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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체념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일순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게 익숙하다고? 제국의 근간이 되는 공작가의 영애가?

         

       나는 의문과 분노가 섞인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주인의 명을 거역할 셈이니?”

       “그건 아닙니다만, 주인님을 존중하지 않는 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아, 프란체는 고개를 저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큰 소란으로 번지면 어쩌려고 그러니.”

       “하지만…….”

       “이런 취급은 익숙하니까 그만두렴.”

       “…….”

         

       그녀를 보면 볼수록,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심기가 불편하다.

         

       노예 신분을 탈출하기 위해, 그저 이용하려고만 했던 그녀가 받는 취급을 알게 될수록 기분이 불쾌하다.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주인님의 뜻대로.”

         

       잡고 있던 시종의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녀는 그대로 넘어져서 무릎을 꿇은 채 흘러나오는 코피를 닦았다. 그러고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뭐, 네가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시건방진 년. 자기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저런 눈빛이라니.

         

       시종이 중얼거렸다.

         

       “감히, 노예 주제에…….”

         

       그냥 못 들은 척해줬다. 어차피 현재 내 목적은 살기 위해서 프란체의 신뢰와 호감을 받는 것이지, 자존심을 지키는 게 아니었기에.

         

       시종이 힘차게 일어섰다. 다시 한번 살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노려본 뒤, 쿵쿵거리는 발걸음을 유지하며 문으로 향했다.

         

       ‘주제도 모르는 건 자기 같은데.’

         

       쯧, 이렇게 생각해봐야 뭐 하겠나. 내 머리만 아프지.

         

       문이 벌컥 열렸다. 그러나 문을 연 것은 시종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공작저로 돌아오자마자 벽에서 큰 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에덴 데카르트. 그는 시종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렸다.

         

       “프란체 데카르트. 이제는 시종도 때리는 건가? 그것도 너의 전속 시종을?”

         

       프란체는 말없이 창문만 바라봤다. 변명할 힘도 없는 것인가. 아니면 변명해봤자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가.

         

       ‘그럼 내가 말할 수밖에 없지.’

         

       그녀를 위해 내가 대신 입을 열었다.

         

       “데카르트 소 공작님. 제가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된 이유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보아라.”

       “저 시종이 제 주인님을 모욕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을 보시면 바로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벅. 의심의 눈초리를 잠시 보내던 에덴 데카르트가 걸음을 내디뎠다. 옆에 있던 시종의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시종들의 괴롭힘은 그에게서 시작된 건 아닌 듯했다.

         

       “…이건.”

         

       에덴 데카르트의 얼굴을 바라봤다. 놀란 표정이었다. 하긴, 그렇겠지. 저건 도저히 귀족 영애의 식탁이라곤 생각할 수 없으니까.

         

       “제 주인을 모욕했다고 간주하여 시종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만일, 이와 관련해서 처벌을 내리실 예정이시라면 제게만 내려주시길.”

         

       에덴 데카르트가 눈을 얕게 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부탁한다고 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주제를 알도록.”

       “…….”

         

       나는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부탁도 못 하고. 할 수 있는 게 뭐냐.

         

       ……노예의 삶은 참으로 서럽구나.

         

       에덴 데카르트가 말했다.

         

       “프란체 데카르트. 대체 언제부터이랬지?”

       “…….”

       “대답하지 않을 테냐?”

       “대답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그 말은 무슨 의미지?”

         

       프란체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선 일말의 기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8살 때부터 이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뭐?”

       “이렇게 살아온 게 12년 전부터입니다.”

         

       …12년이라고? 그럼 8살 때부터 이런 음식만 먹고 자랐다는 건데. 어쩐지, 피부가 창백하더라. 여태 죽지 않은 게 용하군.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이 저를 경멸하고 괴롭히기 시작할 때, 시종들도 저에게 똑같이 대했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말하면 들어주셨을 건가요?”

         

       허, 프란체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당신들에게 기대하지 않아요. 여태껏 그렇게 괴롭혀온 사람이 인제 와서 그러지 마시지요. 어색합니다.”

