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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공자가 저기로 떨어졌다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 아셀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방어를 위해 일부러 깊은 골짜기 지형에 지어진 중앙 성채다.

     

    새까만 어둠이 시야를 가려서 바닥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떨어지는 걸 뭐든지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겠다는 듯, 산맥의 바위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양새만 같다.

     

    “안 돼.”

     

    아셀라가 입을 틀어막았다.

     

    사람이 저런 곳으로 맨몸으로 떨어져서야 생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당연한 사실에 생각이 닿으니 피가 머리를 향해 거꾸로 솟아 눈앞이 새빨개졌다.

     

    “타냐 공! 왜 공자가 야만족과 싸우고 있었는데! 맨몸이었잖아!”

     

    아셀라가 성을 내며 타냐에게 뚜벅뚜벅 다가갔다.

     

    “그건…”

     

    타냐는 있었던 상황을 그대로 아셀라에게 전달했다.

     

    마지막에 소년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라스를 자신이 잡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뭐라고…!”

     

    ―짝!

     

    분을 이기지 못한 아셀라가 타냐의 뺨을 후려갈겼다.

     

    타냐는 당연한 벌이라는 듯 아셀라의 손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녀 역시 라스의 죽음을 직감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실책, 호위기사 실격이다.

     

    자신이 황실 기사단에 관심을 보여 전장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스는 절대 이런 곳에서 죽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일개 기사일 뿐인 자신의 한순간 실수로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타냐는 더없이 괴로웠지만, 지금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아셀라일 걸 잘 알았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숨겼다.

     

    “공자를 안 지키고 뭐 했어!”

     

    “면목이 없습니다.”

     

    “이 쓸모없는…!”

     

    아셀라가 타냐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이글거리는 눈에서 일렁거리는 것은 금빛 마나뿐만은 아니었다.

     

    그 행동이 아무 짝에 쓸모없다고는 아셀라도 잘 알고 있다.

     

    알고 있어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다.

     

     

    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아셀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종류였다.

     

    상실.

     

    당연하게 곁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라스가 없어졌다.

     

    상상조차 안 해본 일이었다.

     

    오늘 밤부터 함께 잘 수도, 내일 아침에 그의 얼굴을 보며 일어날 수도 없다.

     

    심지어 오늘은 말일이다.

     

    당장 내년부터는 그의 한심한 농담이나 경박한 말투를 더 들을 일도 없다.

     

    이럴 리가 없다고 아무리 속으로 부정해도, 지금 눈 뜨고 숨 쉬고 있는 여기, 이 장소가 현실이라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천리안으로 미래를 멋대로 본 대가일까.

     

    라스는 그녀가 본 어떤 미래에서도 생존해 있었다.

     

    5년 후에도, 6년 후에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살아만 있던 걸까.

     

    그 장면들이 현실에서 이어지는 미래가 아니라고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방심했다.

     

    전장은 위험하니 옥체를 지키라는 라스의 조언을 반쯤은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자신이 이런 곳에서 황제가 되기 전에 죽을 리가 없다고, 라스 역시 죽을 리가 없다고 무의식 어딘가에서 확신하고 있었을까.

     

    그래서 전장 한복판으로 기어들어가겠다는 그의 요청을 쉽게 허락했다.

     

     

    그래선 안 됐는데.

     

     

    아니, 지금은 전부 쓸모없는 생각이다.

     

    후회만큼 의미 없는 행동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하지만 뇌세포는 의미 없는 생각을, 가정을 향해 계속 꼬리를 물어간다.

     

     

    아셀라는 치밀어오르는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해있다고 깨달았다.

     

    깨달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눈앞의 타냐에게 어쩔 줄 모르고 모두 터트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탓해야만 한다. 탓하지 않으면 자신이 라스를 죽인 것만 같아지니까.

     

    …아니지.

     

    얼마나 더 탓하든, 라스가 돌아올 일은.

     

    “…하.”

     

    아셀라가 손을 거두고 타냐에게서 등을 돌렸다.

     

    말없이 걸음을 옮긴다.

     

    기사들이 숨죽이고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 도중.

     

    “아아아아아아악!!”

     

    아셀라가 양손을 꽉 쥐며 비명을 내질렀다.

     

    ―콰아앙!!

     

    본능적으로 내뿜은 마나가 그녀를 중심으로 폭발하며 지면에 거대한 금을 남겼다.

     

     

     

    ***

     

     

     

    눈밭에 엎어진 바위족 족장의 시체는 그다지 들춰보고 싶은 상태는 아니었다.

