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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린은 밤늦게 눈을 감고 다음날 저녁까지 내리 잤다.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그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가 튼튼한 몸에 있었기 때문에 푹 잔 것만으로도 린은 피곤이 싹 가셨다.

         

        반면에 루시는 점심 즈음에 깨어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는 그를 걱정하느라 애가 탔다.

         

        린의 숨결이 루시의 머리카락을 간질이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온갖 난동을 피웠을 것이다.

         

        루시는 린이 깨지 않도록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마왕 토벌 전까지만 해도 통통했던 그의 볼살은 이제 광대가 드러날 정도로 꺼졌다.

         

        안쓰러우면서도 살 빠진 그의 이목구비가 이전보다 낫다고 느끼며 루시는 눈을 떼지 않고 지켜봤다.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 루시는 어느새 그를 바라보는 데 빠져버렸다.

         

        이따금 린의 품속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도 하고, 뺨을 부벼보기도 하면서도 루시는 그가 깨어있을 때 하지 못했던 스킨십과 애정표현을 마음껏 했다.

         

        그러던 루시의 눈길은 잠든 그의 입술로 향했다.

         

        검푸르고 윤기 없는 전형적인 남자의 입술.

         

        항상 분홍빛을 띠던 라인폴드와는 전혀 달랐다.

         

        그래도 루시는 좋았다.

         

        저 투박한 입술은 그녀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를 걱정하거나 안심시키려는 말만 한다.

         

        그를 매도하고 무시하던 못된 자신의 것과는 달랐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자 루시는 눈을 꼭 감았다.

         

        다 좋은데 저 입술에서 날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이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과거 자신의 못된 행보로 그러기 쉽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루시는 린이 없으면 살 수 없다.

         

        팔다리가 회복되더라도 놓아주지 않으리라.

         

        그는 나의 것이다.

         

        나의 유일한 아군, 최고의 동료, 나의 린.

         

        언젠가 그의 입술에서 나의 루시라는 단어를 듣고야 말 것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또 부정적이고 불안한 생각.

         

        루시는 입술을 보는 걸 잠시 관두고 귀를 기울였다.

         

        잠든 린의 심장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느렸다.

         

        이제 이 심장소리 없이는 잠들지 못한다.

         

        정신이 다 나았는지 궁금했던 루시는 린이 자리를 비웠을 때 억지로 참았던 잠을 청했던 적이 있었다.

         

         

        “아아악!”

         

         

        결과는 뻔했다.

         

        여태 어디있었냐며 악몽은 득달같이 그녀를 덮쳤다.

         

        기겁한 루시는 비명을 듣고 달려온 린에게 안겨 엉엉 울어버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리.

         

        동시에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치려는 노력은 관뒀다.

         

        필요없다. 린만 있으면 되니까.

         

        그래, 린만 있으면 돼.

         

        다른 건 다 필요없어.

         

        용사 파티든 뭐든 알아서 잘 살라고 하지.

         

        린이 계속 새로운 세상의 위협이 나타날 거라고 암시를 던지는데 루시는 상관 없었다.

         

        세상 따위 멸망하든 말든 린만 있으면 되니까.

         

        아, 그래도 몸이 회복되면 꼭 해야할 게 하나 있었다.

         

        라인폴드에 대한 복수.

         

        단순히 그녀를 배신한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으니 자기가 아무리 애정을 갈구해도 린이 반응을 안 한다.

         

        무슨 말만 하면 죄다 라인폴드와 연관지어 버리니 루시가 뭘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라인폴드는 그녀의 흑역사.

         

        죽여 없애자.

         

        라인폴드를 사랑했던 과거는 놈의 모가지와 함께 도려낼 것이다.

         

        거짓된 사랑에 놀아난 자신보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서 린을 원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딴 놈을 마음에 품었다니, 아아 순백이어야 할 그녀의 애정이, 마음이 더럽혀져 있었다.

         

        이딴 걸 린에게 바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완전무결한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미 그르쳤지만 자신의 눈물과 라인폴드의 피로 씻어내고 린에게 용서를 빌 것이다.

         

        그날이 오면 린은 기뻐해줄까?

         

        이제야 자신의 총애를 받을 자격이 생겼다고 칭찬해줄까.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팔이 나으면 요리를 배워야겠어. 그게 아내가 될 도리지.

         

        다리가 나으면 항상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를 마중 나가야겠어. 그게 남편을 위한 예의지.

         

        이렇듯, 린의 심장소리를 듣고 있으면 루시는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희망찬 계획이 착착 세워지는 것이었다.

         

        그를 위한 여인이 되는 것.

         

        그게 인생의 목표이자 삶의 낙이었다.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

         

        설사 여신이라 하더라도 이미 그와 함께 죽음을 극복한 자신이 못해낼 건 없다고 루시는 자만했다.

