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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9

       하늘이의 보충수업은 그 이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다. 쉬는 시간마다 하늘이는 그 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요약하고 정리해주었고, 시간이 되는 한 내 머리에 쑤셔 넣으려고 했다. 만약 그 공부 내용들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내 머리에 넣는 법이 있었다면, 하늘이는 기꺼이 그렇게 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도 최악은 수학 하나뿐이네.”

        

       학교 수업이 끝날 때 쯤에, 하늘이는 나에게 그런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물론 그렇다고 나머지 수업을 잘 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수업 내용들은 나로서는 기억해내기엔 너무 까마득했다. 학교 선생들이 수업을 잘하는 학원 교사 출신이었다고 해도, 애초에 ‘공부하기 싫어’라는 마음가짐인 나의 입장에서는 한쪽 귀로 들어가 반대쪽 귀로 다시 나올 뿐이었다.

        

       그나마 ‘최악은 수학 하나뿐’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도, 그래도 내 머릿속에 학교 수업 내용이 어느 정도 상식으로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은 포기했어도 한국어인 국어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고, 마찬가지로 영어도 수능 준비 할 때 듣기공부를 열심히 했었으니까.

        

       탐구 영역이야 말할 것도 없고. 수식이 들어가는 내용이 아니라면 그래도 그럭저럭 기억나는 부분이 있었다. 보통 학기 초의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은 입문 부분인 경우가 많아서 그나마 더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도 있다.

        

       “그럼 남은 공부는 부 활동 이후에 하도록 하자. 교실에서 할지, 아니면 집에 가서 할지는 생각해보기로 하고.”

        

       물론 내가 그나마 알아먹은 수업이 있건 없건, 나를 공부시키겠다는 하늘이의 마음도 한없이 진심이었다.

        

       여기서 더 반박을 해봐야 저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넘기기로 했다. 뭐, 친구들이 집에 온다고 해서 나쁜 것도 없으니까.

        

       어차피 집에 수아도, 소희도 있다. 하늘이 혼자 빠지는 것은 좀 그렇기는 하다. 하늘이까지 저택에서 머물겠다는 말을 할까 봐 조금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그래도 하늘은 그렇게까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결국 한 명이 늘었네.”

        

       축구부에 갔더니, 남다운은 그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신소희라고 합니다. 저희 아가씨의 체력단련을 도와주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 남다운에게, 신소희가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

        

       남다운은 ‘얘 뭐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게.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아까 아침부터 이렇게 행동하는 것에 맛 들였는지 계속 이런다. 의외로 코스프레 같은 것이 취미인 것은 아닐까?

        

       ……에이, 그것까진 아니겠지.

        

       고개를 든 소희의 얼굴이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던 것을 보면, 그것도 소희 나름의 농담이었던 모양이다.

        

       지난번에 만나서 말 몇 마디 섞은 것이 다인데, 축구부는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너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들이잖아.”

        

       달리기가 끝나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돌아온 대답은 그것이었다.

        

       “내가 무시할 인간들은 너를 무시하는 인간들 뿐이야. 이 학교에서 우리한테 말을 거는 시점에서 그 사람들은 상대할 가치가 있는 정상인들이잖아?”

        

       “야, 말 하는 게 너무 한 거 아니냐.”

        

       남다운은 소희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굳이 격렬하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도 내가 이 학교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참고로 처음에는 나랑 말 섞는 것도 무서워했던 부장은 슬쩍 눈을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심한 건가? 내가 오늘 하루 동안 느낀 것만 해도 지나가는 애들마다 한 대씩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소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축구부원들이 모여 서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그쪽에서는 소희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돌렸다.

        

       “선배는 어때요?”

        

       “뭐가.”

        

       내 물음에, 남다운이 별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랑 대화 나눈다고 사람들이 따돌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별로?”

        

       그 반응에 내가 눈을 크게 뜨자, 남다운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크게 신경도 안 써. 어차피 여자 반에 있고, 무엇보다 너는 다른 학년이니 마주칠 일도 없으니까. 1학년 애들이라면 어떨지 모르겠다만.”

        

       확실히, 학기 초에 여자애들은 나를 바라보는 것도 조심스럽긴 했다. 반면에 내가 남자 교실 복도를 걸을 때 나를 보는 눈과는 조금 달랐으니까. 진짜 내가 무서워서 시선을 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자신이 불건전한 생각을 하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이긴 했다.

        

       “1학년 때야 뭐든지 조심해야겠지만, 그런 거 있잖냐. 남자끼리 부리는 객기 같은 거. 오히려 조심하겠다고 니 이야기 막으려고 하는 놈이 있으면…… 겁 많은 새끼냐는 소리를 할걸, 아마.”

        

       ‘겁 많은 새끼’라는 말을 할 때, 남다운의 시선이 살짝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야기를 꾸며낸다기보다는…… 조금 상상이 간다. 남자끼리 거리낌 없는 대화를 할 때 ‘겁 많은 새끼’같은 말 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말할 테니까. 그렇다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풀어놓기에는 부끄럽겠지만.

        

       단순히 내 이야기를 하고 매장되었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는 말보다는, 차라리 ‘걔네 셋이 진짜 레즈 관계인가’같은 말을 더 자주 나눌 거다. 학년도 다르고, 성별까지 다르면 그때는 진짜로 남 이야기니까. 차라리 눈에 보이는 가십 쪽이 더 풀어놓기 재미있겠지.

