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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아스타시아를 지켜야 한다.

     설령 회귀에 대한 모든 걸 밝히는 한이 있더라도, 아스타시아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알겠다.”

     아버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를 늘리지.”

     “예?”

     “마법사도 고용하마. 내가 직접 검수하여, 아르쉔 같은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겠다.”

     “아버지.”

     “축제는…원래 그랬지만, 당분간은 더욱더 보류해야겠군. 외지에서 다른 이들이 들어오는 것도 계속 관리를 해야겠어.”

     “아버지는 혹시 아스타시아를 계속 영지에 둘 생각이십니까?”

     “그러면?”

     아버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스타시아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 건 네가 아니더냐.”

     “아닙니다. 아버지.”

     “…방법이 틀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예. 아스타시아를 지켜야 하지만, 지키는 건 지브롤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시선이 순간 내 손을 향했다.

     “…….”

     잠시 아래로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예. 솔직하게 말하면 지키고 싶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직접.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지키는 것처럼, 저 또한 아스타시아를 지키고 싶습니다.”

     “네가 클 때까지, 내가 대신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다.”

     “그건 새를 새장에 평생 가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키는 것과 오직 지키기만 하는 건 천지차이.

     “그저 아스타시아를 지키겠다는 이유만으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고 저택 내부에만 가둔다면, 그건 오히려 아스타시아를 좀 먹어들어가고 죽게 만드는 일입니다.”

     “밖에 나가는 것이 걱정이라면….”

     “제 2의 아르쉔 길라루스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말콤 집사장이, 카를로스 경이, 심지어 멘테 경이 어느 날 흡혈귀의 권속이 되어 습격할 수도 있습니다.”

     “…….”

     “샤를로트 백작 부인과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적이 동시에 노릴 때, 아버지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는 뻔하죠.”

     아버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언제나, 항상, 불변의 진리로서 존재하는 대전제였으니.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아스타시아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제국의 황궁입니다.”

     “뭐라?”

     “정확히는 황태자의 옆이죠. 제가 아버지 곁에 있는 것처럼, 그녀도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는 황태자 또한 같은 생각일 겁니다.”

     “어떻게? 그가 이곳의 일을 알고 있다는 말이더냐?”

     “황제와 황태자가 서로 척을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혈연이자 같은 제국의 황실 사람입니다. 황제가 아는 건 황태자도 압니다.”

     그 반대는 안 되겠지만.

     “그리고 애초에 황제 또한 아스타시아가 이곳에 있던 걸 알고 있었잖습니까?”

     “…그렇지. 이제와서 죽일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정부, 그러니까 첩과도 같은 존재가 아스타시아를 죽이기를 바라고, 지금 막 눈치를 챘다면요?”

     “…….”

     아직 그 대상이 이사벨라 황태자비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자는 분명 흡혈귀를 다루거나, 흡혈귀 그 자체인가.”

     “둘 중 어느 쪽이든 황제는 그 부탁을 거부할 수 없을 겁니다. 정확히는 모르는 척 하겠죠.”

     “흡혈귀들이 계속 지브롤터를 습격하겠구나.”

     “예. 황제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모른척 하겠지만, 제국 사람이 보낸 흡혈귀들은 끊임없이 지브롤터에 테러를 일으킬 겁니다.”

     그러니 답은 하나다.

     “…황태자는 분명 아스타시아를 빠른 시일 내에 회수하려고 할 겁니다. 제가 그녀를 지킬 수 없기에.”

     아스타시아는 위험하고, 그녀를 언제나 지킬 수단은 지브롤터에 없다.

     “물론 어떤 위험이 다가오든 다 막아낼 사람은 있습니다. 아버지죠.”

     “…….”

     “예. 아버지는 굳이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목숨 걸고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어머님도 아니고.”

     “크흠.”

     “저들은 저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실력이 실제로 어떠하든, 그들이 생각하는 위협 수준을 이겨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죠.”

     나는 아버지를 가리켰다.

     “제가 아버지만큼 강했다면 모를까.”

     “너는 강해질 수 있다.”

     “제 재능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만, 그건 ‘지금’이 아니잖습니까.”

     당연히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안다.

     이미 걸어본 길이고, 나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으니까.

     “제가 아무리 날고기어봐야, 하급 기사 수준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다.

     “저는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당연히.”

     너무나도 당연하지만.

     “지킬 수 있는 이들에게 아스타시아 황손녀를 맡겨야겠죠.”

     “나는….”

     “아버지는 아닙니다. 모르가니아도 아니고, 이 지브롤터 영지에 있는 사람도 아니죠.”

     현 시점.

     이유가 어떠하든, 아스타시아를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키는 것처럼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수호할 수 있는 이는 한 명 뿐이다.

     “황태자가 조만간 사람을 보낼 겁니다. 황손녀를 회수하기 위해.”

