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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홍차? 커피?”

       “홍차요.”

       “아무거나.”

       “응응.”

         

       파스텔은 찻주전자를 달그락댔다.

         

       멜리사가 뚫어져라 지켜보며 한참 망설이더니 손을 뻗었다.

         

       “제가 할게요.”

       “괜찮아! 손님 대접은 내가 손수 하는 게 학생회의 전통이야!”

         

       앨시어가 의아해했다.

         

       “언제부터 생긴 전통이길래?”

         

       그거스은.

         

       “방금부터!”

       “그건 전통이 아니야.”

       “허억, 그럴 수가.”

         

       파스텔은 놀라며 마법진을 작동시켰다. 위에 놓인 찻주전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총장실에 있던 고급 홍차가 퐁당퐁당 넣어졌다.

         

       “아.”

         

       멜리사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홍찻잎이 펄펄 끓는 물에 떨어질 때마다 아찔해하며 작게 신음했다.

         

       파스텔은 의기양양해졌다.

         

       역시 멜리사야.

         

       이 찻잎이 엄청 귀하고 비싸다는 걸 바로 알아채다니.

         

       하지만 그럼에도 파스텔은 손님 대접을 위해 아낌 없이 팍팍 넣는 친구란 말씀.

         

       내 인심만큼 더 넣어야지!

         

       홍찻잎이 한 움큼 찻주전자에 넣어졌다.

         

       와르륵.

         

       멜리사가 옅게 숨을 들이켰다. 손을 잘게 떨더니 안 보이게 테이블 아래로 숨겼다.

         

       우왕, 감동받았나 봐!

         

       이 정도면 친밀도 2배 증가?

         

       『흐음.』

         

       악마가 침음을 냈다.

         

       『어린 크래프트, 찻잎은 끓는 물에 넣는 게 아니야. 끓지 않는 온도에서 은은히 우려내야 한다.』

         

       오잉.

         

       파스텔은 찻주전자를 내려봤다. 물이 팔팔 끓고 잎사귀들이 나풀거렸다. 채소 육수가 끓여지고 있었다.

         

       허억, 샤브샤브.

         

       고기 넣으면 완성될 거 같은 비주얼.

         

       『끓는 물에 잎을 넣으면 좋은 향이 전부 휘발된다. 쓴맛도 강렬해지지.』

         

       악마가 갑자기 자책했다.

         

       『너무 상식적이라 알려주는 것조차 잊어버렸군. 하기야 사정상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으니 모를 만하다. 내가 근래 너무 무신경했나.』

         

       상식 없는 애가 된 기분.

         

       근데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파스텔은 망해버린 찻주전자를 잡고 머뭇거렸다.

         

       초고급 홍찻잎이 왕창 희생된 광경에 충격받은 멜리사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앨시어의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손님 대접 완전 망함.

         

       미묘한 시간이 흘렀다.

         

       앨시어가 너 상식 몰라? 라고 진짜 순수하게 질문하려고 할 때쯤이었다.

         

       학생회실 한편에서 지켜보던 엘리가 다가왔다. 새로운 찻주전자와 서류 뭉치를 들고서였다.

         

       찻주전자가 태연히 교체되고 기사단 관련 서류가 건네졌다.

         

       “보충 자료야.”

         

       마족 소녀는 그리고 시크하게 자리로 돌아가 서류 업무를 마저 했다.

         

       파스텔은 바뀐 찻주전자를 내려봤다. 뭔가 적당량의 홍찻잎이 끓지 않는 온도의 물에서 동동 떠다녔다.

         

       완성된 홍차 향기가 올라왔다.

         

       허억.

         

       자랑스럽게 찻주전자를 들었다.

         

       빠라밤~!

         

       손님 대접 성공함!

         

       오예.

         

       “다들 한잔씩 해!”

         

       나눠주고 설탕을 한 움큼 넣어 마셨다.

         

       홍차 맛있다!

         

       파스텔은 홍차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맑은 찻물이라 마석 가루 없이 마셔도 피를 토하지 않다니. 주스는 너무 농도 짙은 과일 원액일 경우엔 몸이 반응하는데 말이다.

         

       파스텔의 교양 있는 취향~.

         

       몇 번씩 스푼을 움직여 설탕을 넣었다.

         

       꿀꺽.

         

       더 취향!

