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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오후 수업시간 도중에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인 점은, 이제는 조금 늦게 간다고 하늘이가 물리적인 괴롭힘을 당할 거라는 걱정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반 아이들은 슬슬 하늘이를 두려워하는 수준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 기름을 부은 소희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교실 밖으로 나가려는 내 뒤로 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얼른 소희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나는 몇 번을 빠져도 성적에 영향이 없지만, 너는 영향을 받을 거야.”

        

       “받아도 별로 상관없는데?”

        

       아무래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니, 상관있어. 자칫 잘못해서 다음 학년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되거나, 학교에서 징계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뭐, 뇌물 때문에 그게 쉽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보통 사람은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목숨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이다.

        

       그리고 보통 돈에 집착이 강하면 목숨에도 집착이 강하다. 삶 전반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는 말이니까.

        

       회장 편으로 돌아서겠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나와 소희를 떨어뜨려 놓기 위해서 조처를 할지 모른다. 거기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우리가 뇌물을 줬건 안 줬건 일단 한 대 맞기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대 맞는 것’때문에 반이 갈려버리거나, 최악의 상황에는 학년이 갈려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다.

        

       물론 나도 다른 애들이 따라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기왕이면 남들 없는 곳에서 나누고 싶은 대화였으니까.

        

       “…….”

        

       내가 소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강하게 말하자, 한동안 고민하던 소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몸을 돌려 교실 문을 향하는데, 의자가 드륵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따라오려는 건가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나를 향해서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는 소희가 있었다.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

        

       너무 자연스럽게 드나들어서 혹시 헷갈릴까 봐 말하자면, 나는 수업 시간에 교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쟤는 지금 수업 시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학생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쏠렸다. 심지어 수업하고 있던 선생마저 판서를 멈추고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소희의 얼굴에 칠칠치 못한 미소가 걸려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게 소희 나름의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마 재미들려서 내가 교실 나갈 때마다 저러는 건 아니겠지.

        

       *

        

       “오, 고객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벤치에 앉아있던 한가람 팀장이 반갑다는 듯 말했다.

        

       “……정말 어느 때나 여기에 있네요.”

        

       “이렇게 보여도 여기가 제일 좋은 자리거든요. 고객님이 언제 나올지 모르니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 거고요.”

        

       슬슬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긴 하지.

        

       그래도 여전히 조금은 쌀쌀하긴 했지만.

        

       “아, 혹시 제가 한직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뭐랄까, 원래 은행원이라는 사람은 바빠야 좋은 거 아닌가? 고객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잖아.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은행원을 이렇게 학교에 박아두고 쓰는 은행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화영 고등학교 출신인데. 연줄도 있는 사람을 은행이 아니라 여기에 박아두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그래요?”

        

       “그럼요.”

        

       한가람은 즐겁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수업시간 도중에 나오는 방법은 꽤 많은 법이니까요. 학생의 부모님이 전화로 급한 일을 부탁하셨을지도 모르고,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 할 일이 생기거나 몸이 좋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아.

        

       확실히, ‘절대로’나오지 못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교사진은 학생들이 어떤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대충은 알고 있으니까. 뇌물을 먹이는 것이 유진그룹만 있는 것도 아닐 거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가람이 앉아있는 벤치에 다가갔다. 내가 앉기 좋게, 한가람이 몸을 옆으로 옮겨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한가람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의견을 나누려고 오셨나요?”

        

       “……꽤 즐거워 보이시네요?”

        

       “그야 당연히 즐겁죠. 고객님과 대화하면 평소에는 생각도 하지 못한 돈의 단위가 나오니까요.”

        

       저는 돈을 꽤 좋아하거든요, 라고 말하는 그녀를, 나는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한가람 팀장은 덧붙이듯 말했다.

        

       “저는 돈이 좋거든요.”

        

       ……돈 싫어하는 사람 있나?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남의 돈이 아닌가?

        

       “그 왜, 있잖아요. 차를 좋아해서 레이싱게임을 한다던가. 실제로 그 모든 슈퍼카를 전부 살 수도 없고, 사실은 한 대도 살 수 있을까 말까 하지만 레이싱 게임을 하면서 만족감을 얻는 거죠. 현실에서는 차가 있어도 그렇게 신나게 달려볼 일도 없고. 제가 이 일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입니다.”

        

       그런 감각인가?

        

       하긴, 남의 것이라거나 가짜라는 이유로 다 치워버린다면 세상의 거의 모든 게임이나 영화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긴 할 것이다.

        

       “자, 그래서, 고객님.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갑자기 은행원 같은 말투가 된 한가람 팀장에게, 나는 굳이 다른 말을 붙이지 않고 바로 본론을 말했다.

