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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EP.89

     

   사람의 땀과 흡사한 비릿한 금속의 향.

     

   과거였다면 그저 이 불쾌한 냄새에 인상을 쓰고 말았겠지만 특유의 혈향을 알아 버린 지금은 온몸에 경고를 보내는 이 서늘한 긴장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벅.

     

   한가민은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그저 도망을 쳐야하나 냉정하게 생각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사건의 발생을 무시하고 회피하기에는 지금까지 4층을 클리어할 단서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기억 상실 같은 걸지도 모르고.’

     

   트라우마가 왜 트라우마겠는가.

   어릴 적의 강력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어린아이가 해리성 기억 상실이 생겼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

     

   하지만 아무리 사건을 마주할 각오를 했다고 해도 역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탑을 오르기 시작하며 어지간한 잔인한 장면들은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무뎌진 것이지 극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

     

   한가민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잠시 후, 그녀는 은근하게 가려진 어둠을 직면했고 바닥에 쓰러진 익숙한 그림자 하나와 함께 그 옆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하지만 당황스러운 점은 그녀가 보게 된 두 명의 인영의 얼굴이 너무나도 흐릿했다는 것.

     

   일단 쓰러진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있을 사람이 있다면 하나는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 일 테고, 다른 하나가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일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은 한가민이 어린 시절 기억 상실에 걸린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흐릿하게만 보였다.

     

   “윽…”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불청객이 한가민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한가민을 보며 분명히 당황하고 있었다.

     

   – 아, 아니야… 내 잘못이 아니…

     

   불쾌한 노이즈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목소리.

   처음에는 경계를 잔뜩 하고 있던 한가민은 불청객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들으며 저 그림자가 현재의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으, 으아아악!!!

     

   그림자의 비명이 방음도 잘되지 않는 작은 방의 벽을 메아리쳤다.

   급격하게 몸을 틀어 문으로 달려 나가는 그림자의 얼굴이 서서히 선명해진다.

     

   “엄…마…?”

     

   낯설지만 익숙한 얼굴. 그녀는 한가민을 지나쳐 문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모친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충격으로 인한 것인지 팔은 이상하리만치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로 도망을 가 버린 모친과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부친이 깊은 잠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런 미친.”

     

   한가민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곧장 호흡부터 확인했다.

   그녀의 기억에 아버지는 그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잘만 살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탑의 4층.

   정말 기억으로 만들어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현실이 아니었고 그렇다면 시간의 흐름이 변하는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숨은 쉰다.”

     

   그제야 한가민은 바닥에 매일 같이 굴러다니던 술병이 몇 개 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벽에 미세한 실금이 가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틈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초록색 유리 조각을 보니 어머니의 등장에 이 양반이 소주병을 집어던진 게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어머니가 어찌저찌 술병으로 반격을 가한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해야 하지?’

     

   한가민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지금 아버지를 치료해 상황부터 정리하거나 당장 도망친 어머니를 추격해 사건의 전말을 듣는 길.

     

   전자를 선택할 경우, 어머니를 놓칠 것은 뻔한 상황이었지만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녀가 아는 원수 같은 아버지가 살아 있는 미래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하지만 그 순간 한가민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냥 이렇게 둘까?

     

   그녀가 가진 트라우마의 대부분은 아버지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릴 때부터 폭력을 행사하고 어린 딸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부양한 적이 없는 남 보다 못한 혈육.

     

   하지만 한가민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을 지배하려는 부정적인 감정을 재빠르게 털어냈다.

     

   ‘그건 극복이 아니잖아.’

     

   그녀는 어렸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 어떤 또래의 친구들보다 성숙했다.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과 어려움에 지쳐 쓰러지지 않기 위해 늘 최선을 다 했고 모든 위기에 불만을 가지기보다는 순응하며 보다 나은 해결책을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그렇게 그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상위권 대학에 수석으로 입학해 그녀의 신념을 증명해냈다.

     

   그렇게 알게 된 사실. 가장 큰 성장은 가장 큰 위기의 뒤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른 나이에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뭔 놈의 집구석에 전화가 없어.”

     

   그녀는 21세기를 살며 집에 집전화나 휴대전화가 없다는 사실을 개탄스러워하며 현관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나마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은 밀린 월세 때문에 눈치껏 피해 다니던 집주인 뿐.

   곧장 구급차부터 불러서 치료를 하는 것이 첫 번째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으윽…!”

     

   그녀의 등 뒤로 깨어난 아버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아픈지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아버지.

     

   “아빠 괜찮…”

     

   한가민은 그런 아버지에게 다가가려 했다.

   아직 술이 깬 것이 아니었기에 추가적인 사고가 일어날 수 있으니 그를 부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한가민의 걱정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드는 데에는 한 가지 행동이면 충분했다.

     

   휙! 쨍그랑!

     

   “꺄악!”

