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89

        

         우선은 재빨리 문을 닫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기차 통로를 제로의 덩치가 가로막고 있다는 공공의 문제도 있었지만, 나까지 소란을 피웠다가는 진짜 총알 날아다니는 문제로 번질 것이 뻔했기에 내린 판단.

         

         “악마… 우붑?!”

         “미안하군, 우리 애가 좀 낯선 사람을 좀 무서워해서.”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죠, 뭐.”

         

         다행히 두 선객 중 남성, 아시프도 내 배려를 늦지 않게 눈치챘다.

         꺅꺅 거리는 로잘린의 입을 감싸고 다시 자리에 앉히기까지 한 2초쯤 걸렸나? 준비된 변명부터 행동까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부드럽고 깔끔해서 박수라도 쳐줄 뻔했다.

         

         하지만 실제로 치진 않고 아껴 두었다.

         그녀에 비하면 제로는 저런 공황 발작(Panic Attack)도 안 일으키고, 아주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채 균형을 잡고 있는 것 같아서 진짜 칭찬을 해주고 싶었으니까.

         

         탑승 절차를 공부한다더니 금세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매너도 알아준 것 같아서 기쁘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이 잠재적 위협이라고 볼 수도 있거늘, 제로는 내 의향이나 안전만 관련되면 사명감이 지나쳐서 과잉 반응을 일으켜서 탈이지만. 그것도 이제 차츰 줄여나간다니 나도 조금은 느긋한 태도로….

         

         “아나스타샤 아가씨? 그대를 의심하는 건 멈췄으니 그… 환영 인사의 강도를 좀 낮춰줄 수 있겠나? 결착을 지으러 온 게 아니라면 말이지.”

         

         “…거 사람이 신나게 칭찬하고 있었더니.”

         

         어느새 다른 쪽 팔로, 주인을 갈아탄 손도끼를 꼬나 쥔 제로를 만류했다.

         그럼 그렇지. 얘가 한바탕 싸운 역사가 있는 인물들을 보고도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수동적인 기계는 아니었다.

         

         로잘린이 아니더라도 웬 전투 병기가 밀실 출입구를 틀어막고 도끼를 꺼내면 누구라도 놀라겠지. 으휴.

         

         끼익….

         

         두 파이브 아이즈 요원들의 건너편.

         

         나름 괜찮은 쿠션이 깔린 좌석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제로는 대응력이 떨어진다며 사양했지만, 무릎을 굽히고 착석하는 게 추진력을 얻기엔 더 유리하지 않냐는 내 농담에 납득하고 앉아버렸다.

         

         …그게 도대체 왜 논리적인 설득으로 작용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

         

         “어 음….”

         – ……. –

         

         더럽게 어색한 침묵이 쭉쭉 늘어진다.

         저쪽에서 먼저 대화의 물꼬를 터줬으면 좋겠는데 아시프는 이 상황에 대한 주도권이 완전히 나한테 있다고 믿는지, 아까 전의 한 마디 이후 물끄러미 여기를 바라보며 기다릴 뿐이었다.

         

         정면을 바라보기 힘들어서 객실 창문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출국 절차를 마친 승객들이 승강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객실은 지정되어 있으니 한숨 돌리는 사람, 반대로 기댈 곳이 있는 입석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질주하는 맹자들, 하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자판기에 걸렸는지 낑낑대는 불운한 사람.

         

         발차까지는 아직 시간이 약간 있다.

         

         우리가 다음 기차를 타던, 저들이 포기하고 내리던, 어떻게 극적으로 합의점을 찾던 이 웃긴 대치를 풀어나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다른 말로 하면… 무조건 풀어내야 했고.

         

         내 문제로도 벅차 죽겠는데, 마냥 미워할 수도 없는 원작 네임드들과 세상 불편한 오월동주를 즐기며 밀실에 갇힌 채로 여행하라고?

         

         절대로. 사양하겠다.

         

         “크흠. 저기 제로?”

