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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엘라 양.”

         

       원더스타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그렇듯 변함없는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사람을 약 올리는 듯한 뻔뻔하고 장난스러운 미소.

         

       그의 웃는 낯짝을 본 순간, 엘라는 짜증이 치미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탁 놓였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누구를 걱정한 거람?

       마음 쓸 사람이 따로 있지.

         

       “나 온 거 알고 있었어?”

         

       그녀는 최대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투는 차갑게 들리게 하려고 애썼다.

       자신이 그를 안쓰럽게 생각했다는 것을 혹시나 그가 알아차리면 어쩌나 싶어서.

         

       “저렇게 소란스럽게 떠드는데 어떻게 모를까요?”

         

       밖에서 또 왁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벤이 또 누군가의 연기를 흉내 낸 모양이었다.

         

       엘라는 그의 손에 따뜻한 김이 나는 차가 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찻잔에서 손을 떼는 날이 없네.”

       “차를 좋아하거든요.”

       “호텔에서 타주는 차는 손도 안 댔으면서.”

       “유라크네 씨가 끓여주는 차는 다르죠, 후후.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쩐 일이시죠? 몸도 아직 다 안 나은 것 같은데.”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뭐. 솔직히……. 음, 걱정했거든.”

       “저를요?”

         

       그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엘라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누가 당신 따위를 걱정했겠어? 당신이 공연을 망치는 건 아닐까 걱정한 거야! 토마토라도 날아오면 어떡하나 하고!”

       “토마토라뇨?”

         

       그녀는 조금 숨을 가라앉혔다.

       그를 걱정했냐는 말에 괜히 제 발 저려서 흥분하고 말았다.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최대의 굴욕이지. 너무 재미없는 공연을 보면 관객들이 토마토를 던진다고 하거든.”

         

       원더스타인이 흥미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정말인가요?”

       “속설이지. 잡지에서 조사했는데 지난 30년간 딱 한 번 있었대.”

         

       그녀는 팔짱을 척 끼고는 그가 입고 있는 보라색 연미복을 자세히 뜯어봤다.

         

       “옷은 또 당신 마법으로 만들었나 보네.”

       “어떻게 알았나요?”

       “하루 만에 품이 딱 맞는 옷이 어디서 튀어나오겠어? 음, 보자……. 괜찮은 조합이긴 하네. 그 복장에 웃는 광대 얼굴이라……. 꽤 섬뜩한 느낌을 주겠는걸. 그건 그렇고 광대 분장은 벌써 지운 거야? 보고 싶었는데…….”

       “내일이면 또 볼 수 있을 거예요. 적어도 이번 시험 동안은 제가 사회자를 계속 맡을 거니까요. 설마 무대에 오르겠다고 온 건 아니죠?”

         

       엘라는 다리를 꼬며 코웃음을 픽 쳤다.

         

       “걱정하지마. 그러고 싶어도 옷이 없어. 제복을 집사 할아버지한테 뺏겨버렸거든. 그 할아버지 겉으로는 허허 웃고 있으면서 속에는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단 말이야. 그것보다 공연 얘기나 해줘.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단원들한테서 들었잖아요?”

       “사람마다 보는 느낌이 다 다르잖아. 사회자 입장에서도 듣고 싶어.”

         

       서커스가 주제가 되자 엘라는 삐딱하게 선 자세를 고치고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원더스타인은 속으로 웃음 지었다.

       하여간 못 말리는 서커스 마니아다.

         

       그는 우선 자신이 어떻게 이 분장을 고안했는지부터 설명했다.

       몇몇 동작이나 말투는 엘라가 재연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녀와 1대1로 마주하고 연기를 한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웃는 남자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지 못한 인간 연기를 보일 수 있었다.

         

       엘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쓴 대본……. 당신이 진행자를 맡는 시점에서 보고 쓴 거구나.”

         

       그가 준 대본에서 그녀가 가장 수정을 많이 가한 부분이 바로 사회자 부분이었다.

       뭔가 묘하게 대화의 초점이나 웃음의 포인트가 엇나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고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은 원더스타인의 캐릭터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연기였다.

       시시때때로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도 그렇고, 묘하게 빈정거리는 태도도 그렇고.

         

       TT1에서의 원더스타인은 서커스단 단장 콘셉트에 충실했다. 보스전에 들어갈 때면, 항상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와 단원들을 소개했고, 보스들의 공격 단계가 바뀔 때도 뒤에서 해설하거나 막간의 농담을 끼워 넣곤 했다.

         

       그것을 모르는 엘라는 다시 한번 그에게 감탄했다.