        

       우리 반 여자애들도, 내가 눈앞에 있으니까 대놓고 떠들지 못할 뿐, 뒤에선 열심히 씹고 뜯고 하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그게 여자 대 여자의 로맨스라면…… 뭐, 좀 과격한 애들 사이에선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대충 상상이 가긴 했다.

        

       나는 부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부장도 나를 보고 자신이 보였던 반응이 쪽팔렸는지, 크흠, 하면서 헛기침하고는 눈을 돌렸다.

        

       “그런데, 선배는 안 무서워요?”

        

       “엉?”

        

       거기까지 생각한 내가 조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남다운에게 질문하자, 남다운은 마치 자신이 그런 질문을 들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듯 되물었다.

        

       “저랑 대화해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은 들어봤을 거 아니에요.”

        

       나야 ‘원작 남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을 걸었지만, 상대가 나의 말을 받아주고 아니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예를 들어 원작 남주인공 중 하나인 학생회장이 있다. 걔는 나랑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심지어 얼굴에서 빛이 나지도 않았고.

        

       남다운은 지금도 얼굴에서 희미한 빛을 뿜고 있었다.

        

       이제 슬슬,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아마 예사라는 자기 삶에 도움이 될 사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사람은 전부 예사라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원작에서는 대체 왜 그랬던 걸까.

        

       ……어쩌면, 이 능력 때문에 사람들 얼굴에서 빛이 나오는 것은, ‘나의 지식’이 포함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사라의 능력을 ‘내가’ 이어받았기에,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와 예사라의 육감이 어우러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예사라와 대화하거나 그 기억을 찾은 것은 아니라서 확신은 못 하겠지만.

        

       “아, 그거.”

        

       남다운은 쭉 펴고 있던 다리를 접어서 양반다리를 만들고 말했다.

        

       “그거 결국 소문이잖아.”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그냥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남주인공’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고?

        

       “소문이라고요?”

        

       “그래, 소문. 뜻 몰라?”

        

       어…… 그러니까.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요?”

        

       “그래.”

        

       내 질문에, 남다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요?”

        

       내가 되묻자, 남다운은 오히려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너는, 고작 자기 딸한테 말 걸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박살 내버리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21세기에? 차라리 좀 어중간하게 사는 놈이 아예 못사는 사람을 묻어버렸다는 소문이었으면 이해가 가지만, 국내에서 대놓고 돈 많기로 소문난 사람이 그런 짓을 하면 바로 전국적인 이슈가 되어버릴걸.”

        

       “하지만 돈으로……”

        

       “돈으로 묻어버리는 것도 어느 정도지, 학교 밖은 어떻게 하려고? 전 국민한테 돈을 뿌리기라도 할 거냐?”

        

       “어…….”

        

       그러니까 학교 안에서 이야기가 끝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누가 실종되었다거나, 얻어맞았다거나, 불을 질렀다거나…… 전부 소문일 뿐이야. 그냥 안 좋은 일이 좋지 않은 타이밍에 일어났을 뿐이고, 거기에 살이 붙어서 헛소문으로 불어난 거지. 아니면 누가 그렇게 되도록 조작했거나.”

        

       “…….”

        

       아니, 뭐, 가능성만 따진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여기는 그냥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인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데, 실종이라뇨?”

        

       그냥 돈으로 묻어버리는 게 아니라고?

        

       남다운은 내 질문에,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모르냐?”

        

       “네, 몰라요.”

        

       “그럼 그냥 그대로 쭉 모르고 살아. 알아봐야 좋을 것도 없으니까.”

        

       아니, 말을 그렇게 해 버리면 더 궁금해지잖아!

        

       *

        

       예사라는 그 이후에도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남다운에게 말했지만, 그는 전부 거절했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옳은 이야기도 아닌 것을 그대로 믿어봐야 본인에게 좋을 것도 없으니.

        

       ……뭐, 예사라가 보이는 반응을 보면 조만간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겠지만.

        

       “너 그 녀석 뒷이야기에 대해서 뭐 알고 있는 거라도 있냐?”

        

       언제나처럼 예사라가 담 넘는 것을 도와주고 돌아오자, 부장이 남다운에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이 사람은 덩치가 산만 하면서 성격이 너무 소심하다. 정작 축구 이야기만 하면 그 성격도 180도 바뀌긴 하지만. 차라리 계속 축구를 하면 좋을 텐데.

        

       “글쎄요.”

        

       알고는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대답하면 일이 엄청나게 귀찮아지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는 그냥 그렇게 대답하고 털어버렸다. 다행히 부장은 더 물어오지는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은근히 눈치가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뭐, 이야기 일부는 실제로 일어났고, 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전부 진실이지는 않았다. 어차피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만약 그 이야기가 진짜로 전부 진실이었다면, 그가 이 학교에 다시 다닐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남다운은 스스로가 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담이 좋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한 것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그 녀석이야말로 담이 좋다고 할 수 있겠지.

        

       “뭐, 제가 예전부터 촉이 좋은 편이라서.”

        

       남다운은 그저 그렇게 말하곤 발로 축구공을 굴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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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I Don’t Want to Become a Villainess

Q악역 영애가 되긴 싫어
Status: Completed Author:
I fell into the single-player game 'If You Wish' and decided to struggle to avoid becoming a villainess with a terrible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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