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8

       엘리의 모습을 보고 기분 좋아져서 헤실대던 것도 잠시.

       

       쿠웅!

       

       돌연 카운터 위로 폴짝 뛰어올라 이쪽을 내려다보는 보라색 머리 꼬맹이.

       

       “야. 네가 리디아가 말한 그 짐꾼 꼬마냐?”

       

       그 말을 듣자마자 녀석의 꼬락서니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마녀를 연상시키는 고깔모자.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웨이브 진 보라색 머리카락. 살짝 치켜 올라간 고양이상 이목구비.

       

       착 달라붙는 드레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어 몸매가 훤히 드러났지만…작은 키만큼이나 납작한 가슴 때문에 별로 야하지는 않았다.

       

       건전함 그 자체.

       

       즉, 나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어린 리얼 꼬마.

       

       이를 인식하는 순간 내 안에서 모종의 스위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도 꼬마면서 왜 반말이냐?”

       

       유교 스위치 ON!

       

       내 말에 순간 움찔했던 보라 꼬맹이가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콩콩.

       

       “뭐어? 지금 누가 누구보고 꼬마라고?”

       

       체중 전체를 실어 점프했던 조금 전과 달리 발만 움직인 탓에 가볍기 짝이 없는 소리.

       

       별로 위협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녀가 발을 구르는 곳이 다른 어디도 아닌 카운터라는 점이다.

       

       그리고 요정과 은화의 카운터는 바bar스타일 주점의 그것과 동일하다. 단순히 계산하는 곳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는 뜻.

       

       즉, 식탁이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년. 먹을 거 놔두는 곳에 발 올려두면 안 된다고 부모님한테 안 배웠어?”

       

       “어. 나 부모님 없는데.”

       

       “이런 우연이네. 나도 없는데.”

       

       “…….”

       

       “…….”

       

       조금 미묘해진 분위기 속에서 서로 노려보던 것도 잠시.

       

       보라 머리 꼬마가 다시 폴짝 뛰어 카운터에서 내려와 자신을 소개했다.

       

       “난 꼬마가 아니라 베니타스 베니베니. 리디아의 원래 동료야.”

       

       “뭣…!”

       

       사람 이름이 어떻게 베니타스 베니베니.

       

       속으로 식겁하며 자신을 베니베니라고 소개한 녀석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카운터에서 내려온 덕에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된 키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작은 수준.

       

       혹시 키만 작은 건가 싶어 얼굴을 다시 한번 뜯어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앳된 외모만 보일 뿐이다.

       

       …조금 귀엽긴 하군.

       

       다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베니베니의 눈동자.

       

       자수정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에는 특이하게도 하트 모양 동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입술 사이로 슬쩍 보이는 이빨은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삐죽삐죽 나 있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종족이 뭐야? 혹시 서큐버스?”

       

       “그럼 넌 인큐버스고? 사람 홀리는 권능을 뭘 그리 덕지덕지 둘렀대.”

       

       인상을 찌푸리며 한 발짝 물러서는 베니베니. 아무래도 향기로운 체취와 촉촉한 피부 권능을 알아챈 듯하다.

       

       “…이걸 알아보네.”

       

       “당연하지. 고위 마법사라면 누구나 가능…잠깐. 너 지금까지 안 믿고 있었어?!”

       

       “…….”

       

       대답하는 대신 옆에 있던 엘리를 살펴보았다.

       

       흥이 깨졌는지 대딸 모션 대신 컵이나 닦고 있던 엘리가 힐끗 이쪽을 바라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베니 맞아. 오랜만이네. 한다는 일은 잘 끝났어?”

       

       “그러엄! 내가 누구? 크리피 위치 베니베니 님이다 이말이야! 마탑의 노친네들 연구는 식은 죽 먹기지!”

       

       “그럼 보수로 해보겠다는 네 연구는?”

       

       “…또 실패했어.”

       

       투덜거리며 카운터 앞자리에 앉는 베니베니. 그 모습을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 리디아 님 동료 베니?”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막 무서워? 괜찮아. 난 관대하니까. 모르고 꼬마라고 부른 건 용서할 수 있….”

       

       “이런 꼬마인데?”

       

       “…야!”

       

       결국 빡친 베니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뒤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갑자기 솟아오르더니, 검은색 찰흙 덩어리로 화했다.

       

       바닥에 붙어있어야 할 그림자에 순식간에 높이라는 개념이 생긴 느낌.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그림자였던 덩어리에 순식간에 무언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충혈된 눈동자, 상어 이빨, 녹아내린 듯한 손, 깃털이 듬성듬성 빠진 날개, 잔가시, 길게 솟은 뿔, 끈적한 점액에 뒤덮인 혀, 반쯤 부패한 부리….

       

       온갖 징그러운 것들을 한데 뭉쳐 놓은 악몽 같은 광경.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 나쁜 메슥거림이 올라온다.

       

       과연. 이래서 이명이 크리피 위치Creepy Witch인가.

       

       딱히 공격할 생각은 없는지 그림자 괴물을 그냥 멀찍이 꺼내놓기만 한 베니. 엘리도 이를 잘 아는지 눈을 가늘게 떴을 뿐, 말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세상이! 진짜 베니 님이셨군요! 아이참. 너무 젊어 보여서 제가 못 알아봤네요! 리디아 님한테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간신배처럼 손을 싹싹 비비며 아부 모드에 들어갔다.

       

       응. 고위 마법사에 리디아의 동료가 맞으면 이게 맞지.