         

        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또 불순하고 시건방진 생각을 해버렸다.

         

        그게 어떤 결과를 몰고 올 지 곱씹어보지도 않은 채.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는 하염없이 잠든 린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웃을 뿐이었다.

         

         

         

        —

         

         

         

        “안 불편해?”

         

        “응 편해.”

         

         

        이번에는 루시가 린과 함께 앞을 볼 수 있는 방향으로 포대기를 고정시켰다.

         

        웬만하며 품에 안는 자세를 고수하는 루시가 오늘만큼은 특별히 다른 자세를 주문했다.

         

         

        “안겨 있는 건 충분해서 괜찮아. 나도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어.”

         

        “그, 미안.”

         

         

        늦잠을 자버린 자신 때문에 화났다고 완곡한 표현으로 질책하는 거라 여긴 린이 사과하자 루시는 빠르게 부정했다.

         

         

        “그런 뜻이 아냐! 하루 종일 린의 품에 안겨서 너무 좋았는 걸. 더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내 몸이 버티질 못할 것 같달까…?”

         

        “몸이 못 버텨?”

         

         

        린이 머리 위로 여러 개의 물음표를 띄웠지만 루시는 더 답해주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혀를 대보고 싶다는 욕망과 그의 단단한 허벅지 쪽으로 내려가 다리 사이에 대보고 싶었다는 욕망은 절대로 입밖으로 내면 안되었다.

         

         

        “루시, 준비 끝났어.”

         

        “바로 나가는 거야?”

         

        “응, 방한도구 사러가야지. 이대로는 산맥 뒤지다가 얼어죽을 거야. 밖에 나가면 루시도 추울 거니까 각오해줘야 해.”

         

        “린이랑 붙어있으니까 절대로 안 추워.”

         

        “음.”

         

         

        날이 갈수록 루시의 집착과 의존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린 역시 루시가 자신을 끈적한 시선으로 볼 때가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불구가 된 상태니 별 수 없다며 받아주고는 있지만 과도한 관심은 부담스러웠다.

         

        그저 회복하고 나면 달라지겠지 하고 근거 없는 낙관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루시.”

         

        “왜?”

         

        “이 도시에는 마족이 있어.”

         

        “…그럴 리 없어. 마왕은 죽었어. 우리 손으로 토벌했잖아.”

         

         

        루시의 부정은 당연했다.

         

        마왕은 마족의 정점인 동시에 마기라는 권능이기도 했다.

         

        마왕의 소멸은 곧 마기의 소멸이고 마기가 사라지면 마족도 사라져야 했다.

         

         

        “세상이 곧 널 다시 필요하게 될 거라는 말 기억하지?”

         

        “설마….”

         

        “이유는 몰라. 하지만 확실해.”

         

        “린은 어떻게 아는 거야? 마왕이 죽었는데도 마족이 남아있고, 심지어 이 도시에 있다는 걸 무슨 수로 알게 된 거야?”

         

         

        그거야 내가 전생에서 유일하게 애러건트 사가를 클리어한 플레이어니까.

         

        그리고 원래 게임이란 이동하는 곳마다 이벤트가 일어나는 법이거든.

         

        마음 같아서는 속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말짱도루묵이었다.

         

        루시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도박수를 던질 이유가 없었다.

         

         

        “여신님께서 말씀 해주셨어. 마왕의 뿔은 원래 2개라고.”

         

        “여신님께서? 언제? 혹시 그때?”

         

        “맞아,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신님을 뵈었던 날. 그리고 내가 짐꾼의 낭을 얻은 그날.”

         

         

        오리지널판에서 용사 파티는 처음 마족과 조우하고 고전을 한 직후, 여신이 직접 그들 앞에 나타나 전용 아이템의 존재를 알려준다.

         

        현실에서도 똑같이 흘러갔고 린은 그 만남에서 바로 전용 아이템 짐꾼의 낭을 하사 받았다.

         

        게임 기반이니까 기획자나 개발자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굳이 짐꾼 주제에 아이템을 얻기 위한 전용 맵이나 획득 경로를 짜는 게 귀찮았겠다 정도로 린은 추측하고 있었다.

         

        그냥 간단히 설명하자면 여신 만나니까 템 설명해주고 예시로 짐꾼 전용 아이템을 그 자리에서 준거다.

         

        그래서 오리지널판 스토리의 절반은 짐꾼 제외 각 파티원들의 전용 아이템을 찾아다니는 내용이었다.

         

         

        [미안합니다 린. 당신은 단순히 아이템이 아니라 정신적인 짐도, 미래의 짐도 짊어져야할 짐꾼이에요.]

