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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희미한 붉은 조명이 깜박이는 음산한 공장 통로.

    그곳에 마치 잘 발려진 갈비뼈처럼 보이는 철제 기둥들이 솟아있었다.

    “허억, 허억.”

    분명 공장에 들어설 때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풍경이지만.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과 불안한 마음은 공장에 있는 온갖 구조물들을 두렵게 보이게 했다.

    달리면 달릴수록 숨이 막힌다.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 속이 답답했다.

    공장 복도의 좁은 공간은 마치 벽이 나를 가두려는 듯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더욱 좁아지고 조여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기에 공장 깊숙한 곳에서 풍겨오는 기분 나쁜 석유 냄새.

    공장에서 흔히 나는 냄새로 생각하고 가볍게 무시했던 요소였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저 석유 냄새야말로, 이 공장이 평소와 다른 무언가에 오염된 증거였다.

    한때 더없이 든든하게 생각했던 ‘대 오브젝트 진압용 방패’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깟 방패 쪼가리보다는 좀 더 빠르게, 좀 더 오래 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 수상한 외국인의 의뢰를 맡지 말았어야 했어.”

    의뢰를 맡을 당시에는 고액의 보상을 약속하던 개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괴상한 옷을 입은 수상한 사람이었다.

    외롭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는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서로 어깨를 맞대던 동료들은 모두 쓰러졌다. 

    내 기억 속, 그들의 마지막 얼굴은 공포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남아버렸다.

    좁은 공장 복도를 지나, 주차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 너머가 마치 반짝이는 신기루처럼 나를 설레게 했다.

    드디어!

    탈출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저 주차장만 통과하면.

    주차장을 지나가면 탈출할 수 있다. 

    푸딩 공장을 점거 중인 그 오브젝트는 이상하게 공장 부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마음속에서 희망이 솟구쳤고, 탈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여기서 나가면 이제 ‘오브젝트 회수’ 따위의 위험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다짐했다.

    하지만 나의 희망찬 계획은 실행하기도 전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 하하하하하.”

    메마른 입술에서 건조하고 쓴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 입에서 나온 거라고 상상하기 힘든 공허한 웃음소리가 광활한 주차장에 울려 퍼졌다.

    주차장 중앙에 그 녀석이 있었다.

    푸딩 공장을 점거 중인 오브젝트들 중 하나.

    높이 2m의 쇠로 만들어진 커다란 곰돌이 인형.

    그리고 사전 정보와 일치하는 점이 하나도 없는 괴물.

    곰돌이 인형은 묘하게 불쾌하게 생긴 얼굴을 움직이면서 사람이 웃는 것처럼 덜그럭거렸다.

    도망치는 데 성공한 게 아니라, 그저 저 녀석이 나를 가지고 놀았던 걸까? 

    곰돌이 인형의 태도를 보면 그래 보였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과 아드레날린에 의해 힘차게 움직이던 다리는 절망의 중력에 짓눌려 바닥에 못 박혀 버렸다.

    절망적인 현실에 도망칠 힘과 기력이 사라져서, 그대로 아스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와 눈이 마주친 곰돌이의 눈동자에서 사나운 붉은 빛이 번쩍였다.

    마치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냥감은 재미가 없다는 듯한 반응.

    사나운 표정의 오브젝트는 순식간에 달려와, 장난감으로 효용을 다한 나의 머리를 향해서 가볍게 강철 주먹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끝없는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

    검은 머리칼에 푸른 눈, 그리고 190cm를 넘어가는 장신을 가진 남자가 자기 손목에 채워진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험하군. 위험해. 이 정도 시간이면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오브젝트 회수 전문가’들이 모두 죽어버렸겠군.”

    “당신, 한국말 잘하잖아! 통역은 필요 없어 보이는데, 왜! 도대체 왜?”

    화가 난 표정의 한국인이 소리쳤다.

    외국인 남성은 태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야 나는 천재니까. 생소한 언어 습득도 하루면 충분하지.”

    “그게 아니라! 한국어를 그렇게 잘하면서 통역인 나를 왜 고용한 거냐고!”

    답답해 보이는 통역사는 자기 가슴을 쿵쿵 내려쳤다.

    외국인 남성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서 대답했다.

    “관광이 아니라 사업이니까 그런 거지, 통역사 양반. 사업할 때는 당연히 현지어를 능숙하게 잘하는 통역을 옆에 둬야 예의인 법이야.”

    통역사는 절망하는 표정으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이런 일, 받지 말았어야 했어. 고용주가 수상한 복장을 했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말게. 그리고 다음부터는 거액의 연봉을 일시불로 선지급한다고 하는 수상한 통역 의뢰는 피하도록 하고.”

    외국인 남성은 심각한 표정으로 통역사의 어깨를 토닥였다.

    통역사의 말처럼 외국인 남성의 복장은 특이했다.

    머리 위에 얹은 멋들어진 선글라스.

    그리고 발바닥까지 가리는 전신 수영복 같은 복장과 스마트 워치.