     

    떨어지기 직전에 타냐에게 깔끔하게 목이 잘렸으니까.

     

    덕분에 목걸이 형태인 아티팩트도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니 뭐.

     

    시체를 안 건드려도 되니 잘 됐나?

     

    “전설급이지. 원래는 이놈을 토벌해도 제국에 귀속돼서 손에 못 넣는 건데.”

     

    목걸이를 손에 집어 드니 상태창에 정보가 표시됐다.

     

     

    ―――――――――――

     

    · 어둠 화신의 아뮬렛

    – 전설급 아티팩트

    – 사용 효과 : 상급 이하의 저주를 생성하거나 조종합니다.

    – 관련 아티팩트 : 영겁의 폭풍석

     

    ―――――――――――

     

     

    바위족 족장은 주술사라도 흉내만 낼 뿐이지, 직접 강력한 주술을 만들 실력은 없다.

     

    애초에 야만족이다. 주술도 저주 계통이라 보면 결국 흑마술의 범주에 들어가니 마력이 필요하다.

     

    족장이 강력한 강화 주술을 쓸 수 있었던 건 이 아티팩트 덕분이었다.

     

    “상급 저주 생성 능력으로 주술을 만들어 자신을 강화했겠지.”

     

    아셀라도 두 번인가. 이걸로 저주를 만들어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써먹기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야. 아래로 떨어진 덕분에 이런 걸 다 줍잖아.”

     

    아티팩트 자체가 희귀하기도 하지만 전설급은 더더욱 희귀하다.

     

    내 재능을 열어준 [계시의 성배]도 전설급보다 한 단계 아래인 영웅급 아티팩트다.

     

    “가져다 팔기만 해도 팔자를 고치지.”

     

    그렇다고 이 목걸이를 진짜 내다 팔 순 없겠지만.

     

    상급이나 되는 저주를 멋대로 만들어내는 아티팩트니 혹시 흑마술사나 마왕군 손에 들어가는 날엔 더 귀찮은 일이 생긴다.

     

    설명 맨 밑줄이 신경 쓰였다.

     

    “관련 아티팩트, 영겁의 폭풍석.”

     

    목걸이 가운데에 홈이 파여있다.

     

    딱 맞는 짝을 여기에 끼워 넣어 결합하라는 듯 만들어놨다.

     

    “폭풍석은 분명 천둥족 족장이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 아티팩트는 야만족들이 어디 고대 재단에서 발견해 나눠 가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대대로 족장에게 내려온 건가.

     

    “두개를 합치면 어떻게 되지?”

     

    상태창으로 관련 설명을 읽는다.

     

     

    ―――――――――――

     

    · 폭풍이 치는 어둠 화신의 아뮬렛

    – 신화급 아티팩트

    – 사용 효과 : 최상급 이하의 저주를 생성하거나 조종합니다.

     

    ―――――――――――

     

     

    “신화급이 되는구나.”

     

    효과는 심플했다.

     

    상급 저주까지 만들 수 있던 한계가 최상급까지 올라간다.

     

    그야말로 저주 마스터가 된다.

     

    “흑마술사들이 진짜 좋아하겠는데.”

     

    다른 쪽 효과도 눈에 띄었다.

     

    저주를 ‘조종’한다는 부분이다.

     

    “이미 생성되어서 작동 중인 저주를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뜻 같아.”

     

    써먹을 곳이 바로 생각났다.

     

    계획 중인 아셀라의 디버프 제거 수술이다.

     

    휴고의 의견으로는 아셀라의 뱃속에는 저주를 유발, 혹은 저주 그 자체인 영혼이 있다.

     

    아까 족장을 해주할 때처럼 해주 대상이 날뛰면 쉽지 않아진다.

     

    휴고가 손이 빨라서 다행이었지.

     

    심지어 아셀라의 배를 짼 상황에서 해주를 하게 될 테니, 더욱 위험한 상황이다.

     

    그때 마구잡이로 날뛸 저주를 얌전하게 제압할 수 있다.

     

    “바로 이거야.”

     

    든든하게 써먹을 수 있겠다.

     

    나는 목걸이를 눈에 닦아 족장의 냄새를 지우고, 직접 목에 걸어보았다.

     

    “흠.”

     

    생각보다 대단한 변화는 없었다.

     

    손끝의 감각이 예민해진 정도가 전부였다.

     

    어디서 잃어버리면 안 될 중요한 아티팩트니 당분간은 목에 걸고 다녀야겠다.