     믿는다.

     황태자든 황제든, 결국 둘 다 ‘합스베르크’라는 인간이다.

     뿌리도 같고, 이미 중년의 나이로 줄기가 굵어지고 열매까지 맺어 씨를 퍼뜨릴 만큼 커진 존재.

     내가 알고 있는 그 유능하고 효율에 미친 인간이라면, 분명 약간의 정보만으로도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결과대로 움직일 것이다.

     ‘회귀 전에도 믿지 않았는데,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믿어야 하는 게 이런 상황이라니.’

     통계이며, 믿음이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기를.’

     아무리 발버둥쳐도 고작 한 줌에 불과한 지금.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믿는 것 뿐이다.

     * * *

     제국 황성, 어느 한 작은 방.

     “…….”

     황태자는 셔츠에 바지만 입은 단촐한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누구 하나 없는 암실과도 같은 방에서, 그는 홀로 한참을 누워 있다가 옆으로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로 잡기에도 버거운 커다란 구체의 무언가.

     황태자의 손이 닿자마자 군청색으로 반짝이기 시작한 대형 마석의 빛이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무슨 통신이야?]

     수정구에서 여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업무 중이라 바쁜데요, 황태자 전하. 할 말 없으면 끊지?]

     “아스타시아.”

     […아스타시아가 뭐.]

     “네 딸, 내 아래로 다시 데리고 와야할 것 같다.”

     [뭐?]

     커다란 마석의 아래, ‘에르윈 아이페리아’라는 이름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계약 위반이잖아! 내가 그거 때문에-]

     “상황이 변했다. 내가-”

     [지브롤터에 보내서 지브롤터 사람을 유혹하라면서! 정기 보고는 듣고 있을 거 아냐!]

     “그래.”

     [심지어 내가, 내가…! 사진까지 직접 보냈어! 그런데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 말을…하아. 끊지마라.”

     황태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마석 옆에 놓여있는 인화된 사진들을 집어 들었다.

     “아스타시아가 누구를 닮아서 그런지 확실히 예쁘긴 해. 그레이 지브롤터라고 했나. 지브롤터의 도련님을 이렇게 목줄까지 차게 만들다니.”

     사진 속.

     아스타시아는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분명 그레이 지브롤터에게 직접 목줄을 채운 채, 흡사 귀족가 아가씨에게 사로잡힌 좀도둑처럼 아스타시아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사진을 본 순간, 황태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대외적으로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 연기를 하기 위해 이런 시늉까지 하겠지만, 과연 그냥 평범한 마음가짐으로 이렇게까지 할 수는 있을까?

     전혀.

     일말의 이성적 호감도 없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면, 그 남자는 고자이거나 짐승에게만 성욕이 일어나는 미친 존재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여준 그레이 지브롤터의 모습은 단적으로 ‘첫사랑에 빠진 소년’ 그 자체.

     “나라고 지금 이 상황에서 아스타시아를 지브롤터에서 빼내고 싶을까.”

     […무슨 소리야?]

     “그럴 상황이 생겼다.”

     그래서 너무나도 아쉬웠다.

     “아스타시아가 그레이 지브롤터를 유혹하는데 성공한 이상, 아스타시아는 무조건 지켜야 한다.”

     [누가 아스타시아를 노리기라도 한다는 소리야?]

     “노릴 예정이지.”

     아쉬웠기에, 황제를 향해 직접 험한 소리까지 내뱉으며 추궁했다.

     “이사벨라가 알아버린 것 같다. 아스타시아의 위치를.”

     

     마석의 너머, 숨소리가 잠시 멎었다.

     “아버지가 뱀파이어를 보내서 나리아 공주를 암살하려고 한 것 같은데, 흡혈귀 중 하나가 현장에 있던 아스타시아를 목격한 모양이다.”

     [그런….]

     “왜 하필, 이라고 따지지 마라. 애초에 그런 축제 상황에서 즐기도록 가만히 놔둔 건 너니까.”

     [……..]

     “위험하니까 축제는 나중에 즐기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에르윈?”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지금 그렇게 화를 낼 때가 아닐텐데.”

     황태자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짜증 낼 시간 있으면, 당장 지브롤터로 달려가.”

     [지금 당장?]

     “그래. 클레이돌 후작에게는 내가 통신을 보내두겠어. 네가 직접가서 아스타시아를 데리고 귀환하도록.”

     [……이상한 생각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상한 생각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거고, 나는 지금 아스타시아를 지키는데 진심이다.”

     황태자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지브롤터의 마음을 얻어냈는데, 그런 존재를 내가 미쳤다고 다치거나 죽이게 만들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아버지가 먼저 움직일 거다.”

