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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휘오오오―

     

    골짜기 틈새로 부는 바람은 여전히 세차다.

     

    나는 동굴 틈새에 몸을 비집어 넣은 채 따뜻한 물을 마시며 보온을 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는데.”

     

    마족의 땅, 마계에는 이런 지형이 흔했다.

     

    그때에 비하면 마족을 경계할 필요도 없으니 훨씬 좋은 조건이다.

     

    적당히 움푹 파인 돌에 눈을 잔뜩 담아 팔팔 끓이니 금방 훈훈해졌다.

     

    열을 내는 법은 어렵지 않았다. 여러 종류의 돌을 주워다 화학식을 살짝 변형하고 합성해서 반응시켰다.

     

    “음흠흠.”

     

    남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니 나도 모르게 절로 바람소리에 맞추어 콧노래가 나왔다.

     

    무슨 곡이지. 빙의 전에 알던 곡이었나?

     

     

    이렇게 온전히 혼자서 보내는 시간은 오랜만이다.

     

    바로 얼마 전에 휴가를 쓰긴 했지만 아셀라가 내내 붙어있었으니까.

     

    내의원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뭐, 쉴 틈 없이 바쁘긴 해도.

     

    “하고 싶었던 일이니까.”

     

    배드엔딩을 지워야 하는 과제가 끼어있긴 해도 의사 일은 역시 꽤 즐겁지 않나 싶다.

     

    “벌써 꽤 많이 삭제했고 말이지.”

     

    확률도 전반적으로 많이 낮아졌다.

    특히 아셀라에 관련된 것들이다.

     

     

    …아셀라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주치의인 내가 한참 자리를 비웠으니 엄벌을 놓을지도.

     

    혹시나 발작이 일어나면 안 될 텐데.

    클로에가 붙어있지만 내 진단과 응급처치 스킬이 없으면 즉각 대응이 힘들다.

     

    “원, 직업정신이 너무 투철해졌나.”

     

    혼자서 쉴 때까지 아셀라를 신경 쓰다니.

     

    나를 그렇게나 싫어하고 괴롭히던 여자인데 말이다.

     

     

    그래도 주치의가 된 덕분에 아셀라와의 관계가 미래와 조금 달라졌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적어도 충성스러운 신하 정도로는 생각해 주지 않을까.

     

    동쪽 성채의 토벌전이 남아있긴 하지만 설마 나를 수색하려는 타냐를 막진 않겠지.

     

     

    …진짜 그러려나?

     

    그럼 안 되는데.

     

    부디 그러지 마라.

     

    “조금은 보고 싶어졌어, 아셀라.”

     

    나도 참.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나를 수도 없이 죽인 여자가 보고 싶어질 줄이야.

     

     

     

    그러기를 얼마 지났을까.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해가 질 때쯤이었으니 기껏해야 네 시간 정도일까.

     

    ―도련님!!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역시 타냐였다.

     

    여기까지 내려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벌써 구조대를 만들어서 찾아왔다.

     

    “엇차.”

     

    나도 얼얼해진 엉덩이를 떼고 동굴 밖으로 슬금슬금 걸어나가기로 했다.

     

    틈새로 몸을 비집고 나가니 내 발자국을 보고 쫓아온 듯, 벌써 내 앞까지 그녀가 달려와 있었다.

     

    다만 나는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앞에 나타나 있던 건 타냐가 아니라.

     

    “황녀님?”

     

    추위로 코가 새빨개진 채 입술을 파르르 떨고 있는 아셀라였기 때문이었다.

     

    아셀라의 입에서 새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허리에 꽉 동여맨 밧줄이 그녀가 직접 절벽을 등반해 내려왔다고 말해줬다.

     

    손에 낀 새 장갑은 벌써 너덜너덜해졌다.

     

    얼굴은 땀이 몇 번이나 흘렀다 마른 흔적으로 엉망인 채다.

     

    “하아, 하아.”

     

    아셀라는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지도 않은 채, 지쳐서 뭐라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내게 다가왔다.

     

    퍼석, 퍼석.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두꺼운 눈에 아셀라의 다리가 푹푹 빠진다.

     

    당장에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기어이 내 앞까지 다가온다.

     

    “…하아.”

     

    그녀가 내 얼굴을 향해 양손을 뻗어올렸다.

     

    혹시나 환상을 보는 건 아닐까, 진짜라고 확인하려는 듯 이리저리 더듬거린다.

     

    그리고는 내게 쓰러지듯 안겨들었다.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듯, 허리를 양팔로 꽉 끌어 당겨온다.