         

         

        혼자서 여신의 공간으로 불려가 짐꾼의 낭과 함께 받은 사과.

         

        당시의 린은 황송해하기보다는 언제쯤 자신의 의무가 끝날 수 있는지 묻기 바빴다.

         

        그는 정말 지쳐 있었고 열정과 패기로 세웠던 목표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여신의 물음인데도 마치 원숭이 손처럼 불길하게 다가왔었다.

         

        린은 마음 속에서 울컥한 심정을 여과없이 말했다.

         

         

        “더는 ■■ 받기 싫어요.”

         

         

        그러자 여신은 눈물을 흘렸다.

         

         

        [오직 진정한 ■■과 ■■만이 그대를 구하고 용서 받으리.]

         

         

        정정, 눈물만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확히 여신이 린에게 뭘 했었는지 기억이 안났다.

         

        확실한 건, 그 이후로 린은 전보다 더 열심히 짐꾼 일을 잘하게 되었다는 거고 여신은 이때 마왕 뿔이 2개라는 말은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설정을 다 꿰고 있는 린이 루시에게 둘러대기 위해 형편 좋게 꾸며낸 말이었다.

         

         

        “그래, 여신님께서 알려주신 거구나.”

         

         

        루시는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린의 이야기가 맞다면 마왕이 살아있다. 혹은 그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남아있다 라는 뜻이었다.

         

        그 무언가가 새로운 세상의 위협이 되어 나타날 것이고, 짐꾼 린은 여신의 말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그녀를 구한 게 된다.

         

        린이 루시를 구한 이유 따위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거창한 사유가 없어도 린은 루시를 구할 것이라고 했다.

         

        루시는 린을 믿는다.

         

        린이라면 그녀를 다시 죽이려 들어도 기꺼이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린이 말한 그 위협이 나타난다면, 그래서 세상이 멸망할 위기라면, 자신은 린과 함께 행복한 미래를 꾸릴 수가 없었다.

         

        그건 루시를 매우 기분 나쁘고, 불쾌하게 만들었다.

         

         

        “…가만 둘 수는 없겠네.”

         

         

        린이랑 결혼하려면 세상은 온존해야하니까.

         

        정작 짐꾼은 루시가 용사로써의 사명을 되새기는 줄 알고 반색했다.

         

         

        “그렇지. 아무리 거지같더라도 세상이 멸망하면 곤란하니까.”

         

        “응, 매우 곤란해.”

         

         

        게다가 애는 무조건 둘 이상 낳을 거다.

         

        린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멸망한 세상 따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마족이 우리 앞에 나타나거나 말을 나누게 되어도 흥분하면 안 돼. 아직 우리 힘으로는 역부족이니까.”

         

        “알았어.”

         

        “대신 루시가 부상을 회복하면 꼭 제거하러 오자.”

         

        “당연하지.”

         

         

        오, 적극적인데? 좋아.

         

        실로 오래간만에 들뜬 린이 방 문고리를 잡은 순간, 루시가 날카롭게 물었다.

         

         

        “린.”

         

        “응?”

         

        “혹시 그 마족이 서큐버스 같은 부류는 아니지?”

         

        “어…?”

         

        “이런 변방 도시에 창관 골목이 있을 정도라며?”

         

         

        과연 용사, 예리한 직감이다.

         

        왠지 모르게 서슬퍼런 루시의 목소리에 린은 침묵을 선택했다.

         

         

        “린.”

         

        “으응.”

         

        “만약 그년이 린에게 말이라도 걸면….”

         

         

        위험하다.

         

        복부 부분만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루시가 포대기로 매여져 있는 그 복부 부분이.

         

         

        “내가 마족의 혓바닥은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직접 꺼내서 보여줄게.”

         

         

        무슨 말 한마디의 무게가 이리 무겁고 답답한지.

         

        린은 이번에도 골똘히 생각한 후 심호흡하며 답했다.

         

         

        “마족 혓바닥이라니, 그런 더러운 거 만지지 마.”

         

        “…응! 역시 날 위해주는 건 린 밖에 없어!”

         

         

        여전히 복부는 뜨거웠다.

         

        잘 됐지 뭐.

         

        어젯밤에 다녀보니 춥긴 엄청 춥더라.

         

        이 정도 열기라면 밖에 나가서 추위를 잠시라도 막아주겠지.

         

        또다시 근거 없는 낙관과 함께 린은 이번에야말로 문고리를 열어젖혔다.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He Became the Only Ally of the Abandoned Warrior

Abandoned Hero's Only Ally, 버림받은 용사의 유일한 아군이 되었다.
Score 6.8
Status: Ongoing Type: Author: ,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I saved the Warrior who used to ignore and bully me and now she is obsessed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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