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내가 양혜인에게 나의 스마트폰을 달라고 하자, 양혜인은 굉장히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을 넘겨주었다. 역시, 단순히 대신 맡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막겠다는 이유도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회장의 지시일 텐데도 내가 한마디 하는 것으로 이렇게 쉽게 넘겨주는 것을 보면 그 이면에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정작 예사라 본인은 잘 모르고 있던 권한이라던가.
하지만 그것도 조금 이상하긴 했다. 고작 한 달 만에 근처 직원에게 물어보는 것으로 예사라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사라가 마음만 먹었다면, 주변 직원 정도는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었을 텐데.
가스라이팅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당했길래?
뭐, 그건 나중에 알아봐도 된다. 지금 당장은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최대한’을 아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시가 총액…… 유진 전자.”
나는 스마트폰을 받아들고 침대 위를 뒹굴면서 검색어를 한 글자씩 입력해 나갔다. 혹시라도 내가 괴상한 거라도 검색할까 두려운지, 양혜인은 내 침대 옆에 바싹 붙어 서 있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어떻게든 불려보기 위해서 주식 투자를 시도했다가 -50%의 손해만 본 적이 있다. 시가 총액이 높다고 무조건 주식이 오르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해서 무조건 상장 폐지될만한 회사도 아니다. 물론 시가 총액이 높은 기업, 현금 자산이 많은 기업일수록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에 나는 나름대로 시가 총액이라든지, 재계 서열이나 각 회사가 주력으로 내세우는 사업이라든지, 그런 부분들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알아본 적이 있었다.
일단 ‘전자제품’ 영역에만 한정하면, 국내 1위와 2위는 차이가 극심했다. 내 기억에 시가 총액이 대략 4.5배에서 5배 가까이 차이 나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1위는 대충 500조 원 정도 했다. 2위가 100조가 살짝 안 되는 수준이었고.
그러니, 나는 자연스럽게 유진 그룹에서 가장 큰 유진 전자의 시가 총액도 대충 그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 십, 백, 천……?”
나는 길게 나열된 숫자의 자릿수를 세다가,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대한민국 재계 1위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는 설정의 유진 그룹.
나는 설정상 ‘대한민국 재계 1위’라길래 당연히 모티브도 실제 대한민국 재계 1위의 그 기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제작자는 ‘이건 모두 허구며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다’라고 못을 박긴 했지만, 그거야 원래 대부분 작품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그 제작자가 ‘허구’라는 단어에 한없이 진심을 담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이 인디게임에서 ‘허구’라고 불리는 부분은 문자 그대로 ‘허구’였던 것이다. 유진 그룹은 진짜로 내가 살던 현실의 어떤 기업과도 다른 기업이었다.
“삼천육백…… 조……?”
삼천육백 조 원.
그게 유진 그룹이 가지고 있는 시가 총액의 크기였다.
“삼천육백…… 삼천육백이라고……?”
숫자를 보자마자 어질어질했다.
아니,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가 딱 이 정도 규모였던 것 같은데. 설마 모티브가 한국계 기업이 아니라 미국 기업이었어……?
이거 완전히 설정 과잉이잖아! 아무리 말도 안되게 큰 재벌을 넣고 싶어도 그렇지, 이런 재벌을 상대로 뭘 어떻게 이겨보라고!
게임에서야 예사라 혼자 다 뒤집어 쓰—
아.
그렇구나. 예사라 혼자 다 뒤집어쓰는 형태가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끝낼 수라도 있었던 거구나. 유진 그룹 전체를 박살 내는 내용이 아니라 예사라 개인을 박살 내는 내용이니까.
그리고 유진 그룹의 회장은 결국 예사라를 버려버린다. 그 후에는 윤다호가 누구랑 파혼하건, 약혼하건 신경도 쓰지 않아버리고.
나는 재빠르게 유진 그룹의 다른 계열사도 검색해 보았다.
나머지를 전부 합쳐도 200조가 될락 말락 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지만, 이 유진 전자라는 정신 나간 규모의 기업 때문에 눈에 띄지도 않았다.
호명 그룹에서 제일 잘 나가는 호명 전자의 경우 약 백 오십조.
이건 뭐, 호명 그룹이 뭐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규모 차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약혼에 진심이었던 건가. 대한민국 재계 2위의 차기 회장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로.