     

   억지로 몸을 일으킨 그가 술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맛이 가 버린 눈빛. 분노로 점철된 그의 표정에는 살기가 등등했고 그녀는 그 순간 잊고 있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올라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조심스레 부여잡았다.

     

   “이런 씨……”

     

   지금껏 누군가에게 보인 적은 없었지만 성인이 된 그녀의 어깨에는 자상에 의한 기다란 흉터가 있었다.

   그게 언제 생겨난 흉터였는지 가물가물했지만 이쯤 되니 기억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반쯤 깨진 유리병도 함께.

     

   그는 저 유리병을 도망치려는 한가민에게 던진다.

   그리고 그 파편은 사방팔방으로 튀게 되고 그 조각 중 꽤 커다란 한 조각이 한가민의 팔에 박히는 건 잠시 후 일어날 사건이었다.

     

   “후우… 후우…”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기억들에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깨의 상처는 둘째치더라도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겼던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는 상황.

     

   ‘싸워야 하나?’

     

   술에 취한 성인 남성을 제압하기에는 초등학생 여아의 몸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게다가 본능이라는 것이 괜히 있는 게 아닌지 팔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저 위기를 넘기는 것이 아닌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하는 것.

   어떻게든 현재의 위기를 넘긴다면 4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들자, 그녀는 상대를 더 이상 자극하기 않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런데.

     

   스윽.

     

   일어날 일은 일어나려는 건지, 눈이 뒤집어진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반쯤 깨진 술병을 들어 올렸다.

     

   “자, 잠깐만!”

     

   일촉즉발의 상황. 한가민이 두 손을 들어 술병을 던지려는 그를 제지했지만 그는 잠시 주춤거렸을 뿐, 술병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

     

   똑똑똑.

   – 계십니까?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을 울리는 작은 노크 소리.

   그리고 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한가민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

     

   “후우, 겨우 찾았네…… 당신이 여기 보스 맞죠?”

   “……네놈 도대체 어느 조직에서 보낸 거지?”

     

   사업장의 끝자락에 도달한 박조철과 그의 싸움을 직관한 보스가 굳어 버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꾸 보내긴 뭘 보내. 그냥 돈 좀 벌고 싶어서 찾아왔다니까. 그나저나 여기 소파에 피 묻어도 괜찮아요? 좀 쉬고 싶은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난 습격자.

   그의 뒤로 박조철을 막지 못한 수십 명의 부하들이 팔다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후아! 죽겠다 진짜!”

     

   보스가 보는 박조철은 괴물 그 자체였다.

   아니, 애초에 조폭들의 소굴을 치고 들어와 교복에 잔뜩 피칠갑을 한 채 조직 하나를 초토화시킨 놈을 보니 이게 도대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기까지 하다.

     

   ‘만득이파에서 보낸 살수인가? 아니면 두식이파에서 보낸……?’

     

   그의 머릿속에 몇 가지 조직들의 이름이 스쳐갔지만 이런 괴물을 키웠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강파의 보스 한강은 지금 눈앞의 놈이 입을 여는 순간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기요 아저씨.”

   “……네?”

     

   자연스럽게 나간 존댓말에 한강은 어마어마한 수치심을 느꼈다.

   고작 고삐리에게 공포를 느꼈다는 것도 그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눈을 피한 것이 바로 그 이유.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충격적이게도 상당히 저 자세의 그것이었다.

     

   “저 일 하나만 시켜주시면 안 됩니까? 단순하고 깔끔하고 음… 뭐랄까. 좀 악질인 놈 하나 잡는 걸로다가.”

     

   습격자의 반응을 보니 그는 정말로 이 사업장에 일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그는 외마디의 반문을 던졌다.

   아무리 봐도 전문가의 솜씨를 가진 놈이 교복을 입고 찾아와 할 말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

     

   “아, 이유는 묻지 마시고 일단 일이나 줘요. 지금 딱 생각나는 걸로다가.”

   “일이라…”

     

   하지만 그는 말을 뱉는 동시에 박조철을 사용할 마땅한 상황을 떠올렸다.

   그들의 사업체는 돈을 빌려주고 그것을 받아 내는 사채업. 이렇게 무자비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 일을 잘해낼 수 있는 인재일 것이 분명했다.

     

   “그,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하지만 일을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눈앞의 이 교복을 입은 미치광이가 위험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꺼내 든 의뢰는 오래전 떼먹은 돈을 갚지 않는 불량 고객을 찾아가는 일.

   그때 보스의 머릿속에 매일 술이나 처먹으며 돈을 갚지 않던 인간과 함께 이 괴물을 동시에 담가 버릴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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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To Climb The Tower?

Who Is Threatening You to Climb the Tower? 누가 탑 오르라고 협박함?
Score 4.0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A sudden message arrived, heralding the end of humanity.

[Climb the tower. If you refuse, you will die.]

We are being threatened by a mysterious be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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