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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제국 북부의 로아크 남작령.

         

       어지러운 구름이 어둠에 파묻혀 있다. 북부인지라 해가 뜨는 시간이 짧아 하늘은 새까맣고, 그에 따라 우중충한 분위기가 한껏 돋보인다.

         

       거리만 봐도 아득한 어둠이 도사리고 빛나는 것은 가정집이나 술집의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촛불만이 유일하다.

         

       ‘북부는 다 이런 건가?’

         

       카서스 페르시아가 갇힌 판옵티콘도 북부다.

         

       ‘이러니 미쳐버린 거군.’

         

       북부에 적응되지 않은 사람은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할 거다. 거리만 봐도 묘한 기운으로 가득해, 이제껏 본 적 없는 끝나지 않는 밤의 저주가 온 것과 같잖나.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곳이네.”

         

       으스스한 남작령을 거닐며 빈민촌으로 향했다.

         

       셀다스의 정보에 의하면 라데아는 빈민촌에 살고 있다고.

         

       ‘그런데 빈민촌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나는 다시 셀다스가 보내준 전서를 펼쳤다.

         

       【라데아. 평민 집안에서 태어남. 부모가 로아크 남작에게 살해당함. 의문의 노인이 거둬 로아크 남작령의 빈민촌에서 여동생과 생활 중. 노인은 사망한 상태.】

         

       ‘아니, 위치는 제대로 알려달라고.’

         

       지도라도 같이 넣어주던가. 셀다스 얘는 유능하면서도 불친절하다.

         

       “어쩌겠냐. 대신 찾아야지.”

         

       나는 적당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길 가던 남성에게 물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소만.”

       “뭐여? 외부인이오?”

       “그렇소.”

       “외부인 질문은 안 받소.”

       “…….”

         

       남성은 못 볼 꼴 봤다는 듯 혀를 차며 떠나갔다.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체념한 상태로 고개를 휘저으며 길드를 찾아가려던 그때.

         

       “길잡이가 필요하세요?”

         

       어느 한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

         

       찰랑거리는 흑발에 긴 속눈썹 아래로 빛나는 선홍색의 눈동자. 오똑한 코와 부드러워 보이는 매혹적인 입술.

         

       미녀 중의 미녀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저기, 그렇게 훑어보시면 좀 그런데요.”

       “아, 미안하군. 경계가 습관이라.”

         

       내 사과에 소녀는 웃으며 받아주었다.

         

       “괜찮아요. 타지에 온 외부인이 그럴 수도 있죠. 저는 라이아라고 해요. 길 안내 받으실래요?”

         

       다행이군. 아까 그 남자처럼 외부인을 배척하는 사람만 있는 줄 알았는데.

         

       “고맙게 받지. 돈은 받나?”

       “당연히 받죠,”

       “얼마나?”

       “1000원이요.”

         

       내가 잘못 들었나?

         

       “1000원이나 받는다고?”

       “네. 오늘 전부 길 안내 받을 거 아니세요?”

         

       그건 맞긴 하다만.

         

       술집 최고급 안주가 200원인데…….

         

       “알겠다. 금액은 지불하지.”

       “좋아요. 따라오세요.”

         

       나는 라이아를 따라 걸었다. 라이아는 이 로아크 남작령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척박한 북부인지라 먹고 살기 힘들고 마수의 숫자가 치솟는 곳이라 안전하지도 않다고.

         

       ‘내가 알던 거랑 같군.’

         

       라이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는 빈민가에 살고 있어요. 뭐, 이 남작령이 대부분 빈민가지만요.”

         

       왜 셀다스가 자세한 위치를 안 알려준 건지 알겠군.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부터가 빈민가였던 거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라니.’

         

       적당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그럼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지?”

       “마수를 잡고 포상금을 받아요.”

       “마수를 못 잡는 사람은?”

       “할 수 있는 걸 알아서 찾아야죠. 저처럼요.”

         

       라이아는 씁쓸하게 웃곤 작은 헛발질을 했다.

         

       “그래도 타지에서 온 오빠 덕분에 일주일은 잘 먹고 잘살 것 같아요.”

         

       나를 보며 배시시 웃는 라이아. 1000원이 그렇게 기뻤나 보다.

         

       “그거 다행이군.”

       “그래서, 여기서 어떤 걸 찾고 계세요?”

       “용케도 내가 뭘 찾고 있다는 걸 알았군.”

       “외부인이 여기에 올 일이 뭐가 있겠어요.”

         

       라이아는 내 몸을 아래부터 위로 올라오며 쭉 훑더니 말을 이었다.

         

       “보니까 잘 사는 영지의 기사분 같으신데.”

