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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9

       “우우.”

         

       귀엽게 칭얼거리는 저 아이는 알까.

       저가 무려 현 팬드래건 왕실의 왕태녀와 브리튼 왕국의 마지막 혈통을 이은 왕자 사이에서 태어난 귀한 적손임을.

       참고로 브리튼 왕국은 3년 전 팬드래건과 전쟁을 벌인 적대국이며, 그러한 브리튼은 현재에 이르러 명맥만 가까스로 이을 뿐인 공국(公國)이 되었다.

       전쟁에 승리하며 브리튼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한 것.

         

       ‘그리고 저 애는 팬드래건과 브리튼을 모두 아우르는 왕이 되겠지.’

         

       팬드래건만이 아닌, 브리튼 왕실의 핏줄을 동시에 물려받은 아이다.

       팬드래건의 상징인 백은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보면 팬드래건의 피가 진한 아이일 터.

       허나 브리튼의 피를 이었다면 그에 맞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왕실의 혈통이란 그런 거니까.

         

       “그대도 알고 있겠지? 이 아이는 상징이다. 아직은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는 브리튼과 팬드래건을 이어줄 멋진 사다리가 될 테지. 이 아이에겐 그 둘을 이을 정통성이 있으니.”

       “…정치란 건 잘 몰라서.”

       “흥! 시치미 떼긴, 네 녀석의 시야가 웬만한 버러지보다 넓다는 것을 여가 안다. 모르는 척 하지 마라.”

       “으음.”

         

       아이시스 왕태녀의 말대로 그는 어느 정도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안다.

       기껏 먹은 브리튼이 여전히 반항이 심하다는 것도.

       브리튼의 마지막 혈통인 왕자 또한 현재 지병을 앓고 있으며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음을.

       그러니 저 왕자가 잘 커서 왕태자가 된다면 그때야말로 팬드래건과 브리튼은 진정한 합일을 이룰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나라는 제국 못지않은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되겠지.

         

       …아직 멀고도 먼 얘기일 뿐이지만.

         

       “아서 드레이크 드 팬드래건, 아서 팬드래건! 내 아들은 틀림없이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후후.”

       “……하하.”

         

       으음, 어쩐지 굉장히 여러모로 불길한 이름이다.

         

       ‘아, 아니지, 위대한 왕이 되는 건 맞으니까….’

         

       이한은 애써 아이의 이름을 축복해주기로 했다.

         

       * * *

         

       잡담이 어느 정도 이어질 쯤, 이한은 긴장했던 몸을 풀며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아무래도 좀 더 이 대화가 오래 이어질 것 같기에.

         

       “해서 누님. 본론이 뭡니까?”

       “무슨 뜻이지?”

       “누님이야말로 모른 척 하시 마시죠. 내가 누님을 모릅니까? 타인의 속마저 들여다보는 재주도 있으신 분이.”

       “여에겐 그런 재주가 없느니라. 다만, 상대방의 분위기와 말투를 듣고 참과 거짓을 판별해내며, 상대의 속내와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자신이 있을 뿐.”

       “…그게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거랑 뭐가 달라요?”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존경한다.

       처음 암살자에게 구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만한 걸물이, 아니 여걸이 아닐 수 없었으니.

         

       [그대가 여를 구했는가? 훌륭하다.]

         

       피가 낭자한 천막에서도 덤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모습은 좌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음이다.

         

       어쨌든, 이러한 당대의 여걸이기에 이한은 안다.

       이 사람은 결코 함부로 타인을 찾아올 사람이 아니다.

       설사 이한이 그녀를 구해주었고, 의동생 삼아 편히 대한다고 해도, 이 사람은 아무런 정치적 의도 없이 사람을 만날 리가 없다.

       그러니 그가 할 일은.

         

       “하아, 진짜. 또 사냥개 취급이지.”

       “후후, 미안하구나.”

         

       의도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에 처음으로 사과를 보이는 아이시스였고, 다음 순간.

         

       푸확!!

         

       “어, 어째서…?”

         

       아이시스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의 가슴이 꿰뚫렸다.

       품속에 넣고 다니는 손도끼가 시녀의 가슴 정중앙을 거침없이 꿰뚫은 것이다.

       그 상태에서 이한은 날렵한 사냥개마냥 움직이며 그대로 시녀의 목을 부여잡았다.

       이제 숨조차 제대로 못 쉬는 시녀의 눈가에는 핏줄이 바싹 섰다.