그런 것 치고는 아직도 많이 싸가지가 없기는 했지만.
뭐, 그거야 아직 숙이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미숙한 꼬맹이라 그렇다 쳐도.
왜 유진 그룹의 회장은 나를 굳이 호명 그룹의 왕세자와 결혼시키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른 인물들은 파면 팔수록 그 생각이 감이라도 잡히는데, 유독 유진 그룹의 현 회장, 최나경의 생각만큼은 예상하기가 힘들었다.
…….
“메이드.”
“네, 아가씨.”
나의 부름에, 바로 옆에 서 있던 양혜인이 바로 반응했다.
“제가 물려받은 재산이 어느 정도죠?”
“예, 주식은 시가 총액의 5.7퍼센트였습니다.”
……단순 계산으로만 205조 원이다. 작은 국가 하나를 일 년 동안 굴릴 수 있는 수준의 자산. 듣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일부 현금과 부동산이 있습니다만…… 그건 저도 자세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알고 있죠? 부동산이라고 하면 어디가 제일 대표적일까요?”
“부동산 중 제일 대표적인 곳은…… 이곳 입니다.”
양혜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나의 눈을 보고는 작게 말했다.
“…….”
아, 그렇구만.
왜 이 저택의 안에서 직원들이 내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다만,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원래 부부 중 한쪽이 사망하면 재산은 자식과 그 배우자가 나누어 받는다. 특별히 유언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면, 배우자는 1.5, 자식은 1로 나누어 갖는 것이 일반적…… 이라고 방금 쳐본 검색창에 나와 있었다.
가정을 해 보자.
예사라의 아버지가 사실은 자신의 두 번째 부인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신이 자신의 자식보다 먼저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그 전에 단 하나뿐인 딸을 위해서 중요한 재산을 미리, 자기 배우자 몰래 상속시켜 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랬다면 남편의 사망 이후 현 회장은 제일 중요한 자산이 모조리 자기 수양딸에게 간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함부로 빼앗아 올 수는 없지만, 그 자산을 관리하는 것은 유일한 보호자인 자신이 된다. 아직 예사라가 성인이 되려면 멀었으니 그 재산을 어떻게든 할만한 시간은 충분—
아.
……그런가.
자기 수양딸을 이렇게 가두어놓고, 세상으로 고립시킨 이유는, 예사라를 자신에게 굴복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완전히 망가져서 자기 말대로만 하는 인형이 되도록 만들어, 후에 성인이 되어 그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내가 자신을 ‘회장님’이라고 불렀을 때 흡족해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어쩌면 윤다호와 약혼하도록 한 것도, 예사라를 조종해서 어떻게 해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시,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소름 끼치기도 하지.
“여기요.”
“네?”
“다 썼어요.”
내가 스마트폰을 건네주자, 양혜인은 주춤거리며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걸 메이드복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넣더니,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뒷걸음질 쳐서 방 밖으로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 문이 소리 없이 닫힌다.
나는 침대에 허리를 쭉 펴고 편히 누워 생각했다.
일단은 그 막대한 재산부터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보자고.
사망 10년 전에 증여한 재산은 상속과는 별개다. 만약 그 5.7퍼센트의 지분과 부동산이 사망 10년도 전에 예사라의 이름으로 들어온 재산이라면, 상속 과정에서 나누는 재산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더더욱 현 회장이 사용할 방법은 없고.
그렇다고 그냥 통장에서 꺼내 쓰려고 하면 회장이 무슨 수를 써서건 막으려고 할 거다. 은행에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이것 참, 있다는 것만 알았지, 가지고 올 방법이 없네.
뭐, 아직 시간은 남아있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생각해 보자. 만약 예사라의 아버지가 생각이 있었다면 온갖 안전장치를 다 걸어놓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내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나는 교문 앞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이건 재산의 많고 적음과는 완전히 별개인 이야기라서, 걸어가는 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사실, 화영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대부분은 이 근처에 살고 있었다. 애초에 학교 자체가 부촌에서 접근하기 쉬운 곳에 지어져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돈이 많은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인데도, 학교 앞이 차로 북적거리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이게 불행인 이유는, 바로 어제 입학식 끝나고 있었던 일 때문에 내가 아이들의 머릿속 깊은 곳까지 확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이들과 전혀 친해지지 못한 상황인데 복도에서 무려 약혼자라는 학생과 싸우기까지 했으니까. 게다가 그 약혼자는 장차 이 학교 내의 여자들 대부분의 마음을 빼앗아 갈 미소년이었다.
