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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등반 자격을 박탈당한 대학원생들에겐 위치노트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압수할 만큼 위험한 물건은 아니다 보니 미궁에 와서도 노트를 소지한 이들은 제법 되는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갤러리에 존재하는 다양한 게시판 중에는 ‘대학원생 게시판’도 있었다.

        다들 축 쳐져 있는 분위기에 마탑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지라 유입이 있을래야 있을 수 없는 외진 곳이었다.

       

        ====

        [출소까지 앞으로 1128일]

       

        죽고 싶다…….

       

        — 1128일? 뭔짓을 하면 그렇게 오래 있냐

        — ㅋㅋㅋㅋ 자살 안 하고 뭐함

        — 오늘 논문 필사 3회 했는데 오타 있다고 빠꾸먹음

        — 경매 언제 열리냐 제발 좀 나가고 싶다

         ㄴ 아무도 안 사줄 듯

        — 가끔 밑바닥에서 비명 소리 들려오는 거 누구임?

         ㄴ 여기 아니고 B동 쪽인 듯 거긴 진짜들만 가는 곳이라 끌려가면 죽었다 봐야 됨

        ====

       

        부계정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해당 게시판의 유저층에 대한 이해가 필수.

        특히 대학원 경험이 없던 내가 어줍잖게 아는 척했다가는 곧바로 가면 분탕이라는 정체가 들통 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함부로 다가갈 수 없던 곳이지만, 이제 나도 당당한 그들의 일원이었다.

        미궁에서 며칠을 보내며 이들 사이에 자연스레 녹아들 만한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이자젤에게 빼앗은 위치노트로 대학원의 생생한 후기를 써내려갔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내가 보고 느낀 그대로를 적은 글이었다.

       

        ====

        불다람다람쥐람쥐

        [뉴비쟝 얼마 전에 억울한 누명 쓰고 입소했는데 여긴 바깥이랑 사뭇 다르네요?]

       

        밖에서는 매일 수업 보조에 기숙사 관리에 몸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바빴는데 여긴 딱히 정해진 일과도 없어서 좋아요

       

        점심에 룸메이트가 깨워서 일어나 보면 정갈하게 차린 밥도 도착해 있고

       

        감방이 좀 더러웠는데 새곳으로 옮긴 뒤로는 청소도 매일 해줘요

       

        잘때 좀 추워서 둘이 붙어서 자야 하는 것만 빼면 평생 있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하루빨리 누명을 벗으려면 경매에는 나가야 되겠죠?

       

        — ?

        — 겠냐?

        — 어디 호텔방에서 글 올리는 거임?

        — 대학원 밥은 구내식당보다 맛없기로 소문 났는데

         ㄴ 그거 지하미궁 수로에서 잡아온 들짐승들로 만드는 거잖아

         ㄴ 청소도 해준댄다 ㅋㅋㅋㅋ

        — 이 새낀 첩자네 맞는 말이 하나도 없음

        — 뭔 누명을 썼길래 저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냐 ㅋㅋㅋㅋ

         ㄴ 내가 보기엔 룸메이트가 우렁각시임

        — 유 입 쳐 내

        — 절 대 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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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가 문제였을까, 곧바로 배척당했다.

        아무래도 내 대학원 생활이 다른 이들과는 퍽 차이가 나는 듯했다.

        심지어 모르는 계정으로 욕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도 잔뜩 도착해 있었다.

        처음 보는 유동닉들이었는데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같은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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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린이 1111011 :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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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린이 1111012 :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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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린이 1111013 :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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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락 님~ 저 왔어요. 들어갈게요?”

       

        내가 아리송해하던 와중 이자젤이 감방문을 열고 돌아왔다.

        평소처럼 식당에서 배식받은 음식들을 접시에 담은 채였다.

       

        척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수많은 메뉴들.

        매 끼니마다 이렇게 배식을 받으니 구태여 식당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이자젤이 지하미궁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점도 내가 편하게 지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탑에 다닐 때부터 몇 번이나 방화 혐의로 대학원에 끌려왔다는 모양이니까.