     

    아셀라가 분명하다고 나도 확신했다.

     

    동침할 때 느끼곤 했던 감촉 그대로였다.

     

    “황녀님.”

     

    아셀라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기에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조금은 반가워서였을까.

     

    어쩐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하듯,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주었다.

     

     

     

    ***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2연대입니다!”

     

    통신병이 전해온 소식을 연대장이 헤이케에게 즉시 전달했다.

     

    “2연대가 중앙 성채를 점령했습니다. 백작도 구출했습니다.”

     

    “마침내.”

     

    반나절이 다 되도록 1연대의 동쪽 성채 공성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이 넘는 병력을 다리에 좁게 포진하여 순환하는 전략을 쓰던 헤이케였다.

     

    하지만 점점 기사들의 피로도가 누적되어 전투력이 하락하던 상황이었다.

     

    “아셀라, 해냈군.”

     

    길게는 하루 종일 전투할 각오도 했었다. 처음 전장에 나온 아셀라를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기도 했다.

     

    “후방으로 이동하여 방어진을 편성하라.”

     

    “예!”

     

    이제 적과 통하는 길목은 이곳 동쪽 성채가 유일해졌다.

     

    계획은 심플하다.

     

    도망치는 척하며 적을 최대한 유인한다.

     

    궁정 마법사군의 대형 마법으로 동쪽 성채 통째로 날려버려 섬멸한다.

     

    2연대가 합류하면 압도적인 수적 우위다.

    포위진을 구축하면 잔당도 확실하게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승리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검을 들어라!”

     

    마치 전장의 여신처럼 패기롭게 지휘를 내리는 헤이케를 기사들이 따랐다.

     

     

     

    ***

     

     

     

    “황녀님, 정비가 끝난 2연대가 동쪽 성채로 출발했습니다만.”

     

    라스가 창밖을 내다보며 풍경을 전했다.

     

    “…….”

     

    하지만 아셀라는 다른 일은 어째도 좋다는 듯 라스의 허리를 여전히 꽉 끌어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으음….”

     

    남쪽 성채로 돌아온 라스는 당혹스러웠다.

     

    골짜기에서 구조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아셀라가 딱 달라붙어서는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열렬히 반겨주길 바라진 않았는데.’

     

    아셀라가 직접 자신을 찾으러 왔다고 알게 됐을 땐 조금은 감동한 라스였다.

     

    그만큼 아셀라가 자신을 우수한 신하라 여기고 높게 평가한다고 알 수 있는 계기였으니까.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지금은 제국의 황녀임은 물론이고 전장의 지휘관으로서 지켜야 할 위엄이 있다.

     

    라스는 다른 기사들에게 허리 요대처럼 들러붙은 아셀라를 보이지 않으려 애쓰던 참이었다.

     

    “황녀님, 지휘는…”

     

    “헤이케가 있잖아. 내버려 둬.”

     

    무책임한 발언이었다.

     

    총지휘자가 아셀라여도 막상 현장을 헤이케가 이끌었다는 인상이 남으면 모처럼의 공적이 옅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공자 잘못이야.”

     

    “야만인들에게 습격당해서 골짜기 아래로 떨어진 게요?”

     

    “응.”

     

    죽을 뻔한 건 난데.

     

    상냥한 위로는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아셀라라고 생각한 라스였다.

     

    “옥체에 부담 드린 일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라고 좋아서 그리된 건…”

     

    “대가야. 참아. 앞으로도 계속 참아.”

     

    앞으로라니 얼마를 말하는 걸까.

     

    부디 잠들기 전까지는 자유로워지기를 라스가 속으로 빌었다.

     

    ‘뭐, 아셀라 나름대로는 나를 아낀다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네.’

     

    이제는 라스도 조금은 아셀라의 표현법에 익숙해졌다.

     

    아셀라는 평소 꽤 아끼는 막스에게도 주로 이런 식으로 차갑게 대하곤 한다.

     

    적대적인 어투가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여기니 라스는 조금은 아셀라가 만만해 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아닙니다. 코가 간지러워서요.”

     

    “…흐응.”

     

    그리고 아셀라는 그런 라스의 속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는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이유라면 많았을 것이다.

     

    모처럼 성공적으로 끝났어야 할 토벌전을 끝까지 지휘할 수 없게 되어버렸고, 꼴사납게 허둥대는 모습을 수많은 이들에게 보여버렸다.