       그녀가 보기에 처음 대본을 썼던 시점부터 그는 자기 자신의 진행자 캐릭터 역시 고려해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무리 멘트와 커튼콜까지 지켜본 엘라는 혀를 할짝거렸다.

         

       맛있다.

       그녀가 연출한 것에 비해 호흡이나 흐름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확실히 맛있는 무대였다.

         

       “……예상외로 잘했네.”

       “의왼가요?”

         

       그녀의 칭찬에 원더스타인은 속으로 상당히 뿌듯했다.

         

       트위치 생방송 최대 시청자 수를 들먹이며 허세를 피웠지만, 인터넷 생방송과 진짜 무대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웃는 남자로 평정심을 가장하고, 게임에서의 원더스타인 캐릭터를 흉내 내고, 화장으로 어색한 표정을 숨기는 등 책략이라는 책략은 다 동원해서 겨우 마무리한 무대였다.

         

       공연 보는 눈 하나만은 정확한 엘라에게서 ‘잘했다’라고 소리를 들으니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솔직히 말해서……당신을 믿지 못했어.”

       “그랬나요?”

       “그렇잖아. 당신 같은 사람을 어떻게 믿겠어? 꿍꿍이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인간을.”

         

       엘라의 말에 원더스타인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과거의 그는 확실히 그런 인간이었고, 지금의 그도 솔직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가지는 알겠어. 서커스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은.”

         

       그가 왜 서커스에 그렇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 고작 서커스단 단장 따위나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그래도 그가 쓴 대본, 단원들에게 베푸는 친절, 그가 무대에 오르기 위해 한 노력, 그리고 수탉 미노바에게 당당한 승부를 제안한 것을 봤을 때, 서커스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짜라고 생각됐다.

         

       “그러니 남은 5일도 잘 부탁해. 적어도 이제는 무대 위에서의 당신은 믿을 테니까.”

         

       비록 한시적인 관계이지만.

       절대 계속하지 못할 관계이지만.

       결코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둘은 적어도 서커스 하나에 관해서는 서로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긴 하네? 단원들의 괴물 연기에 어울리는 방법이 당신이 사람 연기를 포기하는 거라는 게.”

         

       원더스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원더스타인 연기를 한 거였는데…….

         

       하지만 변명할 수는 없었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그가 원더스타인이 아니라는 것부터 이해시켜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런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터였다.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겠지.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무래도 집사가 술과 안주를 들고 온 모양이었다.

         

       원더스타인은 그녀에게 나가보라고 눈짓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쳐다봤다.

         

       “저기 있지…….”

       “네?”

       “그……밖에 나와서 축하사라도 한마디 하는 게 어때?”

         

       원더스타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을까?

       축하사라고?

         

       “제가요?”

       “아니, 뭐……단장이라는 양반이 너무 겉돌면 집사 할아버지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냐……. 그리고……무엇보다 우리 서커스단의 공식적인 첫 공연이잖아? 단장의 한 마디가 없으면 섭섭하지.”

         

       그녀의 권유에 원더스타인은 잠시 고민했다.

         

       단원 퀘스트가 뜨지 않았다.

       원래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보상도 없고 단원들의 호감도를 떨어트릴 수 있는 행위는 하기 싫어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엘라가 한 번 쓰러지는 것을 본 뒤로 그는 시스템에 대해 조금 냉정해졌다.

         

       “좋습니다.”

         

       연습실에는 제법 풍성한 상이 차려졌다.

       단원들이 음식을 타러 갔을 때는 결코 받아보지 못했던 상차림이었다.

       그들은 항상 쭈뼛쭈뼛 들어가 주방에서 주는 것만 겨우 챙겨서 나왔다.

       그나마도 지금처럼 식사 시간 외로 가면 빵이나 과일 같은 것밖에 받지 못했다.

         

       그런데 바텔은 정규 식사 시간에도 받아보지 못한 호화로운 정식을 받아왔다.

       원더스타인은 이것이 저택의 하인 하녀들을 오랫동안 쥐락펴락해온 집사의 솜씨인가 싶었다.

         

       엘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주스가 채워진 잔이 들려 있었다.

         

       “오늘 다들 너무나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들 제가 빠졌는데도 빈자리를 너무 잘 메꿔주셨어요. 아직 5일이나 남았으니 너무 긴장 풀지 말고 간단하게 마시고 놀아요.”

         

       그녀는 잔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서커스 그랑프리 본선을 향하여!”

       “향하여!”

         

       단원들이 그녀의 마지막 말을 따라 외쳤다.