         

       그 상태에서 이한은.

         

       “누님, 궁금한 거 있으면 지금 물어보십쇼.”

       “고맙구나. 쯧, 머리 손질을 잘하여 기특하게 여겼거늘.”

         

       아이시스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시녀를 보았다.

       무려 험난한 밀림보다 생존하기 힘든 왕실에서 2년 넘게 아이시스를 보필한 시녀였는데, 그런 시녀에게 아이시스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을 줄 뿐이었다.

         

       “브리튼의 잔당이더냐? 아니면 북부의 자객이더냐?”

       “저, 저는…!”

       “흠, 이 순간까지 진실을 숨기겠다? 대단한 충심이로다.”

         

       아이시스는 슬쩍 이한에게 눈길을 줬고, 이한은 거침없이.

         

       뽀각!

         

       “끄으으윽!”

         

       시녀의 이빨을 뽑았고, 그 안에는 독단이 나왔다.

         

       “호오, 마법처리를 했나 보군? 진짜 이빨과 같구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하여튼 첩자든 암살자든 치밀한 건 다 똑같네.”

         

       시녀는 이미 모든 게 들켰다는 걸 알았는지 손을 움직이려 들었다.

       가슴이 꿰뚫리고 목이 부러질 듯 잡힌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만 해도 이미 그녀가 보통 인간이 아님을 알려준 셈.

       투기법을 익힌 거다.

       그것도 은밀한 능력을 갖춘.

         

       멍청하다.

         

       이토록 어설프게 하지 말고, 차라리 자결했어야지.

       그러면 정보라도 덜 주지 않았겠는가?

         

       콰직!

         

       “끄으으윽!”

         

       거침없는 손속.

       움직임을 봉쇄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팔다리를 뽑아놓는 거다.

         

       …상식적으로 애 앞에서 할 행동은 아니긴 한데, 상황이 상황이니 지금은 넘어가도록 하자.

       

       “몸 놀리는 게 팬드래건 방식이 아닌데요? 그렇다고 브리튼도 아닌 것 같고….”

       “확신하느냐?”

       “전쟁에서 브리튼 병사들이랑 질릴 정도로 싸웠습니다. 기사들도 많이 봤고요. 우리도 그렇지만, 그놈들의 싸움방식은 다 근본이 있어요. 근데 얘는 딱히?”

       “호오, 그런 것도 아느냐? 재능이 없다며 자조하는 것치고 제법 눈이 좋지 않더냐.”

       “이건 재능보단 감각적으로 아는 겁니다. 알잖습니까? 제 감각이 좀 특별하단 걸.”

       “호호, 그렇지. 사냥개 열보다 낫도다.”

       “……진짜 개 취급이네.”

         

       희극을 보듯 깔깔 거리는 아이시스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덤덤히 구는 이한이나.

       둘 다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목이 잡힌 시녀는 공포를 느끼며 발버둥 쳤다.

       그러다가 결국.

         

       뿌득!

         

       “아, 그러게 왜 그렇게 버둥거려서.”

       “죽은 것이냐?”

       “예에.”

       “아쉽구나. 정보를 좀 더 얻고 싶었거늘.”

         

       그녀는 손을 휘저었다.

       이제 가치가 없으니 치우라는 것처럼.

       손짓이 떨어지는 순간, 어느새 마차 밖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익숙하다며 시녀의 시체를 치웠고, 마차 안에는 이제 이한과 아이시스, 아기와 어딘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녀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착각이 아니었는지 시녀는.

         

       “저기요, 왕녀님.”

       “왕태녀다, 아니면 전하라고 하려무나.”

       “헤헤, 네 전하. 제가 상황이 이해가 안 가서 그런데, 그녀가 배신자였나요?”

         

       진짜 머리가 좀 부족한 아이였나 보다.

         

       “멍청한 것. 정확히는 너희 둘 모두 의심선상에 있었느니라.”

       “아하!”

       “…여가 그대를 의심한 이유는 너무 멍청하고 순진해서이니라. 어찌 이토록 뇌가 청순한 건지.”

       “헤헤, 부모님도 자주 머리가 깨끗하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아마, 칭찬이 아닐 것이다.”

       “??”

       “하아….”

         

       한숨 쉬는 아이시스였고, 이를 보며 이한은 이해했다.

       눈치가 귀신같은 아이시스가 왜 배신자를 찾기 까다로워하고, 자신까지 찾아왔는지.

