보적으로 암울한 삶을 살았던 캐릭터는 황제의 아이 중에서도 없었으니까. 그나마 산전수전 다 겪은 벨라 정도가 클레어에게 공감해주었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올 때쯤의 클레어가 벨라 mk 2가 되어있었던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는 클레어가 황제의 아이로 들어오는 대신 내가 있었고, 나를 조심하는 건지 나라는 존재 때문에 가짜 황녀나 황자를 위험한 곳에 침투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벨라가 생존하게 되었다. 바뀐 거라곤 나라는 존재뿐이었으니 아마 나 때문에 살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여기는 왜 왔어?”

        

       앨리스는 자리에 앉으면서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벨라는 여전히 턱을 괴고 앉은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랜만에 여동생들 얼굴 보려고?”

        

       “그런 이유일 리가 없잖아.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섭섭해라.”

        

       벨라는 안타깝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그 동작이 좀 과장된 것이 눈에 보여서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긴 했지만.

        

       “너는 나와 살갑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 귀여운 막내와 나는 꽤 막역한 사이인데?”

        

       “실비아랑 네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가 끼어든다고 해서 싸움을 멈출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의 말싸움이 위험한 수준에 이를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왜, 그렇잖아. 실비아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거의 맺지 않으니까. 나 정도면 막역한 사이라고 해도 괜찮은 관계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네가 막역한 사이라고 해서 우리가 막역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 단순한 거 아닐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원래 여러 개가 겹칠 수 있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너한테 들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시선을 돌려 웨이트리스가 있는 쪽을 보았다. 우리가 처음 가게에 들어오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웨이트리스는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손님은 얼마 없었고, 그러니 할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아까 앨리스가 웨이트리스를 기다리지 않고 계산대로 갔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믿기 어려우니까, 그냥 목적을 말하지 그래? 이야기를 빙빙 돌려봐야 목적에서 멀리 벗어나기만 할 뿐이야.”

        

       “여동생이라고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거야? 솔직히 말해서, 보호는 네가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것 같은데.”

        

       “…….”

        

       앨리스가 벨라를 노려보는 걸 보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정말로 친교를 다지고 싶으셨다면 제가 아카데미에 있건 바깥에 있건 찾아오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나는 벨라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뭔가 전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십니까? 루카스도 할 이야기가 생각나기 전까지는 제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루카스한테 뭔가 들은 이야기가 있어?”

        

       “언젠가 저를 죽이겠다고 하더군요.”

        

       “뭐?”

        

       “정말!?”

        

       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고, 앨리스가 분개했다.

        

       벨라의 반응을 보니, 루카스는 윈터필드에서 나와 대화를 나눈 직후에 그대로 황제 곁을 떠나버린 모양이다. 하긴 여전히 루카스가 거기 있었다면 벨라가 이렇게 찾아올 이유도 없을 테니까.

        

       “……루카스가 그랬다고? 정말로? 걔가? 너를?”

        

       벨라가 그녀로서는 정말 흔하게 짓지 않는 표정으로 당황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 이야기를 꺼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응한 건 앨리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굳이 앨리스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고 벨라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을 뿐이다.

        

       “…….”

        

       그 뜻을 알아들었는지, 앨리스도 벨라도 잠깐 말이 없어졌다.

        

       “……후우.”

        

       벨라가 테이블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좋아. 가만 생각해보면 걔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은 알 것 같거든.”

        

       그리고 손으로 머리를 한번 쓸어내렸다.

        

       “바빠질 것 같네.”

        

       한탄하듯 그렇게 중얼거린 벨라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바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노스우드 근방의 카지노가 있는 건 알고 있지?”

        

       “숲 한가운데를 비워버리고 만들어낸 제국 최대의 카지노죠.”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막 6월에 접어든 시기와 그 카지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듣고 떠오른 내용도 있었다.

        

       “카지노에 법국 세력이 잠입하기라도 했습니까?”

       “카지노에 법국 세력이…….”

        

       나와 거의 동시에 입을 연 벨라는 내 목소리가 자기 목소리와 겹치는 것을 듣고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어?”

        

       “…….”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앨리스도 입을 멍하니 벌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잠입했는지도 알아?”

        

       “성당기사단의 기사가 아닙니까?”

        

       “성당기사단의 기사라고 하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잖아. 숫자로 하나하나 셀 수 있을 만큼 수가 적기는 하지만.”