       그녀는 원더스타인을 바라보며 당신은 할 말 없냐는 눈빛을 보냈다.

       다른 단원들의 시선도 모두 그를 향했다.

         

       여전히 어려운 단장이긴 했지만, 예전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다.

       함께 무대에 선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지난 3개월간 가까워지고자 노력했던 거리를 단숨에 좁혀버렸다.

         

       원더스타인은 그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잔을 들었다.

         

       “우리 부단장의 건강을 위하여.”

       “위하여!”

         

       단원들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잔들이 서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엘라의 호감도가 5 올랐습니다.]

       [스벤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밴딕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마야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

       [유라크네의 호감도가 4 올랐습니다. 호감도 30을 달성한 보상으로 <인스피라: 벽 타기>가 유라크네에게 제공됩니다. 현재 호감도: 33 (다음 보상: 호감도 50)]

       [우몬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호감도 15를 달성한 보상으로 <인스피라: 칼날 저글링>이 우몬에게 제공됩니다. 현재 호감도: 16 (다음 보상: 호감도 30)]

         

         

       홍수처럼 쏟아지는 알림창들.

         

       단원들은 분명 그가 나오는 것을 그렇게 갈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원 퀘스트가 뜨지 않았다.

       시스템은 정확했다.

         

       하지만 때로는 상대가 머뭇거리는 선을 넘음으로써 사람의 마음은 가까워지기도 했다.

         

       원더스타인은 자신이 오랫동안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잊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에 틀어막혀 모니터 너머로만 사람과 소통을 했다.

       시청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그걸로 수입을 얻었다.

         

       여기 와서도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

       시스템이 컴퓨터의 역할을 대신했을 뿐이다.

       그러다 정말 오랜만에 그것에서 벗어났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오랜만에 보육원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트라이머리는 오늘 있었던 공연에 대해 다시 떠들어댔다.

       엘라는 아까 들은 이야기였지만 처음 듣는 것처럼 맞장구를 쳐주었다.

       누구나 처음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을 못 잊는 법이었다.

         

       스벤은 상에 놓인 음식을 가리키고는 “신선한 고기다!”를 외치며 우몬의 연기를 흉내 냈다. 우몬은 계속되는 그의 짓궂은 장난에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밴딕과 요벨은 구석에서 말없이 술을 주고받았다. 둘 앞에 놓인 술병들을 보니 둘은 적당히 마시자는 엘라의 말을 이미 까먹은 듯했다.

         

       유라크네는 원더스타인을 붙잡고 자신의 요부 연기가 어땠는지 계속 따져 물었다. 그녀는 잘 어울렸다는 말에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고, 안 어울렸다는 말에는 속상함에 얼굴을 붉혔다.

         

       마야는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음료를 마셨다.

         

       엘라는 차가운 잔에 얼굴을 기대며 남몰래 미소지었다.

         

       이거였다.

       이거였다.

       바로 이거.

         

       이것이 그를 처음 만난 날,

       그가 함께 가자고 권유를 했던 날,

       그녀가 기대했던 풍경이었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2년 3개월을 버티는 거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그럼 개인기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젓가락을 집어 들어 그 위에 접시를 빙글빙글 돌렸다.

       거기까지는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가는 접시 위에 다시 젓가락을 세우고는 그 위에 다른 접시들을 또 돌렸다.

         

       “뭐, 뭐야?”

       “저게 가능해?”

       “놀랍군요.”

         

       접시와 젓가락의 개수가 늘어갈수록 사람들의 탄성은 점점 커졌다.

         

       관객들의 열띤 호응은 곡예사들의 행복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서커스단 안에서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웃는 동료들 사이에서 그녀는 서커스의 신 키르쿠스에게 빌었다.

         

       그와 헤어지는 날까지.

       아무도 다치고 죽는 일 없이.

       이대로 계속되기를.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네미아 님, 5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저번 편 작가 후기에 올린 ‘루즈 편’은 지금 있는 도시, 루즈를 의미한 거였습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I Became the Leader of the Monster Circus Troupe

괴물서커스단의 단장이 되었다
Score 4.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The protagonist, a famous YouTuber known for playing the game trilogy “Tril Trilo Trilogy,” finds himself possessing the final boss of the game world. Before the release of the new instalment in the series, he receives an offer from the game’s developer to play a prequel, “Part 0,” which explores events that occurred before the first instalment. Since he is a fan of “Tril Trilo Trilogy,” he eagerly accepts the offer. However, through some twist of fate, he wake ups in the world of “Tril Trilo” in the dreadful body of the final boss of the trilogy, a character named Frank Wond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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