     

     

    구체적인 수술 계획을 잡아 아티팩트의 사용 순서를 정하려면, 아셀라의 뱃속에 담긴 저주의 등급과 종류를 파악해야 한다.

     

    “스킬.”

     

     

    ―――――――――――

     

    · [응급처치C]가 [응급처치B]로 랭크가 올랐습니다.

    · [처방C]가 [처방B]로 랭크가 올랐습니다.

    · 새로운 스킬 1개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

     

     

    “좋아.”

     

    그간 자원봉사와 이번 전장에서 얻은 경험치 덕에 스킬 랭크가 올랐다.

     

    현재 선택지는 [CT촬영], [MRI], [복강경수술]의 세 가지다.

     

    어느 쪽을 습득할까.

     

    “아셀라의 저주가 뭔지 알아내는 게 최우선이야. 휴고가 연구할 시간도 필요하니.”

     

    보다 입체적으로 내부를 촬영하기에는 고주파를 사용하는 MRI가 유리하다.

     

    하지만 현재 아셀라의 환부는 복부, 그것도 장기로 추정된다. 보통 여기에는 엑스선을 쓰는 CT가 낫다.

     

    “대부분 질병을 측정할 땐 정확도가 비슷하다는 연구결과가 있기도 했고. 엑스선은 낮은 확률이지만 부작용이 있기도 해.”

     

    휴고가 저주를 분석하려면 다양한 대상을 촬영한 사진이 필요하다.

     

    기왕이면 여러 각도에서 찍은 쪽이 낫다.

     

    “MRI로 가자.”

     

    결정했다면 신속하게.

    상태창을 터치해서 스킬 습득을 마쳤다.

     

    “자, 문제는 여기서 돌아가야 스킬이든 아티팩트든 실험해 볼 텐데.”

     

    여전히 절벽 위는 끝도 없이 높았다.

     

    “어이―!”

     

    소리를 질러보지만 골짜기 틈새로 부는 돌풍에 내 목소리가 묻혀버렸다.

     

    “설마 죽은 줄 알고 돌아가진 않겠지.”

     

    타냐라면 내 시체를 가지고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내려와 줄 거다.

     

    그렇다고 이 추운 눈밭에 몇 시간이고 서있기도 뭐하고.

     

    “이러면 되겠지.”

     

    마침 바닥은 다리가 푹푹 빠지는 새하얀 눈밭이다.

     

    나는 한참을 움직여 ‘살았음’이라고 누구나 볼 수 있게 커다랗게 글자를 새겼다.

     

    가로 반경이 20미터는 되는데 설마 못 보진 않겠지.

     

    “좀 쉬어야겠어. 신성력도 다 썼고.”

     

    절벽 사이의 틈새를 찾으러 몸을 움직였다.

     

     

     

    운 좋게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을 하나 찾아 안에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구조대가 언제 올지 모르니 눈은 뜨고 기다리기로 했다.

     

    “후우.”

     

    대자연 속에서 홀로 숨을 돌리니 조금 침착해졌다.

     

    길지 않은 휴식일 테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기로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타냐가 내려와 주겠지.

     

    “죽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타냐나 클로에, 휴고, 내 치유사들은 꽤 걱정하고 있을 것 같다.

     

    아셀라는 글쎄, 어떨까.

     

    문득 그녀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구조대 편성 완료했습니다.”

     

    “강하를 시작하겠다.”

     

    타냐가 월광궁 기사 서른과 함께 서로 허리에 밧줄을 동여맨 채로 절벽 앞에 섰다.

    중앙 성채에서는 1연대가 구조된 피난민과 백작을 남쪽 성채로 유도했다.

     

    타냐는 그들과 합류하지 않고 골짜기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라스가 살아있다는 희망은 사실상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의 시체라도 가지고 후작가로 돌아갈 의무가 있었다.

     

    타냐가 발을 내딛으려던 때, 옆에서 한 발짝 먼저 나서는 이가 있었다.

     

    “출발해.”

     

    중무장을 한 아셀라가 허리에 밧줄을 묶으며 명령했다.

     

    타냐가 당황하며 그녀를 만류하려 했다.

     

    “황녀 전하.”

     

    아셀라가 타냐를 재릿 노려보며 날카롭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못 들었어? 출발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말일이네요! 마침 작중 날짜도 12월 31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연재하며 맞는 두 번째 연말이네요.
    그때도 [배신레드]를 연재하며 쓰고 읽기만 하다가 새해를 맞았는데, 올해도 완전히 똑같네요!
    한 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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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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