         

       복장을 좀 가리고 왔어야 했나. 하지만 틀렸다. 나는 잘 사는 영지의 노예다.

         

       “사람 한 명을 찾고 있다.”

       “사람이요? 이 로아크 남작령에서 누굴 찾아요?”

       “라데아라는 사람이다. 여성이고 너와 같이 흑발에 선홍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라이아가 눈을 얕게 떴다.

         

       “라데아라는 사람은 왜 찾는데요?”

       “데려가려고.”

       “왜요?”

       “그거까진 알려줄 필요가 없는데.”

         

       갑자기 나를 경계하는 라이아. 혹시 라데아와 관계있는 사람인가?

         

       “혹시 라데아를 알고 있나?”

       “몰라요. 1000원은 돌려드릴게요.”

       “잠깐!”

         

       라이아가 허겁지겁 달리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름이 비슷한 걸 보니 셀다스가 말했던 여동생이 쟤인가? 나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빈민가의 깊숙한 곳. 발로 차면 부서질 것 같은 판자로 이루어진 허름한 집이었다.

         

       “언니! 이상한 사람이…!”

       “여기였군.”

         

       라이아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어떻게…!”

       “수상해서 따라왔다.”

         

       서로 마주 보며 경계를 풀지 않고 대치하고 있자니, 판자집 안에서 누군가 나왔다.

         

       “라이아, 무슨 일이야?”

         

       라이아와 외모가 비슷한 여인. 다만, 훨씬 성숙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 이 사람이 언니를 찾고 있었어!”

         

       정답이군.

         

       “라이아, 빨리 이쪽으로 오렴.”

         

       라데아는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쏘아봤다.

         

       “당신 누구죠? 복장을 보니 남작령의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명백한 경계. 나는 두 손을 들며 우선 오해를 풀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 나는 너를 데리러 온 것뿐이다.”

         

       그러나 내 바람과는 다르게 라데아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저를 왜 데리러 와요?”

       “검을 잘 쓰잖나.”

       “그걸 어떻게 아시는 데요?”

       “소문을 들었다.”

         

       라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문…?”

       “그래.”

       “외부까지 퍼질만한 솜씨는 아닌데.”

         

       휘릭! 라데아는 허벅지에 숨겨져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로아크 남작이 보낸 거 같아. 라이아, 안쪽으로 들어가 있으렴.”

         

       라이아는 “으, 응! 알겠어!”하곤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싸울 생각은 없다. 로아크 남작이랑도 관계없고.”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고요. 진정한 목적을 말하세요. 아니면 베어내겠습니다.”

         

       성격 한 번 살벌하군.

         

       “우선 내 소개를 듣지 않겠나?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다.”

         

       꾸욱. 라데아는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 단검의 칼자루를 더 세게 잡았다.

         

       ‘어쩔 수 없군.’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부모의 복수를 도와주지.”

         

       일순 눈이 휘둥그레진 라데아.

         

       “대체 그걸 어떻게…!”

       “너에 대한 정보는 다 조사하고 왔으니까.”

         

       사실 게임 퀘스트로 알고 있던 거다. 북부에서 발생한 재앙의 파도를 막기 위해 동료를 모으는 퀘스트가 있었거든.

         

       라데아가 물었다.

         

       “어디서 오신 거죠?”

       “데카르트 공녀님이 보내셨다.”

       “그런 높으신 분이 저를 왜…?”

       “우리가 인력이 부족해서.”

         

       도저히 경계를 풀 생각이 없는 것 같기에 나는 데카르트 공작가의 패를 보여주었다.

         

       “기사의 패다. 확인해도 좋아.”

         

       라데아는 패를 받아들고 확인하더니 스윽. 날을 세웠던 단검을 내렸다.

         

       “…들어오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판자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상황은 내가 살고 있는 창고만도 못한 방보다 안 좋았다. 이불은 해어져서 다 뜯겨 있고 제대로 된 잠자리도 없다.

         

       ‘괜히 빈민가가 아니군.’

         

       라데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딱히 대접해드릴 게 없네요.”

       “그건 괜찮다. 대접받으려고 온 게 아니니까.”

         

       마루로 된 차가운 맨바닥.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라데아, 데카르트 공작령으로 와라. 우리를 도와주면 생활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을 거고, 돈도 많이 받을 거다. 여동생을 데려와도 좋아.”

         

       라데아는 “하지만…….”하며 시선을 피했다.

         

       “부모의 복수 때문에 망설이는 건가?”

       “…맞아요.”

       “그건 내가 도와주지.”

       “그걸 어떻게요?”

       “남작을 죽이면 되는 거 아닌가?”

         

       토끼눈이 된 상태로 나를 응시하는 라데아.

         

       “저기, 귀족을 죽이는 건…….”

