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9

    <89 – 도둑놈>

     

     

    개판 난 정원에서 도망쳐서 근처 빈 공실에 들어가 보고서 작성을 마친 에이프릴.

    그녀는 상부에서 이런 보고서를 받기를 원했을지 의심이 들었지만, 방금 현장에서 본인이 걸렸다면 인생을 조질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갑자기 울분이 치밀더니 안전한 곳에서 꿀을 빨며 힘든 일만 시키는 재단 상층부에 반감이 솟구쳤다.

     

    ‘이런 보고서 안 원했으면 뭐 어쩔 건데. 꼬우면 지들이 현장에서 발로 뛰는 스파이 하던가.’

     

    아침에는 멍멍 짖는 개수인과 청소를, 정오에는 빽빽뺙뺙 지저귀는 새조인과 청소를, 저녁에는 힝힝 울어대는 말수인과 마굿간 청소를.

    청소메이드의 가혹한 청소일정을 감수하면서 스파이 활동을 하면 현장에서는 발각되어서 인생 종칠 위기를 겪는다.

    그 모든 고생을 간신히 넘어서면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금화와 험난한 청소메이드의 일상.

     

    ‘돈이야 처음 받을 때나 좋았지, 언제 죽어서 은퇴할지도 모르는 일을 반강제로 계속하면 돈 받아서 좋다는 생각도 안 드는걸.’

     

    스파이 활동을 이어가는 노고를 생각하면 이 정도 정보정확성의 오차범위는 상부도 감수해야 한다.

     

    ‘슬슬 돌아갈까.’

     

    마구간으로 돌아가는 길.

     

    ‘아 맞다. 꼬리.’

     

    에이프릴은 손가방에 넣어두었던 고양이꼬리를 꺼냈다.

    수인할당제 점수를 노려서 아카데미 청소메이드에 합격한 그녀는 대외적으로 ‘고양이수인’으로 인식되어져 있기에 꼬리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평상시에는 치마나 바지 속에 꼬리를 감춰두었다고 얼버무리며 손가방에 넣어놓고 다니지만 남들 눈에 띌 때만큼은 제대로 꼬리를 달고 다녀야 한다.

    물론 변신마법은 어렵다.

    그걸 유지할 마력도 아깝다.

    그러니 가성비를 따져서 재단에서 만들어준 스파이 변장용품이 바로 이 고양이꼬리 플래그다.

     

    “하아.”

    ‘오래 착용하면 엉덩이에 느낌이 이상한데.’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고양이꼬리 플래그를 장착하는 에이프릴이었다.

     

     

    * *

     

     

    “개꿀이네. 제일 좋은 패턴이 걸렸잖아?”

     

    여름방학이 끝난 뒤.

    1학년 2학기가 시작되면 아카데미에는 새로운 챕터보스와 새로운 위기가 등장한다.

    주로 3가지 위기가 서로 경합을 벌이며 누가 진짜 챕터보스가 될지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데, 그 세 가지 후보 중 하나가 바로 이 만드라고라였다.

     

    “응애.”

     

    배양액이 담긴 병 속에서 손처럼 생긴 잔뿌리로 휘적휘적 물장구를 치는 응애 만드라고라.

    당장은 귀여운 녀석이지만 쑥쑥 자라면 아카데미 정원 전체에 뿌리를 뻗고 학생회관을 부수며 일어서는 거다이맥스 만드라고라가 된다.

     

    그거, 230m는 되려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부럽다.

    원인은 화학동아리에서 개발한 특제배양액 X-13호.

    1학기 중간고사가 한창 진행될 때, 과제마감기한이 다가온 선배들은 부족한 시약이나 개발품을 충당하고자 학생회관 동아리를 습격하고는 한다.

    일정확률로 습격이벤트에서 화학동아리가 털릴 경우, 자기 과제에 필요 없는 약물을 대충 땅에 묻는 이벤트가 이어진다.

    여기서 문제의 특제배양액 X-13호에 가장 먼저 뿌리를 뻗는 식물은 개떡상 이벤트를 겪는다.

     

    ‘거다이맥스 식물 이벤트!’

     

    홀씨식물이 먼저 도달하면?

    바람을 따라 씨앗을 뿌리는 홀씨식물이 초거대 홀씨를 아카데미 전체에 퍼뜨리며 <거대한 홀씨식물의 군락지> 이벤트가 시작된다.

    나무가 먼저 도달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는 <잭과 콩나무> 이벤트가 열린다.

    그런데 만일, 만드라고라가 먼저 도달하면?

     

    ‘최악의 경우, 아카데미 초토화 억까 멸망 직행!’

     

    누구의 악의도 없이 우연에 우연이 겹쳐 탄생한 거다이맥스 만드라고라가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 수천 단위의 학생들이 죽는다.