       

        평소처럼 그녀는 탁자의 맞은 편에 앉았다.

        초라한 감방 안임에도 접시를 내려놓는 손길에 묘한 기품이 서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쪽이 먼저 식기를 드는 걸 기다리는 행동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조금 전 게시판에서 다른 유저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있잖아, 이거 전부 대학원에서 주는 거야?”

        “아뇨? 제가 직접 만든 건데요?”

        “어떻게?”

        “소환학파를 통해 암암리에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있거든요, 조리는 공용 주방에서 하면 되고. 여기서 주는 밥만 먹으면 굶어죽기 딱 좋아요.”

       

        지금까지 당연히 공짜로 주는 줄 알았는데 설마 매 끼니를 수제로 만들고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음식 솜씨도 좋아 어지간한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거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먼지 한 톨 없는 바닥을 신발로 긁어보며 이어서 물었다.

        생각해보면 새 방으로 옮긴 뒤로 매번 깨끗했다 뿐이지 감방을 돌아다니며 청소를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혹시 매일 청소도 하고 있어?”

        “그야 당연하죠. 클락님이 워낙 늦게 주무시니까 그 시간에 하고 있는데……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그건 아닌데 굳이 할 필요는 없잖아. 아니면 같이 해도 되고.”

        “전 어려서부터 신부수업? 같은 걸 받아와서 혼자 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클락 님은 가만 보고 있으면 챙겨주고 싶단 말이죠? 좀 어리숙하다고 해야 하나…… 아, 나쁜 뜻은 아니에요.”

       

        대륙 최악의 흑마법사 집단인 검은별 출신답지 않게 사회성 좋고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모난 곳 없는데다 생활력마저 다부지다니.

        때때로 산을 태우고 싶어하지만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180도 달라진 인생을 살았을 법한 여인이었다.

       

        으음, 이건 좀 타격이 큰걸.

        나 때문에 잡혀 들어온 이자젤의 무자각한 내조가 살살이조차 뚫지 못한 양심에 크나큰 흠집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제국 경비대에 인계되어 머리와 목이 서로에게 작별을 고할 운명이 아닌가.

        로브에 박혀 있는 붉은색 패치가 그것을 나타내었다.

       

        “좀 치사한 말이지만 마지막을 클락 님이랑 함께 보내서 다행이에요. 이런 행복마저 저한테는 본래 주어질 수 없었던 기회니까.”

        “콜록, 콜록……!”

        “앗, 괜찮으세요? 여기 물 있어요.”

       

        크아아악!

       

        이자젤의 성녀무브에 내 안에 기생하고 있던 사악한 고닉 프리나나가 비명을 지르며 소멸했다.

        순간적으로 피를 토하고 나자 눈앞의 현실과 미래가 또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원생이 되어 학파규칙에 얽매이지 더는 않는 내가 계속 그녀와 붙어 있다가는 말 그대로 정분이 나 버릴지도 모르는 상황.

        마음의 빚이 몸의 빚으로 청산되기 전에 이 관계를 깔끔하게 끝맺어야 했다.

       

        더는 여기서 혼자만 살아나갈 수 없게 된 나는 식사를 마친 후 평소처럼 침대에 눕는 게 아니라 그녀를 빼낼 방법을 모색했다.

        이자젤은 이미 검은별의 타겟이기에 마탑 밖으로 나가봤자 목숨을 잃을 것이 자명.

        그렇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A동으로 옮긴 후 경매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당연히 두 감옥 사이에는 경비가 철저할 테니 지하미궁 전체에 혼란이 필요했다.

        창 한 자루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해봤을 테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마땅한 해답이 없었다.

        고민하던 와중, 갑자기 테이블이 흔들리며 미궁 전체에 진동이 느껴졌다.

        뒤이어 엄청난 비명소리가 발밑에서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끼야아아아악!!!!!

       

        “뭐야 이건?”

        “윽, 아마 지하에 수감되어 있는 이들 중 하나일 거에요.”

        “저런 소리를 내는 게?”

