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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8

       …거하게 사고 쳤다.

         

       건물 밖으로 나오며 문득 덮쳐오는 현실의 자각.

       1분 전까진 머리에 피가 쏠려서 그냥 무작정 다 때려 부수긴 했는데, 막상 때려 부순 현장을 관찰하니 과하게 날뛰긴 했다.

       딱 봐도 백 평은 거뜬히 넘을 건물을 이토록 아작 내놨으며, 죽은 놈들은 없지만 당분간 침대 생활이 확정된 놈들이 한 트럭, …아니, 세 트럭은 될 것 같다.

         

       이거 들키면.

         

       ‘감봉이나 시말서로 끝날 게 아니네….’

         

       일단 시녀님에게 말해 누님에게 수습을 부탁하긴 했지만, 누님이라도 수습은 될까 싶다.

       아니, 그 사람 힘이면 이 정도 사건이야 얼마든지 무마할 테지만.

         

       ‘약점 제대로 잡혔구나, 나.’

         

       원래도 목줄이 채워지고 있던 상태였는데, 이제는 더 심한 것이 목을 죄일 수도 있는 바.

         

       ‘…환장한다.’

         

       이한은 가볍게 제 상황을 표현하며 울상을 지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며.

         

       다만.

         

       “사, 사부님….”

         

       “…왜 여기 있어.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라니까.”

         

       “그, 그렇지만….”

         

       왜일까, 후회는 전혀 들지 않는다.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편애라고 하던가?’

         

       학생 한 명을 편애해선 안 될 노릇이지만, 이한은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님을 안다.

         

       기특한 녀석이다.

       가르칠 보람이 있으며, 자신이 아는 한….

         

       ‘아니지.’

         

       정정하겠다.

         

       쟤는 그냥 ‘착한 아이’다.

       본인이 선행을 베푼 만큼 돌려받길 원하는 게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하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뒤처리는 골치 아플지언정, 속은 한없이 시원했다.

         

       * * *

         

       “…….”

         

       소녀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 스승을 보았다.

         

       왕도 동부 거리에서 스무 번째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길드 조합의 건물.

       그 건물이 통째로 붕괴되기 직전이었고, 그 파괴 행위를 벌인 사람이 소녀의 스승이란 사실이 마냥 믿기 힘들다.

         

       -압도적.

         

       지금의 저로선 이기기 힘든 강자들조차 모조리 손쉽게 때려눕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나는 단어였고, 레비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 사부님….”

       “이제 자퇴했다고 교관이 아니라 사부라고 부르기로 확정한 거냐?”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농담이다, 농담.”

       “……아.”

       “…내가 잘못했다. 앞으로 농담 안 할 테니, 그런 표정 좀 짓지 마라.”

       “네에?”

       “…….”

       “…어?”

         

       주륵….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음을.

       그리고 그 눈물이 이제 떨어지는 걸 말이다.

         

       왜일까?

         

       “…죄, 죄송해요…. 죄, 죄송, 해요….”

         

       왜 자신이 울고 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는 레비는 눈물을 자꾸만 글썽이며 닦아냈고, 사과를 건넸다.

       허나 그는 곤혹스러워하거나 꾸짖는 대신.

         

       “사람이 긴장이 풀리거나, 안도감이 들면 그럴 수도 있지. 무서운 놈들 다 치웠으니까 이제 안심해라. …그러니 울지 말아줄래? 나 달랠 자신이 없어….”

         

       다정한 격려와 걱정 어린 눈길을 줄 따름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길드 조합을 박살 내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며 저를 걱정해주는 그였고, 레비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를 올려다보며.

         

       덥썩!

         

       “으으으, 흐윽.”

         

       “…….”

         

       그의 품에 안기며 조용히 울고 말았다.

         

       “…울 거면 크게 울 것이지. 왜 이리 조용하게 우냐.”

         

       그의 중얼거림이었고, 소녀의 들썩거림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그래, 이제야 알겠다.

         

         

       왜 자신이 갑자기 눈물이 났는지.