    생긴 것부터 자연친화적이고 식물을 칭칭 몸에 휘감은 위어드 교수님이 드라이어드의 진가를 발휘하면 무사히 사태를 수습할 수는 있다.

    그런데 또 600 대 300 대 99 대 1의 법칙에서 억까가 터지면?

     

    -변방의 잡것이 지도교수로 있던 동아리에서 사고가 터졌네. 우린 저 자의 능력을 신용할 수 없으니 이 일은 우리 제국교수들에게 맡기게.

     

    제국교수들이 자기들이 해결하겠다고 나선다.

    뒷수습을 대신하는 거야 좋다.

    제국에도 유능한 교수는 있으니까.

    변방출신 교수들의 힘이 약해지고, 제국교수들이 조금 더 거들먹거리고, 차별이 심해지며 학생들도 피해를 입고 수많은 분란플래그가 강화되겠지만.

    적어도 당장 죽지는 않을 거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또 억까가 터지면?

    무능한 제국교수가 걸리면?

     

    작은 실수로 무심코 몇 십 몇 백 명이 죽거나 교수 몇 명이 죽어나가는 사고가 발생한다.

    아카데미에 새로운 자객을 밀어 넣고 싶어서 안달이 난 세계각국의 정부인사들과 비밀조직이 군침을 질질 흘릴 탐스러운 상황이 생긴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자꾸만 실종되거나 아랫배가 저릿하고 입덧을 하는 학생들도 생기는 등, 아카데미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지겠지만.

    그래도 아직 괜찮다.

    당장 죽지는 않으니까.

     

    …만일 세계멸망을 목표로 하는 조직에서 운 좋게 심어둔 교수가 이 기회를 이용해 나선다면?

     

    그날부로 아카데미는 폭발.

    0.1%의 확률로 조졌다고 봐야 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도난사고 이벤트>

    ○9.9%의 확률로 화학/연금술 동아리 당첨.

    도난이벤트 – 특제배양액 X-13호가 땅에 묻힘.

     

    <특제배양액 X-13호 이벤트>

    ○60%의 확률로 <거대한 홀씨식물의 군락지>

    후속이벤트 – 험난한 등교길

    ○30%의 확률로 <잭과 콩나무>

    후속이벤트 – 나무 위에 찾아온 불청객

    ○9.9%의 확률로 <거다이맥스 멍멍이>

    후속이벤트 – 특대형 경비견

    ○0.1%의 확률로 <거다이맥스 만드라고라>

    후속이벤트 – 하단참조!

     

    <거다이맥스 만드라고라 이벤트>

    ○60%의 확률로 위어드 교수가 사태수습.

    후속이벤트 – 전교생 자연마법 특별교육주간

    ○30%의 확률로 제국교수가 사태수습.

    후속이벤트 – 변방차별주의

    ○9.9%의 확률로 제국교수가 대형사고.

    후속이벤트 – 합동장례식. 수상한 신입교수들.

    ○0.1%의 확률로 첩자교수가 아카테미 폭파.

    후속이벤트 – 없어. 인생 망했어!

     

    ‘어휴, 끔찍해!’

     

    거미줄처럼 줄을 쭉쭉 뻗어나가는 이벤트들의 시초가 바로 오늘 전부 끝났다.

    특제배양액 X-13호의 시작품인 특제배양액 X-1호를 없앴고, 혹시나 샘플이 남아서 특제배양익 X-13호가 다시 제조될까봐 만드라고라도 납치했다.

    X-1호는 만드라고라가 먹어도 급속성장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한 지 오래!

     

    “그래도 빨리 컸으면 좋겠네!”

     

    만드라고라는 흙에서 키울 땐 뽑으면 비명을 지르지만 가치 있는 영약이 된다.

    반면, 물에서 키울 땐 사람도 안 죽이고 유순하게 잘 자라지만 만드라고라 자체로서의 영약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만드라고라가 자라는 물이 영약이 된다.

     

    “히히. 너도 토속성보단 수속성이 좋지?”

    “응애.”

     

    기숙사에 놓을 식물친구가 생겼다.

     

     

    * *

     

     

    만드라고라가 실종됐다.

    식물동아리 부장 <오르캐치>는 뒷목의 혈관이 막히며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제 발로 땅에서 일어나서 이사를 간 것도 아닌 이상에야 침입자가 훔쳐간 것이 틀림없었다.

     

    “부장님. 온실 안에는 도둑맞은 식물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부장님의 전용 보안부스 안에 있는 식물만 도둑맞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걸 키우셨기에 초저녁도 전에 도둑이 들이닥친 겁니까?”

    “몰라도 돼.”

     

    만드라고라는 온갖 희귀식물을 키워내는 식물동아리에서도 탐을 낼 레어도 최상급의 초희귀식물.