         

       에덴 데카르트는 일자로 입술을 다물었다. 그만큼 프란체의 목소리는 무덤덤했고,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응어리진 서러움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만 제 방에서 나가주시지 않겠나요? 보시다시피 저는 근신 중이라서요.”

         

       프란체의 싸늘한 말투에 에덴 데카르트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유추해보면.’

         

       프란체 데카르트는 성인이 되기 전, 8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해왔으며 시종들에게까지 무시당했다.

         

       비록, 지금은 나이가 있어 그 괴롭힘이 이어지지 않았다곤 해도 시종들의 무시는 그대로이며, 그녀에게 향하는 집안의 핍박은 여전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녀의 서사는 게임에서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악역이었으니까. 죽음이 정해진 운명이었으니까.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가 나올수록 기분이 더럽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에덴 데카르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 시종의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하마. 너는 따라오거라.”

       “예…….”

         

       그는 가벼운 한 마디를 남겨두고 방문을 나섰다. 시종도 잔뜩 눈치를 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에덴을 따라나섰다.

         

       쿵. 문이 닫혔다. 저 시종은 이제 공작가에서 해고될 것이다. 일방적인 해고를 당하면 추천서도 받지 못하고 나가야 하니까 그녀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이겠지. 주제도 모르고 해온 행위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

         

       뭔가 마음이 답답하다. 구역질이 나온다. 속 안이 뒤틀리는 이 느낌. 대체 뭘까.

         

       동정인가? 분노인가? 이러한 감정들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만, 꼬이고 꼬인 실뭉치처럼 좀 더 복잡했다.

         

       프란체가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니?”

       “…주인님의 곁에 있는 것이 제 존재의의가 아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내가 말하자 피식 웃는 프란체. 그 미소를 보았다. 저런 모습이 참 어울리는 사람인데.

         

       문득 이런 절망 속에서 피어난 저 웃음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은 아닌데.

         

       프란체가 말했다.

         

       “나 대신 시종한테 화를 내준 건 고마웠단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려무나. 네가 어떻게 행동함에 따라서 내가 곤란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거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나라는 존재에 어색함이 느껴졌다. 나는 로판소의 최종 보스, 진 바렌베르크인가, 아니면 100만 뮤튜버였던 김공략인가.

         

       둘의 인격이 섞여 나도 모르는 인격이 되었다. 나도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질적이다. 어째서 이렇게 노예 생활이 익숙한지도 모르겠다.

         

       아직 이 세계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플레이어 동기화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럴 것이, 당장 이 몸의 주인인 나조차도 지금의 나에게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으니. 하지만 이게 납득할만한 정답은 아니었다.

         

       “진.”

       “예.”

       “내 근신이 풀리는 즉시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단다.”

         

       가야만 하는 곳? 혹시 파티로 가는 건가? 로판소에 나왔던 모든 사건의 시작을 알리는 그곳으로?

         

       “계속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너는 들어도 모르겠지만, 엘다스 후작가에서 파티가 열린단다. 나는 그 파티에 꼭 참여해야 하고.”

         

       엘다스 후작가. 제국의 황후를 배출해낸 가문이다. 게임에서도 퀘스트를 많이 주는 가문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아마 거기서 내 약혼자를 볼 수 있겠지. 페르시아 공작가의 후계자란다.”

         

       그것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참지 않고 욕했던 그 버러지 소 공작.

         

       문득 의문이 들었다. 가문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데 어떻게 그 버러지와 약혼할 수 있었던 거지? 기사들의 말로는 떼를 썼다고 했는데.

         

       ‘…다른 놈들과는 달리 데카르트 공작은 프란체에게 우호적이었던 건가?’

         

       그의 태도를 봤을 때 그건 아니었다. 공작은 게임에서도 강한 자나 능력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어째서 그가 그런 성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프란체의 과거처럼 모종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듣고 있니?”