         

         –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뭐, 뭐를. 도끼는 왜 또 뽑는데. 그런 살벌한 거 아니야. 겨우 진정한 로잘린이 또 노트북으로 얼굴을 가렸잖아.

         

         “진짜 미안한데… 승강장에 있는 저 자판기에서 주스 한 캔만 사다 줄래? 아, 브랜드는 데일리 브루웍스로(Daily Brewworks).”

         

         – ……지금, 말씀이십니까? –

         

         노골적으로 자리를 잠깐 비켜 달라는 핑계에 그가 정말 따르기 싫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모든 여건을 고려했을 때, 맞는 판단이 아니라는 건 나도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일년이면 사실 사람이 바뀌고도 남을 기간일진대, 내가 단편적인 미래의 가능성만 보고 지나칠 정도로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걸 수도 있고. 위태로운 나무 다리를 다짜고짜 직접 밟아보는 성급한 행동일지도 모르겠으나.

         

         다소 장황하게 말하긴 했어도 여기서 쌈박질을 했을 때 손해를 더 크게 보는 건 우리가 아니다.

         현상범 주제에 정면돌파를 택한 저들이지.

         

         게다가 무장 해제만큼 이 숨막히는 공기를 푸는데 효과적인 건 없다고 생각되는데, 현재 내 최고 무장은 권총이 아니라 제로 그 자체.

         

         딱히 그럴 의도는 없었다 해도, 지정학적 우위를 점한 내가 한 발자국 물러나주는 게 옳으리라.

         

         “다른 게 아니라 약 좀 챙겨 먹으려고, 기차 떠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부탁해.”

         

         – …알겠습니다. 데일리 브루웍스의 주스, 매운맛은 가급적 없는 제품으로 구입해오겠습니다. –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잘 들을 수 있도록 통신을 활짝 열어놓기까지 하니, 그제야 제로도 마지못해 객실을 나섰다. 가는 길에 쓸데없는 사족 붙이기는… 누가 상전인지 모르겠네.

         

         드르륵… 탕!

         

         객실문이 닫히자 잠깐 사이 새어 들어오던 복도의 소음도 잠잠해졌다.

         끝까지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던 케어봇도 이제는 없고, 상대방도 열린 마음으로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으니. 스포츠로 치면 다시는 없을 완벽한 노 마크 찬스.

         

         자, 마음 편히 들어오셔도 됩니다. 저는 이 기막힌 우연에 대해 여러분이 만족하실 만큼 설명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그 대신 안 믿으면 댁들이 다음 기차 타는 걸로 하고!

         

         “”…….””

         

         어… 그러니까, 아시프 씨? 로잘린? 우리 얘기를 좀.

         

         “”…….””

         

         이야기를…… 시발. 왜 이렇게들 얌전하세요?! 명색이 저항군이라는 분들이…!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아직도 내 입만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질려버렸다.

         차라리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느니, 뒤끝이 장난 아니라느니 떠들어주는 게 나았겠다. 그럼 적어도 어느 쪽으로 굴러가던 사태가 진전되긴 했을 테니까.

         

         “씁….”

         

         마른 입술을 슬쩍 적신다.

         갑의 입장에 서 본 적이 있어야 자리를 주도하는 법도 알 텐데, 유감스럽게도 갑은커녕 조별 과제의 조장 역할도 기피하던 인간한테는 과분한 책임이 주어진 게 아닌가 싶다.

         

         보통 내가 나서야 하는 순간은 부담감도 못 느낄 정도로 열악하거나,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건 좀… 겸연쩍은데.

         

         참고로 삼을 만하거나, 하다못해 어설프게 흉내 낼 만한 사람이라도 어디 없나?

         …우습게도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도 만났고, 오늘만 해도 족히 네댓 번은 씹어 댄 잘난 인간이.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대고, 비스듬하게 다리를 꼰다.

         목청도 한 번 시원하게 가다듬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작위적이라 참았다.

         

         “꽤 대담하시네요? 바이크라도 구해 타고 사막을 횡단할 줄 알았는데, 이런 대낮에 당당하게 기차 여행이라니.”