        

       벨라가 떠보듯이 물었다.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방법이라면 누구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사람을 들여보내는 게 좋겠지요.”

        

       “…….”

        

       계속해보라는 듯 턱짓을 하는 벨라에게, 나는 이어서 말했다.

        

       “성당기사단의 여기사는 모두 동시에 수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중 한 사람에게 무척 선정적인 복장을 입혀서 들여보내면, 보통 사람은 그 사람이 법국의 기사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바니걸 입은 여자가 수녀일 거라는 생각을 누가 하겠냐고.

        

       게다가 성격도 별로 수녀 같지 않은 성격이었고.

        

       “……그래서?”

        

       벨라는 평소와는 다른 진지한 표정으로 채근했다.

        

       “하지만 독실한 성당 기사라면 그런 식으로 비종교적인 행동을 하는 것에 큰 반감을 품을 테고, 법국 입장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아까운 기사에게 굳이 반감을 살 생각은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그런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낸 것은, 애초에 그런 성격을 가진 특이한 기사가 되겠죠.”

        

       그리고 성당 기사 중에서 그런 정신 나간 여자 캐릭터는 딱 하나뿐이었다.

        

       아니, 뭐, 성당 기사 대부분이 정신 나간 광신도이기는 하다만. 그거랑은 조금 다른 의미로 정신 나간 인간이 하나 있지.

        

       “그래서,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는데?”

        

       “엘리자가 아닙니까?”

        

       “…….”

        

       나의 대답에, 벨라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앨리스는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제국에서도 이제야 막 얻은 따끈따끈한 정보일 텐데. 게다가 원작에서는 굉장히 우연히 얻은 정보였다.

        

       그런 정보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알려주는 나를 보면 당연히 기가 질릴 거다.

        

       “……루카스가 너를 죽이겠다고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

        

       뭐, 그런 이유로 죽이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내 능력 때문에 죽이겠다고 한 것도 사실이기는 하니까.

        

       “…….”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시선을 다시 돌려서 드디어 잠에서 깬 웨이트리스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때마침 완성된 파르페 두 잔을 받아서 든 웨이트리스가 이쪽으로 오기 시작하자, 벨라도 더 자세한 것을 캐물어 보지는 않았다.

        

       나를 의심하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좋아.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걸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Brightwing님, 후원 감사합니다!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처음 소설 쓰기 시작했을때만 해도 여러모로 많이 불안하게 생각했는데, 제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읽어주셔서 지금은 그때보다 마음이 훨씬 편안합니다. 언제나 독자 여러분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을 수 있습니다. 글 쓰는 것이 이렇게 즐겁다는 것을 작년에 다시 깨닫고 지금까지 쭉 쓰고 있는데, 만약 제가 처음 올렸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열심히 글을 쓰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글 쓰면서 느꼈던 즐거움이 조금이나마 독자 여러분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이이일님, 후원 감사합니다!

    언젠가 실비아의 가면도 벗겨지겠죠? 실비아 성격이라면 그때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때 가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만들어낸 캐릭터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 아직도 신기합니다. 지금까지 글 쓰는 재주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매일같이 열심히 쓰다보면 조금씩이나마 실력이 늘어나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앞으로도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정진하여 독자 여러분께서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도록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소설도 마지막에 주인공이 웃을 수 있는 내용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deadly우박님, 후원 감사합니다!

    처음 연중성녀를 쓸 때는 한 화에 6천자 정도를 생각하고 썼었습니다. 제가 글 쓸때 설명이나 독백을 많이 넣는 편이기도 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설이 제대로 전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한 화에 3천자씩 쓰는 것은 너무 짧지 않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쓰기 시작했는데, 정말 많은 분들께서 저의 글을 읽어주시기에 앞으로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버릇을 고치려고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쉽지는 않네요;;

    물론 제가 담백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어도, 매일 두 화씩 올리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겠습니다. 매일 이렇게 쓰는 것 만으로 제 글실력이 어느정도 되는지 가늠해볼 수 있고, 버릇을 들여놔야 계속 이렇게 같은 시간에 글을 올릴 수 있을테니까요. 언제나 매일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매일 같은 시간에 여기 오시듯, 저도 같은 시간에 글을 올려둘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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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Overly Diligent

Status: Completed Author:
I got transported into a steampunk-themed JRPG developed by a Japanese game company. Somehow, I ended up becoming an executive in the villain faction. However, the protagonist and their party are excessively dilig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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