     

    가장 화가 나는 건, 라스가 살아있으니 그딴 사소한 것들은 어째도 상관없다고 여겨버리는 이상해진 자신이었다.

     

    ‘정작 라스는 이렇게나 태연하고.’

     

    도무지 방금까지 죽음의 위기를 겪다 겨우 살아난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몇 번이고 죽어봐서 그런 경험은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기억에서 지워버려, 없던 일인 양 행동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나만 호들갑 떠는 바보 같잖아.’

     

    생각해보면 라스가 겁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카밀라가 협박을 해도, 진짜 마법을 맞아도, 게오르크가 죽이려 덤벼들었을 때도, 심지어 암살자가 코앞까지 단검을 들이밀었을 때도.

     

    ‘무섭잖아.’

     

    통증이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아셀라는 잘 안다.

     

    죽는다는 사실보다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주어질 통증이, 고통이 무섭다.

     

    생물이라면 자연스레 생존하기 위해 가진 본능이다.

    극복할 순 있어도 거스를 순 없다.

     

    ‘라스는 왜 안 무서워할까.’

     

    하물며 그의 목을 단숨에 쳐낼 권력을 가진 자신이나 황제의 앞에 서도 당당함을 잃는 법이 없다.

     

    아셀라가 가진 정보로는 라스의 유년기에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은 없었다.

     

    친모가 그를 낳고 사망하고 후작의 관심도 많이 받지 못해 비뚤어졌다는 정도의 보고가 다였다.

     

    애초에 망나니로 유명했던 그가 언제 의학같은 걸 배웠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면서 수첩에는 그렇게 죽음에 관해서 많이 적어놓고.

     

    여전히 아셀라에게 라스는 커다란 의문 덩어리였다.

     

     

     

    아셀라가 고개를 들고 라스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미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셀라는 가슴 속에서 생겨난 문장을 아무 필터링 없이 그에게 바로 말했다.

     

    “라스, 내게 숨기는 비밀이라도 있어?”

     

    그녀의 질문에 라스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셀라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뭔데?”

     

    “에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감히 황녀님께 하겠습니까.”

     

    “왜 안 알려줘?”

     

    “황녀님의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제가 화장실 갈 때 습관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으시잖아요?”

     

    “하, 태연하게 얘기했잖아. 귀가 아파졌어.”

     

    “맞죠?”

     

    능청스럽게 주제를 돌리는 라스였다.

    정말, 어찌나 얄미운지.

     

    “그럼 황녀님은 제게 숨기는 비밀이 있으신지요?”

     

    역공은 생각하지 못했던 아셀라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천리안으로 본 미래는 절대 타인과 공유해선 안 된다.

     

    특히나 그 당사자가 될 라스라면.

     

    다름아닌 자신조차 미래의 단서를 얻었다고 자만하다가 오늘 그를 잃을 뻔하지 않았나.

     

    ‘라스가 알았다간 일을 더 망칠 게 뻔해.’

     

    시키지 않은 일도 오지랖을 부리는 그인데, 자기 가문에 관련된 사건이라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행동할 터다.

     

    “없어.”

     

    아셀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라스는 쉽게 납득했다.

     

    “앞으로도 그래주세요. 주치의는 담당 환자의 상태를 항상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니까요.”

     

    “주치의….”

     

    어째서인지 아셀라는 그 단어가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짜증이 나서 라스의 가슴을 퍽, 이마로 쳤다.

     

    “아야, 왜 그러세요.”

     

    “공자는 내 주치의지만, 동시에.”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그 뒤의 단어를 꺼내기가 힘들다.

     

    두근, 두근.

     

    어쩐지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라스에게 들키면 또 한 소리 할 것 같아서 여태 꽉 껴안고 있던 그에게서 슬쩍 몸을 떨어트렸다.

     

    여전히 양팔은 그의 허리를 두른 채였지만.

     

    “공자.”

     

    “예.”

     

    아셀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라스에게 물었다.

     

    “그 뚱뚱한 애가 했던 말 있잖아.”

     

    “프레다 슈바르츠슈바이크 공녀요? 어떤 이야기 말씀이신가요.”

     

    “…나랑 공자가 정치적인 혼약자라고 했었잖아.”

     

    “아, 그랬죠.”

     

    아셀라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라스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질문했다.

     

    “…공자도 그렇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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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The Doctor Cured The Villainess And Ran Away

주치의는 악녀를 고치고 도망쳤다
Score 3.6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Becoming the physician of the villainess who brought about the world’s destruction, I tried to escape to survive, but the reactions were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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