     황태자가 마석을 빠르게 손으로 두드리자, 곧 마석 표면에 떠올라있던 네모난 무언가가 마석 안으로 쓱쓱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그 여자가 베갯머리에서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즉시 오염지대의 마수들을 폭주시켜 노스트럼으로 진격시킬 거야.”

     [그 사이에 흡혈귀들은 오염지대에서 내려와서 지브롤터를, 아스타시아를 습격할 거고?] 

     “그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당연하지.”

     황태자는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보육원은 백작성과 멀리 떨어져있고, 심지어 그곳을 지키는 인력도 적어. 나라면 상급 흡혈귀들을 보내서 저택을 포위한 다음, 실력자를 보내서 아스타시아를 암살할 것이다.”

     [그게 지금 할 소리야?]

     “할 소리지. 내가 생각하는 걸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못할까봐. 오히려 폐하가 아니라 이사벨라가 바로 아이디어를 떠올리겠군. 본인의 아들을 공식적인 황손으로 만들기 위해.”

     [큿….]

     “애초에, 너도 지금 내 말을 허투루 듣고 있지 않고 있잖나.”

     황태자는 피식 웃으며 마석을 손으로 쓸었다.

     “통화하면서 이미 몸은 차고로 향하고 있는 것 같군.”

     부ㅡㅡ웅.

     “대답 대신인 건가? 좋아. 어서 가. 이동 중에는 통신이 제대로 안 될 테니, 나중에 도착하면 다시 통화하지.”

     [알겠어. 그 대신…작별인사 정도는 하게 해줘.]

     “작별인사?”

     [내가 그냥 데리고 온다고 해도 납치하듯 데리고 올 수는 없잖아. 상황 설명 제대로 하고 데려와야지. 최소한…30분 정도는.]

     “물론이지. 그 정도도 못하게 할까봐. 오히려 좋겠어.”

     황태자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옅게 웃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애틋하게 헤어진다면, 그게 또 각별하게 마음 속에 남을 테니까.”

     

    * * *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제가 이곳에 있는 걸로 인해 나리아 뿐만 아니라 지브롤터 사람들이 모두 해를 입는 다면, 제가 없어지는 게 맞죠. 헤헷.”

     아니면 절망이라고 해야 할까.

     “괜찮아요. 으응,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잠깐 떨어지는 거잖아요?”

     내 방에 따로 아스타시아를 불러 이야기를 전하자, 아스타시아는 쓰게 웃으면서도 겸허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으음…. 아, 그래요. 어차피 저, 원래는 17살에 노스트럼으로 오기로 했던 거니까!”

     “그거, 말해도 되는 겁니까?”

     “……으, 으음.”

     “그리고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아카데미의 건.”

     아스타시아는 애써 나를 위로하려고 아무 말이나 했지만, 나는 그다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된다면…앞으로 거의 4년 뒤가 되려나요.”

     “3년 하고도 수개월이죠! 아카데미 입학은 봄에 하니까!”

     “그러면 우리는 봄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죠? …아! 잠시만요.”

     아스타시아가 두 손을 머리에 올리며 눈을 감는다.

     “그러고보니…그레이 경, 아카데미에는 안 들어갈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었죠.”

     “그, 그러면 안 되는데. 저, 무조건 아카데미에 보내질 것 같은데….”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회귀 한 시점부터 이미 계획해둔 부분이라, 만남은 문제없다.

     “공주님.”

     나는 아스타시아에게 줄 반지를 꺼냈다.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우선은-”

     “아뇨. 이건 받지 않을게요.”

     아스타시아는 내가 건네는 반지를 향해 단호히 손을 뻗으며 거절했다.

     “이미 다른 것도 받았으니까. 이게 싫다는 건 아녜요.”

     “그러면…?”

     “이건…흐흥.”

     아스타시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오른손 검지에 반지를 끼워넣었다.

     “이왕 받을 거라면, 언젠가 가장 뜻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받고 싶다는…그런 느낌?”

     “…….”

     “아, 그, 이상한 소리는 아녜요! 그냥 뭐랄까, 이게….”

     “접수했습니다.”

     역시, 같은 사람이다.

     “약속 하나 하겠습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나는 아스타시아의 손을 든 다음.

     “그 누가 오더라도 당신을 지킬 수 있게, 강해지겠습니다.”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약속했다.

     “아핫. 이러니까, 꼭 제가 여왕이라도 된 것 같은데요?”

     “여왕이라. 그걸 바라신다면.”

     얼마든지.

     “나의 여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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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The Genius Villain of a Traitorous Family

매국명가 간신천재
Score 7
Status: Ongoing Type: Author: , ,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The eldest son of a lord notorious for treason returns to the past. ‘A person adept at selling a country once can do it well again.’ However, in this life, ‘I will rise as the king of traitors.’ Beyond a directionless kingdom or a betraying empire, ‘Join me in this revolution.’ All for the sake of my qu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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