         

         “허허… 우리 같은 선량한 시민이 뭣하러 그런 불편을 감수하겠나? 성탄절 기념 관광도 끝났으니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곧바로 노련하면서도 얄미운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태도가 아주 능청스러웠다.

         

         그런데 그걸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람끼리도 꼭 하야 하냐고 물으면 글쎄…. 아, 이게 장수의 비결이라면 배울 의향은 많이 있을지도?

         

         “…팔은 좀 어때요. 억지부린 대가치고는 싸다고 생각하는데.”

         

         “…난 원래 외팔이었네, 하지만 걱정은 고맙군. 헌데 마음씨 넓은 아가씨는 우리와 무슨 인연이 있어서 계속 마주치게 되는 건지가 훨씬 더 궁금하네만.”

         

         빈정거리면 비아냥거리고, 쿡쿡 찌르면 마찬가지로 콕콕 찔러온다.

         턴제 게임? 카드 놀이? 하여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오싹오싹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허접한 연극을 시도했는데 상대방이 너무 찰지게 잘 받아주니 제동 걸기가 어려웠다.

         관객석에서 ‘이… 이게 어른들의 정치…?!’ 같은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로잘린은 빼더라도 언제 멈춰야 할지 감이 전혀 없었다.

         

         그보다 아시프 아저씨는 판이 깔리니까 이제서야 말문이 트이시네. 어이없게 진짜.

         

         “못 다한 일에 마침표를 찍으러 왔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자비롭고… 그렇다고 또 우리의 작은 취미 활동에 뒤늦게나마 관심이 생겼다기엔… 별로 그런 의중은 없어 보이는군.”

         

         “…그렇게 보는 눈이 정확하신 분께서, 왜 그때 골목에서는 고집을 부르셨는지 도저히 모르겠네요.”

         

         내 퉁명스러운 대꾸를 들은 아시프가 치아가 보일 정도로 씨익 웃었다.

         꼭 견고한 장벽의 허실이나 거의 완벽한 가품假品의 흠을 찾아낸 것처럼, 성취감을 품은 미소였다.

         

         “자네와 내가 만난 건 이게 처음이잖나? 미리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관계가 꼬이지도 않았겠지.”

         

         “허…?”

         

         말장난이 제법이시다. 더군다나 장난스런 말투와는 별개로 내용은 계속 핵심을 찌르고 있어서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아시프 씨가 이런 평가를 들으시면 엄청 황당해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커뮤니티 댓글 전쟁이나 비슷한 양상을 띠는 것도 같았다.

         

         서로 속을 떠보고… 너보다 내가 잘났다고 어떻게든 뭉개려 들고…. 건전한 설득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분위기가 형성되어버린 건 역시 참고로 삼은 인물이 나빴던 게 분명하다. 음.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기에 후회이며, 당면한 문제점은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그래서, 아나스타샤 발렌타인. 그대는 뭘 바라고 이 남루한 패잔병들을 찾았는지 이제 그만 말해주겠나?”

         

         “순순히 실토하… 해주세요…!”

         

         “……거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말했던 거, 지금이라도 취소해도 될까요?”

         

         어쩌다가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난폭한 대전제가 성립된 걸까.

         일단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라고 각자 갈 길 가자고 해놓고, 세상 열심히 쫓아온 사람이 말했습니다.

    역대급 지각! 너무 죄송합니다.
    구상할 때는 괜찮았는데 막상 쓰다보니 너무 딱딱한 이야기가 나와버린 것 같아서 계속 수정하고… 끊을 부분도 애매해서 또 고치다보니 시간이 아주….
    으… 이럼 내일까지 영향이 갈 텐데! 으아아!!

    다음화 보기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I Became a Sub-Heroine in a Cyberpunk Game

Status: Ongoing Author:
No matter how many times I repeated the episodes, I couldn't clear the true ending of the open-world shooting RPG, Neo Haven. Just when I thought I finally cleared the hidden true ending... they want me to actually clear it without any help from the game system or save/load features.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