         

       ‘뇌가 너무 청순해서 의심당하는 경우도 있구나.’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 * *

         

       아이시스는 이한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놀의 후각.

         

       평범한 인간은 결코 맡을 수 없는 향을 맡아내는 후각은 어떠한 미세한 냄새도 잡아낼 수 있다.

       일상에선 이러한 후각을 억제하지만, 작정하고 사용하면 이한의 코는 냄새를 통해 대량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한때 암살 조직에 몸담고 있던 경력 덕분일까?

       독 내음, 피 내음, 쇠의 냄새와 사람 자체가 가진 불온함도 식은땀의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수상함을 얼마든지 감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방금 전 시녀는 몸을 깨끗이 씻고 향수도 진한 걸 썼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추지 못할 독초의 냄새가 잔뜩 풍겼다.

         

       “어느 날부터 왕실에서 독에 중독된 이들이 나오더구나. 특히 아서도 중독 증상이 보이더군.”

       “…미쳤구먼, 애한테도 독을 쓴 겁니까?”

       “다행히 팬드래건의 핏줄은 독에 대한 면역력이 강하지.”

       “…….”

         

       그렇다고 아프지 않다는 건 아니리라.

       뒷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이한은 지독하다며 치를 떨었다.

       그토록 의심정황이 많은데도, 왕실이 인사들을 모두 의심하는 대신 범인을 두 사람으로 추려내며 이 자리까지 데리고 왔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확실하게 독 냄새가 나는 여자를 잡기 위해 이한마저 부르고.

         

       ‘대단한 사람이야, 정말.’

         

       다른 어미 같으면 속에서 열불이 나며 이성이 날아가 버릴 텐데, 지극히 냉정함을 유지한다.

       철저하다 못해 무섭다.

         

       “아서를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이들은 많다. 브리튼과 우리가 완전히 합일된다면 그 힘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대해질 테니. 타국 입장에서도 아서를 죽이고 싶은 이들은 많을 테지.”

       “……징글징글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정치란 것이지.”

         

       아이시스는 담담히 사실을 무정하게 읊었고, 아서를 쓰다듬었다.

       언뜻 보면 모정이 느껴지는 어미의 모습이지만, 한편에는 군주로서의 잔혹함도 돋보인다.

       이한은 자신이라면 저럴 수 있을까 싶으며 혀를 내둘렀다.

         

       저 여자의 저러한 대담함을 자신이 절대 흉내 내지 못하리란 걸 본능적으로 직감한 거다.

         

       “…그럼, 이제 끝난 겁니까?”

         

       사냥개 역할을 해줬으니 이제 퇴근 좀 해도 되냐며 정중히 묻는 이한이었고, 이한의 물음에 아이시스는.

         

       “아니, 아직 두 가지 정도가 더 있구나.”

       “…두, 두 가지나요?”

       “보답은 할 터이니 걱정 말거라. 원한다면 여의 손등에 입맞춤을 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아니요, 절대 사양합니다. 누굴 변태로 만들려고.”

       “후후, 소싯적 왕국 제일미녀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게 해주는 것인데, 아쉬운 기회를 날리는구나.”

       “좀 봐주시죠.”

         

       아름다운 건 인정하는데, 독이 든 가시는 언제라도 사양하고 싶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답례는 나중에 여가 알아서 주마.”

       “아니요, 필요 없다고요.”

       “사양은 사양하마. 어쨌든, 여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을 지금부터 말할 터이니, 뇌리에 새기거라.”

       “…말만 부탁이지, 협박이랑 뭐가 달라 이게.”

         

       이한이 투덜거리건 말건 아이시스의 부탁=명령은 이어졌다.

         

       ……그리고 명령을 듣는 순간.

         

       “…누님, 미쳤습니까?”

       “후후, 전혀. 지극히 멀쩡하니라.”

       “…….”

         

       그게 더 문제가 아닐까 하고 이한은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도 그럴 게.

         

       ‘…자기 동생을 죽여 달라는 게 사람한테 할 말인지, 원.’

         

       암살 의뢰가 떨어졌으니까.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It Was a Romance Fantasy?

환생 30년, 알고 보니 장르가 로판이었다?
Status: Ongoing Author:
30 years after reincarnation, turns out the genre was romance fantasy? ...Really, how? I lived as a magician's slave, experimented on, then as an assassin, mercenary, soldier, and even a knight. This is a story where I'm in a genre all by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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