        “네, 제가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떠돌던 이야기인데 대학원의 밑바닥에는 교수가 수백 년 동안 학위논문을 통과시켜주지 않았다는 최초의 대학원생이 갇혀 있대요.”

        “…….”

       

        그러고 보면 학회 때 저 비명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사이 이자젤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으, 귀야…… 처음 저희가 있던 곳보다 아래로 내려와서 더 충격이 큰가 봐요.”

        “위에 빈 방 있으면 바꿔달라고 할까?”

        “소용없을 거에요. 여기서는 사고를 치거나 규율을 어길 때마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보내거든요.”

       

        자신이 껄덕거리던 전 룸메이트를 태워버렸기 때문에 한층 아래인 804호로 내려오게 된 것이라는 이자젤.

        몇 층이 마지막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이자젤.”

        “꺅!? 아, 안 돼요. 제가 손 깍지 끼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알겠으니까 잠깐 그거 치우지 말아 봐.”

       

        그 말을 들은 나는 바닥에 떨어져 깨진 그릇들을 치우던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무래도 미궁에 혼란을 줄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

       

        “이게 다 뭔가?”

        “경매 주최측 앞으로 도착한 서신이에요.”

        “수신인에 이쪽도 적혀 있었기에 같이 왔어요.”

       

        첸돌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인 서신들을 자세히 살폈다.

        부국장인 그의 앞으로 도착한 편지에 찍힌 인장은 단 하나도 허투루 넘길만한 종류가 아니었다.

       

        “미티어 학파의 기둥인 발디니와 글레시아의 스펜달이라…… 게다가 이건…….”

        “칠현자네요.”

        “칠현자에요.”

       

        칠현자의 직계만이 쓸 수 있는 문양.

        그것도 니플헤이르와 칼레이도스, 그리고 아마도 아이테르 세 가문에서 동시에 보내온 것이었다.

       

        앞의 둘이라면 몰라도 해주학파의 전신인 아이테르까지 끼어있는 것을 보니 얼마 전에 B동에 집어넣은 클락 때문에 보낸 것이 분명했다.

        문하생이 대학원에 수감되었을 경우 소속 학파에서 항의 서한을 보내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으나 이건 심상치 않았다.

        고작 해주술사 하나 끌려간 것 때문에 이렇게 많은 학파에서 연락을 취해오다니.

       

        게다가 정보부로부터의 서신도 도착해 있었다.

       

        “여기저기 연줄이 많나 보군. 그놈은 아직 살아있나?”

        “점호 때 모습을 보인 적은 없지만 생각보다 잘 지내는 듯하던데요.”

        “어떡할까요? 혹시 이대로 풀어줘야 한다거나?”

       

        샬롯과 엔의 걱정에 첸돌은 침음을 흘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치안부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치안부장 슈톨렌이 악의의 층에서 급행을 멈추고 도주한 일 때문에 안 그래도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많은 학파들이 동시에 클락의 무죄방면을 주장한다면 내일 당장이라도 그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칠현자를 등에 업은 거대 학파의 입김이란 행정부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

       

        “이건……!”

        “어떤가요?”

        “경매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네? 정말로요!?”

        “그래.”

       

        허나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확인한 첸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엔과 샬롯에게 B동의 경비를 강화하라고 당부했다.

       

        “보아하니 이곳저곳 침 발라 놓은 곳이 많은 듯한데, 이놈은 곱게 죽기 어려울 팔자가 분명하군.”

       

        모든 서신에는 하나같이 클락을 경매에 올리라는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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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I Became the Master of the Magic Tower in Another World

이세계 마탑의 갤주가 되었다
Score 3.4
Status: Ongoing Type: Author: Native Language: Korean

10 years since transfer to another world

What I do inside the Ivory Tower of Truth isn’t much different from what I did on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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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you missed today’s attendance for the ‘Principles and Understanding of Dimensional Glass’ course, you’ll get a penalty] If you want to kill the professor who suddenly changed the classroom with a phase transition 2 minutes before the start of class, go ahead.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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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y does everyone think I’m the Tower 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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