비록 추측이기는 하지만, 어른의 농간 때문에 이미 이미지가 좋지 않은데다 모두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잘생기고 돈도 많은 남자와 약혼한 것에 만족하지도 않고, 어제 했던 말을 생각해보면 다른 학생들을 대놓고 깔보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안~녕!”
메이드 양혜인의 배웅을 받은 뒤 교문 안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걷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찰싹 쳐서 그대로 앞으로 시야가 기울여졌다.
“으앗, 잠깐!”
나의 등을 쳤던 사람은 그렇게 비명을 지르더니, 얼른 내 팔을 끌어안아 무너진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아.”
하지만 나는 일평생 처음으로 내 팔을 안아준 것이 여고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내 왼팔이 어제부터 충분히 아플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축받은 왼팔이 바로 어제 윤다호에게 붙잡혀 멍이 든 그 팔이었으니까.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나의 팔을 붙잡았던 그 아이는 나로부터 화들짝 물러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아이를 봤다.
……노려본 것이 아니다. 그냥 순전히 눈이 부셨기 때문이다.
“……유하늘.”
내가 그 이름을 부르자, 유하늘은 내가 화가 난 줄 알았는지, 바로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했다.
“미, 미안,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달려들었지?”
“……아냐, 괜찮아.”
아직도 등이 얼얼하고,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는 것에 놀라 심장이 급속도로 뛰고 있었고, 붙잡혔던 왼팔이 시큰거리긴 했지만 셋 중에 딱히 죽을 정도로 위험하게 느껴지는 부분은 없었다.
“……정말?”
“그래.”
내가 한숨 섞인 대답을 하고 나서야, 유하늘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응, 그러니까…… 안녕?”
그리고 다시 한번 인사를 한다.
나는 유하늘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안녕.”
“같이 걸어도 될까?”
“그래, 좋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유하늘은 아까보다는 조금은 차분하게 내 옆으로 와 섰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인지 딱히 말은 없었다.
몇 걸음 정도 걷다가 어색함을 느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던 때.
“저, 저기.”
이번에는 반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니, 유하늘만큼은 아니지만, 얼굴에서 옅은 빛을 뿜어내는 이수아가 서 있었다.
조금 긴장한 듯 보이던 이수아는 내 옆에 서 있는 유하늘을 한번 슬쩍 보더니 살짝 충격받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 내 옆에 사람이 있는 게 신기할 만도 하지.
하지만 이내 얼른 고개를 좌우로 파닥이고, 내 쪽으로 와서 물었다.
“나도 옆에서 같이 걸어도 될까?”
“그래, 그렇게 해.”
내 옆에 서는 게 꼭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인가?
……음, 다시 생각해보니 웬 모르는 아저씨가 옆에 아무 말도 없이 서면 엄청나게 싫을 것 같긴 하다.
“고마워. 아, 그리고.”
마치 제일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듯 그제야 이수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나에게 말했다.
“안녕?”
“안녕.”
내가 재계 1위 딸이라고 긴장하는 건가?
……그리고 나는 그 재계 1위 그룹의 시가 총액이 3,600조라는 것을 떠올렸다.
긴장할만하네.
“안녕. 나는 유하늘이라고 해. 혹시 사라 친구니?”
“사라?”
인간 카피바라마저 당혹하게 만드는 저 친화력을 보니, 과연 여주인공은 여주인공이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수아는 내 얼굴을 살짝 올려다본다. 마치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 중학교 졸업식 때 사진을 같이 찍은 유일한 아이야.”
내가 그렇게 말해주자, 이수아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응. 그래. 맞아, 친구야. 나는 이수아라고 해.”
뭐, 그렇게 말해도 별로 상관없겠지. 친구라는 건 원래 동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딱 한 번 마주친 웬 할아버지가 나와 친구라고 주장한다면 거침없이 경찰서에 신고하겠지만.
“그래? 그럼 우리도 친구네.”
유하늘은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했다.
확실히,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끼어서 걸어가야 하는 것은 불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웃으며 대화할 상대가 하나라도 있다면, 차라리 삭막한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입 다물고 앉아있는 것보다는 다행이지 않을까?
라고, 나는 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