       

       저 어려보이는 외견도 무슨 마법으로 어떻게 한 게 분명하다. 저런 괴생물체를 만들어 내는데, 회춘 하나 못하겠는가.

       

       물론 베니는 이런 내 모습에 기겁한 것 같지만.

       

       “태세 전환이 무슨….”

       

       해괴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그녀가 스윽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뭐어. 님은 너무 낯 간지러우니까 그냥 베니라고 불러.”

       

       “아까는 자기 입으로 베니베니 님이라고 했으면서요?”

       

       “내 입으로 말하는 거랑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거는 다르거든?! 됐으니까 님자 빼! 어차피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넹. 그럴게요 베니.”

       

       그제야 조금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베니. 그 사이에 슬쩍 그림자 괴물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헤에. 되게 징그럽게 생겼네요. 설마 이거 마법인가요?”

       

       “…뭐어. 비슷한 거지.”

       

       그리 말하며 슬쩍 손가락을 까딱이는 베니. 그녀의 손짓에 따라 실체화된 그림자에서 기다란 촉수가 뻗어 나온다.

       

       끈적한 점액질 범벅이 된 촉수가 조금 전까지 베니가 올라갔던 카운터 위를 쓸었다.

       

       점액에 엉겨 함께 벗겨져 나가는 흙먼지. 그렇게 남은 점액은 촉수와 떨어지는 순간 그림자가 되어 다시 베니의 발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있던 흙먼지는 어딘가로 사라진 채로.

       

       “히야.”

       

       그러고 보니 일전에 리디아에게 듣기로 베니는 특이한 마법을 써서 통째로 몬스터 시체를 삼켰다가 부산물과 핵만 뱉어낸다고 했었지.

       

       그게 아마 이건가 보다.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니는 다 생각이 있었군요? 카운터에 흙발로 올라간 건 좀 그렇지만, 깨끗하게 청소했으니 용서해 드리기로 할게요.”

       

       “…누가 누굴 용서한다는 건지.”

       

       베니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는 신기하다는 듯 내게 되물었다.

       

       “너. 이름이….”

       

       “요나에요.” 

       

       “그래 요나. 너는 이게 무섭지 않아? 너 같은 건 한입에 와앙! 삼킬 수 있는데?”

       

       자신의 그림자에서 솟아난 흉물을 가리키는 베니.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가 왜 무서워해야 하죠?”

       

       “이잉?”

       

       “아니. 그렇잖아요. 리디아 님의 동료라면 일단 인성은 좋은 분이라는 거 아닌가요?”

       

       “어, 음. 그렇…지?”

       

       “거기에 엘리가 조금 째려보긴 했어도 그 이상은 움직이지 않을 걸 보아, 딱히 절 해치려는 생각도 없었던 것 같고요.”

       

       아무리 날카로운 검도, 빛처럼 빠른 화살도, 성을 무너뜨리는 대마법이라도.

       

       결국 내게 향하지 않는다면 결코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내 말을 들은 베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고? 이 짧은 사이에?”

       

       “아뇨? 사실 이건 나중에 덧붙인 거예요. 그냥 저는 무슨 일이 있으면 엘리가 구해줄 거라고 생각해서 뻗댔을 뿐이에요.”

       

       “……방울뱀.”

       

       “실례네요. 남편 후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남, 편?”

       

       베니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커진 눈으로 엘리를 돌아보았다.

       

       도둑놈을 넘어 범죄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엘리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거든? 그냥 요나가 일방적으로 그렇게 말한 거지, 베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거든?”

       

       “너무해요 엘리! 어제…아니, 그제는 밤새 저로 딸치셨으면서!”

       

       “……!”

       

       베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고, 뾰족뾰족한 상어 이빨 사이에서는 경멸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우우. 쓰레기.”

       

       “크윽!”

       

       조용한 베니의 매도에 엘리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왜일까. 엘리처럼 쿨하고 멋있어 보이는 여자가 수치심과 죄책감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인단 말이지.

       

       다만, 여기서 더 괴롭히면 엘리가 너무 불쌍하니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너무 엘리 보고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저 모솔 아다라서 남자에 면역이 없을 뿐이니까요.”

       

       “…요나 네가 제일 나빠.”

       

       토라진 듯 투덜거리는 엘리의 반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에는 리디아 님의 가슴을 주물렀으니, 다음은 엘리의 차례로 할까 고민했는데. 없던 일로 해야겠어요. 엘리는 그냥 구경이나 하세요! 엘리 방에 널려있는 빨간 책처럼! …빨간 책처럼!”

       

       순간 혹했는지 귀를 쫑긋거리는 엘리. 하지만 이내 무언가 떠올렸는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거절했다.

       

       “안돼. 저번에는 말하지 못했지만 요나 너는 네 몸을 좀 더 소중히 여겨야…….”

       

       엘리가 또 엘리다운 말을 하며 뒤로 빼려는 순간. 베니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 그그극….”

       

       “베니? 진정하고 우선 심호흡부터 해보세요.”

       

       “히히후…히히후….”

       

       시키는 대로 얌전히 심호흡을 한 베니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울먹였다.

       

       “내 파티를 무너뜨리러 잠입했구나! 이 간악한 음마 놈아!”

       

       “?”

       

       인큐버스 아니라니까요.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잠깐 개인적인 일로 한달정도 쉬고 왔더니, 하나뿐인 파티원과 믿을 수 있는 선배가 한 남자에게 홀려있는 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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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Gacha Addict in a Matriarchal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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