    “그리고 이 천재 ‘제임스’가 직접 설계한 다목적 의상을 수상하다고 하는 건 너무하군. 위험한 한국에 오기 위해서 특별히 제작한 의상이라고? 디자인부터 대 오브젝트 방어력까지 완벽하지.”

    제임스는 통역사의 양 어깨를 움켜쥐더니 번쩍 일으켜 세웠다.

    “뭐, 그렇게 상심하지 말라고. 고용주로서 책임은 다할 생각이니 말이야. 자네는 보디가드로 고용된 게 아니니까, 내가 죽기 전에 자네가 죽을 일은 없을 걸세.”

    제임스는 상쾌한 웃음을 띠며 통역사에게 말했다.

    물론 둘 다 죽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라서, 별로 위안이 되는 대사는 아니었다.

    ***

    차량 뒷좌석에 설치된 차박 시트. 

    침대처럼 푹신하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편안한 그 위에서 뒹굴뒹굴했다.

    예린이가 장거리 운행 대비용이라면서 나를 위해 설치해 줬는데,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수많은 빵과 과자도 마련된 편안한 공간.

    물론 푸딩은 없었다.

    이제 내가 먹을 푸딩은 한 종류뿐이니까!

    지금 나는 예린이의 차를 타고서 인천 바다 근처에 위치한 공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실은 혼자서 훌쩍 떠나려고 했지만, 예린이가 같이 가자고 해서 함께 가는 중이었다.

    “사신아. 인천에 있는 그 공장, 오브젝트를 이용해서 푸딩을 생산한다고 하네. 미국은 벌써 오브젝트로 공산품을 만드는 단계까지 와버렸어. 우리나라는 언제쯤 그런 게 가능하려나?”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던 중, 예린이는 잽싸게 공장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다.

    사실 공장으로 쳐들어가서 거기 존재하는 오브젝트를 모조리 다 박살을 내버릴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겐 놀라운 정보였다. 

    오브젝트로 푸딩을 만든다고?

    그럼, 오브젝트를 죄다 박살 내면 안 되는 건가!

    푸딩을 못 먹어서 흉포해진 황금 사신 떼를 풀어놓을 생각이었는데, 안 되겠군.

    ***

    완전히 야행성 생활을 이어 나가고 있는 금발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붉은 달이 떴어요.”

    소녀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전혀 다른 달이라서 아쉽네요. 태양 같은 열기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모래도 없어요. 그저 존재하고 관찰할 뿐인 달이네요. 붉은 달을 파괴한 자의 의도인 걸까요?”

    소녀는 하늘에서 시선을 돌려서 곤히 잠든 검은 요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해서 미리 잠이 든 검은 요원이었다.

    서로 살아가는 시간이 달라진 것만 같아서 조금 서글퍼졌다.

    붉은 달이 다시 떠올라서, 태양 아래 설 수 있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자주 있을 수밖에 없겠지.

    붉은 달을 다시 만들고 싶지만, 인도해 준다는 심장은 아직 아무런 인도를 주지 않고 있었다.

    조금 울적한 밤이었다.

    ***

    하늘이 간지럽다.

    인간은 절대로 느낄 수가 없는 생소한 감각.

    하늘이 간지럽다니.

    차 안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원인을 볼 수 있었다.

    파괴했었던 붉은 달이 하늘 위에 떠 있었다.

    원래 존재하던 달 옆에 작은 크기로 앙증맞게.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달은 내 꺼다. 

    붉은 달을 처치해서 생긴 것 같은데, 수많은 오브젝트를 파괴해 왔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능력만 남기고 가는 게 아니라 뭔가 부수적인 효과가 발생하다니.

    “사신아 큰일 났어. 달이 2개야. 설마 여기도 사막이 되는 건가?”

    예린이도 달을 지금 발견했는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정보를 들으려고 하는 건지, 예린이는 서둘러서 라디오를 틀었다.

    [하늘에 불길한 붉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이 현상은 강서구 사막 사태 때처럼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저 달이 전 지구의 사막화의 전조라면 수많은 과학자가 예측하던 오브젝트로 인한 멸망이 현실에 나타난 셈이군요.]

    [강서구 크기의 땅을 사막화하는데 일주일 남짓 걸렸으니, 지구 전역의 사막화라면 20만 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네요.]

    [일주일 뒤에 사막에서 눈을 뜨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수많은 채널에서 모두 ‘붉은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막화의 위기가 닥친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는데, 붉은 달의 주인인 내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불필요한 일로 불안해 보이는 예린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

    늦게 출발해서 그런지, 공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공장 근처는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위험한 오브젝트가 공장을 점거했는데, 이렇게 공장 근처에서 떠들고 있어도 되는 건가?

    예린이가 관계자들과 쓸모없는 대화를 나누러 떠난 사이 나는 공장 주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사막에서도 맡아본 적이 있던 기분 나쁜 냄새.

    왠지 이번에도 실수로 황금 사신을 빠트릴 것 같은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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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4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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