    만드라고라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동아리 회원들부터 당장 모종삽을 들고 보안부스에 들이닥치고도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 너희가 훔쳤지?”

    “아니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훔쳐요?”

     

    못미더운 부원들이지만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놈들은 없다.

     

    ‘흔적은 둘.’

     

    입구에서 망을 보던 발자국이 하나.

    현장에 침투해서 범행을 저지른 발자국이 하나.

    기묘한 것은 어느 쪽도 자신의 발사이즈를 알아볼 수 없게 족적이 아주 기묘하다는 사실이었다.

     

    “부장님. 연금술동아리 놈들이 수상합니다.”

    “맞아요. 그놈들은 비료제작의뢰만 받고 특제배양액도 제때 안주는 못된 놈들이라고요.”

    “아 맞다. 오늘이 배양액 주기로 한 날 아니었어?”

    “걔들은 줬다는데?”

    “찾아보니 없던데?”

    “…이 자식들, 역시 도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들지도 않은 배양액을 줬다고 한 것이 틀림없어!”

     

    자기들끼리 씨근덕거리다가 연금술동아리로 쳐들어가는 부원들.

    오르캐치는 만드라고라를 잃어버린 허탈함에 홀로 우두커니 정원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흔한 동아리 털이범의 솜씨가 아니야.’

     

    오르캐치는 도둑질 하면 세계제일로 손꼽히는 브론즈 교수의 개인연구실을 찾아갔다.

     

    “실례합니다. 계십니까, 교수님?”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리는 차분한 목소리를 따라 문을 열었다.

    초저녁이라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던 걸까.

    교수는 소파에 누워있었다.

    다만, 스타일 좋은 미녀는 소파에서 잠을 자는 모습도 그림이 되었다.

    하얀 정장상의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와이셔츠에 정장바지 차림으로 비스듬히 눕는다.

    눈가리개 삼아 얼굴을 덮은 실크햇을 손가락 하나로 들어올리는 시크한 자세도 자세지만, 와이셔츠 너머로 가득 부풀어 오른 가슴도 눈이 갔다.

     

    “강의를 듣는 학생은 아니군.”

     

    주의를 환기시키듯이 건네는 말에 오르캐치는 뒤늦게 시선을 가슴이 아닌 얼굴로 옮겼다.

    교수 정도의 실력이면 자신의 시선을 읽어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면박을 주지 않는 것도 감지덕지였다.

     

    “자문을 구하러 왔습니다.”“들어보고 생각하겠네.”

    “방금 식물동아리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고 기르던 초희귀 식물을 도둑맞았습니다.”

    “보안은?”

    “꾸벅초와 넝쿨트랩, 흡혈기생타래에 마나보드 잠금장치를 사용했습니다. 앞의 셋은 전부 피하고 뒤의 하나는 돌로 내리찍어서 부순 흔적이 있었습니다.”

    “…돌로?”

    “꽤 큰 바위였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식물의 위치를 알고, 현장에 몰래 침투해 바위로 잠금장치를 깨버릴 과감함까지 갖춘 고학년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고학년이라.”

    “그것도 아주 상습적으로 물건을 훔친 도둑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에 부원들이 출동한 20초 남짓 사이에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브론즈 교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맞장구를 치며 들어주던 브론즈 교수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흥미가 없는 걸까?

    침묵이 길어질수록 괜히 초조해졌다.

     

    “따로 알아봐주지.”

    “휴.”

     

    브론즈 교수는 이만 나가라며 무언으로 눈치를 주었다.

     

    “감사합니다. 저, 도둑맞은 물건은 꼭 좀…….”

     

    침묵이 길어졌다.

    앞의 침묵보다 더욱 불길한 침묵이었다.

    교수의 입가에 그려지는 미소를 보니 속셈이 보인다.

    그럼 그렇지.

    도둑놈이 장물을 찾았다고 곱게 건네줄 리가 없다.

     

    “교수님은 의적이시잖아요.”

     

    양심에 호소라도 해볼 생각으로 꺼낸 한 마디.

    교수는 시크하게 카운터를 쳤다.

     

    “가슴. 봤었지?”

     

    얼굴이 시뻘게진 오르캐치는 “실례했습니다!”를 외치며 도망쳤다.

    모쏠 남학생이 견디기에는 너무 벅찬 추궁이었다.

    브론즈 교수의 눈은 어둑한 복도로 달아나는 오르캐치 대신 한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밝게 빛났다.

     

    “훗.”

     

    오크노디를 자신의 수제자로 만든다.

    그 목적을 이룰 기회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에이프릴이 말수인에서 고양이수인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다음화 보기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I Became the Daughter of the Academy’s Villain

아카데미 흑막의 딸이 되었다
Score 4.2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From the side, she looks pitiful and worn out, but in reality, she’s living her joyful survival story in the world of games.

But how can someone’s name be Oknodie?

Comment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