         

       그가 길드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에 놀란 것이 아니다.

         

       ‘안심’하여서, 그리고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었다.

         

       하찮은 자길 위해 이토록 싸워주고, 무조건적인 제 편이 있다는 사실에─.

         

       이러한 사실에 소녀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비는 한참 동안 그의 품에 안겨 어깨를 들썩였다.

         

       한참이나….

         

         

         

       한편, 뒤늦게야 도착하여 무대에 서려고 했던 배우들은….

         

       “저희가 올 필요는 없던 것 같은데요?”

       “그렇군.”

       “으음, 쿤타도 싸우고 싶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 맞군요.”

       “이하동문. 모처럼 멋진 모습을 보이나 싶었는데.”

       “…하하.”

       “…….”

         

       단역조차 되지 못한 배우처럼 멋쩍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래서 망설일 시간에 뛰어야지 기회를 잡나 보다.

         

       허나, 일곱 명의 생도들의 입가에는 안도 어린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자신들의 동기가 무사해서 다행이란 듯이.

         

       원래는 그들만이 아니라, 80명 전원이 움직일 예정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다 싶어 대표자격으로 그들 일곱 만이 움직였는데, 아무래도 가만히 있어도 됐었겠다.

         

       그래도.

         

       “그래서 잭. 알아본 것은?”

       “교관님이 반파시키는 동안 알아본 결과, 역시 트리스탄이 끼어 있습니다. 이야기가 복잡해지겠습니다, 이거.”

       “…트리스탄이라….”

         

       직접 현장에 오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게 있는 법.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는 수하가 가지고 온 정보를 들으며 복잡한 기색이 역력한 듯했다.

         

       트리스탄.

       정말 애증과 증오가 섞인 이름이다.

       특히 그 가문을 이끄는 남자는 기사로선 대단함이 분명한데, 하필 그놈의….

         

       “여성편력만 고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제니미아 후작과 연이 있으십니까?”

         

       쌍검을 든 소년의 물음.

       그가 아는 티를 지나치게 낸 모양이다.

       그는 잠시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인연이 없다 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하는 것도 이상할 테지.”

       “…?”

         

       알쏭달쏭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그는 인연을 나눈 적이 없는 게 맞으니 말이다.

         

       “그게 혹시 귀족 언어란 거요? 뭐 그리 복잡하게 말해.”

       “쿤타 공용어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 검둥이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용병과 바바리안의 투덜거림이었고, 그는 이걸 어떻게 설명할 방도가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동시에 이 삼인방과 이토록 격 없이 대화하는 날이 올 줄 몰랐다며 새삼스러운 감정도 피어오른다.

         

       ‘시간을 거슬러 온다는 건, 정녕 큰 축복이 맞군.’

         

       한때 ‘적’이었던 사람과 친분을 나누며, 설마 동문이 될 줄이야.

         

       ‘…이래서 학연과 지연이 최고라고 했었던가?’

         

       과거, 아니 미래의 어느 부하가 했던 말을 떠올리는 그는 시선을 돌려 정말 새삼스럽게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을 보았다.

         

       “저, 저기 이제 우린 빠져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수상하기 이를 데 없는,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비범한 회색머리와.

         

       “…알아, 안다고. 나도 지금은 참아야 한다는 건 안다고…!”

         

       빠드득!

         

       절대 친해질 리 없다고 생각한 미친 악녀…였으나, 지금은 어딘지 질투에 불탈 뿐인, 그 나이대와 잘 어울리는 순진한 금발머리 마법사까지.

         

       참으로.

         

       ‘스승 하나는 내가 정말 잘 뒀군.’

         

       축복 어린 두 번째 삶 속에서 얻은 인연과, 스승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로엔이었고, 로엔은 스승의 품에 안긴 아직 어리기 그지없는 소녀를 향해 고요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 너였구나. 모습과 성이 달라 몰랐거늘, 너였어.’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길드와 트리스탄 때문에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고요하게 우는 등을 보고 깨닫는다.