       “예. 듣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너는 그곳에 내 호위기사로 참여할 거란다. 당연히 목에 걸린 노예 증명 초커는 가려야겠지?”

         

       목에 무언갈 씌워야 하는 건가. 답답할 거 같은데.

         

       “마땅히 가릴 것이 없습니다.”

       “그건 집사장에게 말해놓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집사장은 그래도 프란체의 명령을 따르는 것 같긴 한데. 뭐, 그것도 표면적으로나겠지. 그녀의 시종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테니까.

         

       “이야기는 끝났으니 나가보렴. 그리고, 나는 근신 중이니 함부로 찾아오지도 말려무나. 너만 안 좋은 꼴을 볼 거란다.”

         

       나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허리를 꾸벅 숙인 뒤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방을 나오니 프란체의 둘째 오빠, 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다, 노예.”

       “…….”

       “대답 안 해?”

         

       너는 정말 싸가지가 없구나.

         

       “무슨 일이십니까.”

         

       라인이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형님이 저년의 전속 시종을 끌고 가는 걸 봤다. 무슨 일이 있었지?”

         

       이 새끼는 동생을 싫어하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주인님의 전속 시종이 음식에 몹쓸 장난을 쳤습니다.”

       “뭔 소리야?”

       “식사로 나온 음식이 곰팡이가 핀 빵과 오물과도 같은 국물. 그리고 껍질도 깎지 않은 생감자였습니다.”

         

       허, 라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진짜야?”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대?”

       “12년 전부터라고 합니다.”

       “…뭐? 12년 전부터라면…….”

         

       라인이 눈썹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켕기는 거라도 있나 보지?

         

       “…그래. 궁금한 건 풀렸으니 이만 가 봐.”

         

       나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저택을 나왔다.

         

       연무장으로 돌아오니 기사들이 내 눈치를 본다. 여기서 딱히 할 것도 없어 보였기에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식사로 나온 음식은 찐 감자와 우유 한 병. 그래, 프란체도 그런 걸 먹는데 이거라도 주는 게 어디냐. 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해치웠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그런데.

         

       여전히 먼지가 푹푹 쌓인 방. 숨을 조금만 들이켜도 기침이 나온다. 눈이 따가운 건 덤이다. 좋은 방 좀 주지.

         

       “밥도 먹었겠다, 청소나 해볼까.”

         

       창문을 열었다. 이불과 베개를 다시 털었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먼지털이를 이용해 곳곳을 청소하고, 물건들을 한곳으로 모아 공간을 확보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후우.”

         

       이제야 좀 사람이 사는 방이 되었다. 상쾌한 기분. 그래, 이렇게 보니까 차라리 이게 낫다. 다른 기사들과 같은 방을 쓸 바엔 이런 창고에서 혼자 사는 게 낫지.

         

       풀썩. 나는 이불에 등을 맡기고 누웠다.

         

       ‘이제 파티에 가면…….’

         

       내가 알기론 그녀는 예상치 못한 큰일을 마주하고, 여기서 악역의 운명이 시작된다.

         

       그 일이 벌어진 이유는 원작을 플레이했던 나도 모른다.

         

       ……뭐, 역하렘 게임이었으니 주인공인 소미레를 위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정답 없는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다.

         

       “이걸 지금 생각해봐서 뭐하냐.”

         

       이제 곧 모든 진실을 알게 될 텐데.

         

       쩝. 나는 입맛을 다시며 명상에 잠겼다.

         

       진 바렌베르크의 기억에 오러 수련이 있었으니 그거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지.

         

       딱히 할 게 없었으니.

         

       지루한 시간은 명상만을 반복하면서 지나갔다.

         

       프란체의 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넘었을 시점에, 집사장이 나를 직접 찾아왔다.

         

       “공녀님께서 부르신다.”

         

       파티에 참석하는 날이 왔나 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감사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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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I Raised the Villainess and Fled

악역 영애를 키우고 도망쳤다
Score 8.6
Status: Ongoing Author:
I made a villainess destined for death into the most powerful person in the empire and then f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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