        

       “지난번에 말한 15조 건에 대한 연장인데요.”

        

       “네.”

        

       한가람 팀장은 가방에서 수첩과 고급 펜을 꺼냈다. 지난번에도 꺼내놓고 하나도 안 썼던 것 같지만…… 뭐, 준비성이 있어서 나쁜 것은 없으니까.

        

       “만약 현 유진그룹 회장이 다른 그룹을 공격한다면, 최선의 방어는 무엇이 될까요?”

        

       “15조와 관계있다고 하신 걸 보면, 이것도 친구분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네요?”

        

       “그렇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가람은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최선의 방어는, 자신을 공격하는 기업의 주식을 일정량 이상 보유하는 거죠. 할 수 있다면 그 회사의 주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과 손을 잡거나.”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기본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거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고객님께서 가지신 유진 전자의 주식을 그대로 건네주실 생각은 그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 주식은 고객님께서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대항 수단이니까요.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기가 되는데, 괜히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힘을 약화할 이유는 없죠. 게다가 유진 전자의 주식은 그 가치가 어마어마합니다. 같은 가치의 주식으로 환산하려고 해도, 해당 기업이 너무 많은 주식을 고객님께 줘야 하는 일이 생길 수가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주식을 보유하는 방법은 많은 법이죠. 그거 아세요? 국민연금공단은 유진그룹 대주주 중 하나입니다.”

        

       한가람은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유진 생명은 단일 회사로는 유진 전자의 주식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죠. 회사 혼자서 13퍼센트 정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제가 알기로, 고객님은 그 유진 생명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

        

       전혀 몰랐던 정보다.

        

       아, 물론 유진그룹 내의 다른 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그룹 내의 기업 간의 위치는 잘 모르고 있었다.

        

       “물론, 현 회장님도 유진 생명의 주식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죠. 그래도 고객님께서 가진 주식에 비하면 절반이 채 되지 않습니다. 고객님의 아버님께서는 정말 세세한 부분에서 고객님을 많이 배려해주셨어요. 재산분배는 철저하게 돈으로만 따지니까요.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힘을 실어주신 겁니다.”

        

       “…….”

        

       “그리고, 그 유진 생명의 주식 가격은…… 생각만큼 크지는 않죠. 물론 국내 주식 내에서는 꽤 비싼 편입니다. 어쩌면 그 주식이라면 고객님께서 생각하시는 어떤 기업과 교환을 하더라도 엇비슷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그 주식을 받을 사람이 확실하게 고객님의 편이어야겠죠.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역으로 현 회장님과 손을 잡아버릴 수 있으니까요. 뭐, 그만큼 상대방의 주식을 틀어쥐고 있으면 무시하고 싶어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수아의 아버지에 대해서 믿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언제 한 번 얼굴을 뵈어야겠네.

        

       하긴, 결국 그렇게 되긴 했을 거다. 수아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그 아이디어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한가람 팀장은 어디까지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정말로 돈이 좋긴 한 모양이다. 단순히 돈을 좋아해서 모으기만 하는 사람과는 다르다. 돈이 움직이고, 그 돈에 의해서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쪽이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마 이 사람은 주식을 하면서 돈을 날려도 엄청나게 신나 할 거야.

        

       ……머릿속의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는 사람’의 위치에 한가람 팀장의 이름을 올렸다.

        

       참고로 최나경은 ‘아주 심각하게 위험한 인간’의 위치였다.

        

       “제일 좋은 건, 회장님께서 고객님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주식을 매입하는 거겠죠. 물론 유진 전자는 끊임없이 자사주를 매입해서 주가를 유지하고 올리는 편이라 돈이 아주 많이 들겠지만요.”

        

       그렇다. 한 주당 20원 남짓의 배당금은 영업이익과 주가를 생각하면 너무 짠 편이었다.

        

       유진 전자는 배당금을 짜게 주는 대신 끊임없이 자사주를 매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제든지 주식을 팔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고, 주가를 꾸준히 올리는 것이다. 배당금이 조금 짜더라도,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자산 가치가 그만큼 올라가니 만족도도 높은 모양이었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뭐, 주가가 높으면 나야 좋지.

        

       그렇다고 내가 주식을 사지 못할 수준도 아니다. 내 재산이 깎여나가지 않는 선에서 주식을 매입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다.

        

       나의 말을 들은 한가람 팀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요? 저에게 부탁하시는 건가요?”

        

       “제가 은행에 직접 갈 형편은 되지 않으니까요. 신탁 자산 중 제가 받아야 할 몫에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유진 전자의 주식을 매입해주세요.”

        

       “현명하신 판단이에요! 눈을 돌리기에도 좋구요.”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돈이 좋아서 은행원을 한다는 말은,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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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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