       “이미 죽여봐서 쉽게 할 수 있어.”

         

       로아크 남작보다 더 높은 직위에 훨씬 영향력이 있는 세이렐 백작도 죽였다.

         

       그때도 황실의 조사단이 나오지 않았는데 로아크 남작이 죽는 정도야 뭐.

         

       “…혹시 데카르트 공작가의 특수 첩보원 이런 건가요?”

         

       오, 특수 첩보원이라 하니 좀 멋있군.

         

       “비슷한 거다.”

       “…정말요?”

       “그래.”

         

       미간을 찡그린 채 턱을 어루만지는 라데아.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와 함께하면 원하는 건 다 들어주지.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 거고, 부모의 복수도 이뤄질 거다.”

         

       라데아의 얼굴에서 의심과 기대. 그리고 망설임이 섞여 조화를 이룬다.

         

       “네 부모님이 억울하게 죽은 건 알고 있다. 로아크 남작의 마약 밀수를 황실에 신고하려다가 입막음으로 죽임을 당한 거잖나.”

         

       내 말에 움찔거리는 라데아.

         

       “로아크 남작을 죽여줄 수 있다. 원한다면 네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살려서 데려올 수도 있지.”

         

       계속되는 설득. 라데아의 선홍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동생을 이런 척박한 북부에서 계속 살게 해도 되는 건가? 나라면 이미 제안을 받아들이고도 남았겠군.”

         

       나는 “믿지 못하겠다면 이걸 먼저 받아라.”하곤 앞에 만 원짜리 화폐를 밀어 넣었다.

         

       “선금이다. 데카르트 공작가로 가면 10배는 더 얹어주지.”

         

       라데아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 하시는 건데요? 제가 아무리 마수를 사냥하고, 검을 잘 쓴다고 해도 공작가의 기사보단 아닐 거 같은데요.”

         

       그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나는 너의 실력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라데아는 과거, 대검호라고 불리는 노인이 직접 검술은 전수한 자. 아직 그 꽃을 전부 개화하진 않았지만, 장래가 유망한 건 맞다.

         

       나와 케일이 도와준다면 빠르게 재능이 폭발하겠지.

         

       “…솔직하게 말해서 의심이 풀리지 않아요. 어떻게 저를 알고 온 건지도 모르겠고, 저를 왜 그렇게 신뢰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복수까지 대신해 주시는 이유도 모르겠어요.”

         

       모르는 것투성이구나.

         

       “제국에는 엑시드라는 암흑 길드가 존재한다.”

         

       암흑 길드라는 말에 고개를 번쩍 드는 라데아. 나는 말을 이었다.

         

       “그 엑시드와 우리는 협력 관계지. 우리는 인력을 찾고 있었는데, 적합한 인재가 있다고 너에 대한 정보를 주더군.”

         

       당연히 거짓말이고 셀다스는 제대로 된 정보도 주지 않았다. 우연히 길 안내를 하고 있던 라이아와 만나서 여기까지 온 거지.

         

       “정보를 확인하고 고심한 끝에 이 일에는 네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복수를 대신 해주는 건 투자에 불과하지.”

         

       나는 올곧은 눈빛으로 라데아와 눈을 마주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인지라 라데아가 움찔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이 로아크 남작이 보낸 첩자면 어떡해요? 제안을 받아들이면 이 자리에서 죽인다던가, 귀족 모욕죄로 잡아간다던가…….”

         

       어휴, 이거 쉽게 경계가 풀리지 않군. 이게 당연한 거지만. 나는 고개를 휘저었다.

         

       “데카르트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기사 패를 보여줬지? 그걸 로아크 남작이 감히 위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라데아는 눈을 끔뻑였다.

         

       “믿을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군. 다른 인재를 찾으러가는 수밖에.”

         

       나는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협상에선 이런 밀당이 중요한 법이지.

         

       “잠깐만요…….”

         

       라데아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정말, 정말 제 여동생까지 받아주시고 복수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는 선홍색의 눈동자.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믿을게요. 어차피 이대로 있어봤자 희망이 없거든요.”

         

       나는 라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생각했다.”

       “…그렇게 친한 척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 미안하군…….”

         

       케일이 했으면 넘어갔을 거 같은데. 왜 항상 나만 이런 꼴을…….

         

       “복수는 조건이 있어요. 제 손으로 직접 로아크 남작을 죽일 수 있게 해주세요.”

         

       그거야 간단하지. 나는 피식 웃었다.

         

       “알겠다. 그럼 바로 작전을 시작하지.”

         

       카아락이라고 했나? 그놈 코스프레를 할 시간이다.

         

       ‘나는 지금부터 모옥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라데아의 외모는 [프란체 코퍼레이션!] 공지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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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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