         

       『……홍차 맛을 볼 거면 그만 넣어라. 그쯤 되면 이미 설탕물이다.』

         

       허억.

         

       사실 나는 설탕물이 좋았던 거야?

         

       충격.

         

       홍차 대접을 끝낸 뒤엔 본격적인 업무 얘기를 시작했다.

         

       “기사단이 굉장히 일을 못해.”

         

       파스텔은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나눠줬다. 멜리사와 앨시어 앞에 보고서가 놓였다.

         

       “내가 따로 만들어 본 기사단의 핵심성과지표인데 미달되는 항목이 한두 개가 아니야.”

       “핵심성과지표요……?”

         

       멜리사가 훑어보며 얼떨떨해했다.

         

       “기밀 열람이 까다롭고 정량화가 어려워 주관성이 많이 개입되긴 했지만 기사단엔 확실히 문제가 있어.”

         

       현상 유지만 간신히 할 뿐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 그래 보이네요.”

         

       보고서가 빠르게 넘겨졌다.

         

       “그런데 문서가 놀랍도록 체계적이고 정교한데 항상 이런 식으로 일하시나요? 학생회라는 게 원래 이런 곳이에요?”

       “그렇지? 일이니까.”

         

       기존 체계가 정말 엉망이라 아카데미 실무진과 크게 충돌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으로 개선한다고 고생했다.

         

       엘리가 매번 복잡미묘하게 쳐다볼 뿐 낯선 방식의 일 자체는 아무런 반발 없이 받아들여서 다행이야.

         

       더스틴은, 그냥 현장 노동직.

         

       “정말 북부가 낙후되긴 했구나…….”

         

       앨시어가 읽으며 멍해졌다.

         

       “아니요. 벨라몬트 공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에서 이곳만 이상한 거 같아요.”

         

       파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이것도 봐봐.”

         

       다른 문서를 나눠줬다.

         

       “이번 테러 때 움직이지 않은 내부 이유를 숨기지 말고 밝히라 다시 요청했더니 또 거절당했어.”

         

       아카데미는 기사단에 간섭하지 말라는 내용.

         

       멜리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유조차 숨기는 건 수상하긴 하네요.”

       “그렇지? 완전 수상하고 완전 무능해.”

       “간섭하지 말라는 건 크래프트가 원인 아니야?”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앨시어에 시선이 쏠렸다.

         

       “아카데미로 하늘섬의 행정권을 손에 넣은 크래프트가 이제 기사단의 군사권에 손을 대는 건 당연한 귀결이니까 저항하는 거지.”

         

       파스텔은 갑자기 억울해졌다.

         

       “나는 그런 나쁜 마음먹은 적 없는데?!”

         

       아카데미도 원해서 얻은 게 아니라 얼떨결에 주워 먹은 거란 말이야.

         

       앨시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면 기사단은 이대로 둘 거야?”

         

       파스텔은 턱에 손가락을 대고 고민했다.

         

       우웅.

         

       상큼하게 말했다.

         

       “아니!”

         

       본때를 보여줄 거야!

         

       빠샤빠샤!

         

       앨시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파스텔은 갑자기 더 억울해졌다.

         

       “이건 다르지! 이건 달라!”

         

       양팔을 휘저었다.

         

       “선후관계가! 선후관계가 다르다구!”

         

       일 잘하고 착한 기사단을 탐욕적인 크래프트가 건드리는 게 아니라 일 못하고 나쁜 기사단을 학생을 위하는 파스텔이 손 보는 거라구!

         

       허억.

         

       결국 손 보는 건 맞음.

         

       파스텔은 눈을 굴리다가 멜리사를 돌아봤다.

         

       멜리사!

         

       내 절친! 나의 절친!

         

       너만은 날 믿어줄 거지?

         

       멜리사가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혹시 기사단이 이러길 뒤에서 부추긴 건 아니죠? 명분 확보를 위한 공작이라거나.”

         

       으아아!

         

       그거 완전 크래프트 가문이나 할 짓이잖아!

         

       격렬히 양팔을 휘저었다.

         

       “어쨌든 선후관계가 달라! 내 분홍분홍 핑크핑크 외형을 보고 한 번만 믿어줘!”

         

       앨시어가 바로 반박했다.

         

       “그거 크래프트의 전형적인 수법.”

       “그렇네요.”

         

       멜리사까지 더 의심쩍어했다.