         

       …적막한 울음소리.

         

       그, 혹은 그녀일지도 몰랐던….

         

       ‘전장의 성녀’는 서글플 때 항상 저리 울었었다.

         

       친한 동료의 죽음이 있었을 때조차 처연히 몸을 들썩일 뿐, 소리를 높일 줄 몰랐다.

       마치, 소리 높여 우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어릴 때부터 버릇이었군.’

         

       “하아….”

         

       로엔은 자칫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가 가장 신뢰했던 동료.

       몸 전체에 화상이 가득하여 항상 가면을 쓰고 다녔으며, 항상 주눅 든 것 같으나, 전장의 선봉에선 그 누구보다 용맹하며 위대했던 지휘관이자 전사.

       용병왕이 죽은 후, 해체 직전이었던 용병 총합을 다시 규합하여 용병들의 새로운 리더가 되었던 용병 여왕.

       귀족들의 공포이자, 타락한 왕국을 구하려 항상 선두주자에 섰던 고결한 전사.

         

       ……허나 그 모든 영광을 거머쥐고도 단 한 번도 행복해진 적이 없는 비극적인 삶만 살았던 전우.

         

       로엔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미안하다, 이토록 죄스러울 수가 없다, 잔. 내가 널 가장 먼저 알아봤어야 했는데, 조금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못난 놈이 아닐 수 없다.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줬던 동료였는데.

         

       변명거리가 있긴 했다.

         

       원래의 그녀가 무슨 삶을 살았었는지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머리칼조차 본래의 색을 잃고 백발로 모두 바뀔 정도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성별조차 같이 다닌 지 3년이 지난 후에야 가까스로 알려줬으며, 본명조차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그저 전장의 성녀.

       [아르크(Ark) 잔.] …힘없는 백성들의 ‘방주’라 불렸던 군주였을 뿐.

         

       아무도 그녀의 인생과 삶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었다.

         

       함께 등을 맞대었던 자신조차.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 모든 변명이 무슨 소용이랴.

         

       자신은 결국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래서 사람의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라고 하는 건가 보군.’

         

       로엔은 저가 얼마나 이기적이었고, 남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새삼 되새긴다.

         

       시간을 돌아오기 전에도 그는 칼을 잘 쓰고, 훌륭한 영웅으로 불렸지만….

       끝내 백성들에게 인정받진 못하였다.

       이는 그가 남을 돌볼지 모르며, 이기적이게 살아서 그런 것이리라.

       백성들도 그를 영웅으로 생각해도, 본능적으로 자신이 왕이 된다면 삶이 고달파질 것을 알았을 테지.

         

       하여 후회한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그가 죽었어야 했고, 그녀가, 아니 다른 이들을 살렸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랬다면, 좀 더 앞날이 밝았을까?’

         

       …모르겠다.

         

       감히 실패자인 자신 따위가 예측할 없는 거겠지.

         

       그래도 실패자일지언정…!

         

       ‘네 삶이 다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나도 내 전부를 걸고 노력하마.’

         

       로엔는 맹세했다.

         

       설사 그녀가 자신을 모르더라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다면 이미 남이 아닌 것이다.

       하니 결심하다. 반드시 그녀의 삶이 전처럼 비극으로 끝나지 않게 하리라고.

         

       ……물론.

         

       ‘지금은 보조역할로만 만족해야 할 것 같지만.’

         

       지금 무대의 주역은 자신이 아니다.

       저기, 항상 뜻밖이고도 가공할 만한 모습만 보여주는 스승이야말로 이 무대의 주역이다.

         

       ‘당신은 어떻게 꼬인 실타래를 풀 것입니까?’

         

       변수이자 특이점.

       그는 항상 제 예측과 미래를 뛰어넘는 결과와 행동을 보여주었고, 그가 이해하지 못할 ‘길’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회귀자는 과연 그가 이번에는 어떠한 선택지를 내릴지 사뭇 기대하며 안광을 빛내었다.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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