         

       으아아!

         

       파스텔은 허우적대다가 자료를 허둥지둥 치웠다. 새로운 문서를 서둘러 꺼냈다.

         

       “하여튼 그래서 아카데미는 기사단 타도를 결의했어! 상대가 아직 적대심을 온전히 갖추기 전에 약점을 찌를 거야!”

         

       푹푹!

         

       “그거 엄청 악랄한 발상-”

         

       앨시어를 무시하고 외쳤다.

         

       “기사단이 아직 소극적인 저항을 보이는 건 아카데미의 총장이 사망해서 여유가 많기 때문이야! 아마 내부적으로도 단일대오를 이루지 못한 상태겠지.”

         

       그러니 행정 절차를 살짝 생략해서 몰래 총장 대행을 선발하는 한편 뒤에선 기사단을 찌를 비수를 준비한다.

         

       총장 대행이 선발되면 기사단이 체감하기도 전에 몰아친다.

         

       “하늘섬의 총장은 황제 폐하가 임명해 주셔야 하는데 여태 안 해주시니까 교수진끼리 모여 일단 총장 대행을 뽑기로 했어.”

         

       이 절차는 밀무역 선배인 호레이스 교수님이 준비해 주기로 했다.

         

       “우리가 할 일은 총장 대행님이 쓸 비수를 만드는 거야.”

         

       몇 달 전 하늘섬에 고대 유적이 발견됐다. 거대한 규모에 각종 괴수가 존재하는 상태라 기사단에 공략을 맡겨둔 상태였다.

         

       그런데 유적은 여태 제대로 된 공략 소식 없이 조용했다. 유적 관리는 엄연히 아카데미 권한이라 어서 공략하라고 항의도 했지만 기사단이 밍기적대는 기이한 상황이 이어졌다. 크래프트의 야망이 소문으로 퍼지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번 테러 때 침묵한 걸 보면 기사단에 교단 쪽 스파이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 유적도 교단이 관심 가질만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찔러볼 만하다.

         

       “소수 정예로 기사단 몰래 유적에 침입해 볼 거야. 그리고 수상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팍!”

         

       푹푹! 팍팍!

         

       정의 구현이야!

         

       “혹시 그 소수 정예라는 게.”

         

       멜리사가 파스텔과 앨시어를 번갈아 봤다.

         

       “응응! 세 명!”

         

       정보 통제의 기본은 인원 최소화니까.

         

       앨시어는 교단 테러의 피해자였으니 믿을 수 있고, 멜리사는 그냥 파스텔의 절친이니까 믿을 수 있어!

         

       “혹시 곤란하다면 빠져도 괜찮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 이미 계획을 들은 이상 감시는 붙여 놓을 거지만.

         

       “마침 몸이 굳은 거 같아 실전 경험 차 해적 소탕을 해보려 했는데 잘됐네요.”

         

       멜리사가 흔쾌히 수락했다.

         

       으에.

         

       사람을 죽이며 몸을 풀 생각이었다는 소리를 하면 파스텔은 뭐라 반응해 줘야 할지 모르겠어.

         

       남부 지휘관의 후계자가 이럴 때마다 은근 무서워.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앨시어는?”

         

       은발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할게. 애초에 후원자의 일을 도와주려고 학생회에 찾아왔던 거니까.”

         

       우왓.

         

       친구를 도와주러 오다니!

         

       완전 다정해!

         

       “좋았어!”

         

       파스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팔을 번쩍 들었다.

         

       “파티 결성이야!”

         

       오예.

         

       그러다 뭔가 깨닫고 멈칫했다.

         

       얘네 사이 안 좋지 않나?

         

       이 파티 정녕 괜찮은가.

         

       둘을 번갈아 보니 멜리사가 가볍게 홍차를 마셨다.

         

       “공적인 일에 사감을 담진 않아요.”

         

       앨시어도 찻잔을 저을 뿐 반박하지 않았다.

         

       “좋았어!”

         

       파스텔은 다시 양팔을 번쩍 들었다.

         

       “파티 결성이야!”

         

       유적.

         

       유적유적.

         

       유적 탐험이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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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It’s Mental Immunity

No, It’s Mental Immunity

Status: Ongoing Author:
The guardian demonic sword is troubled and in distress, believing it has been ruined because of me. Does striving for advancement through consuming demonic energy seem too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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