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EP.9

왜지?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한낱 게임의 기믹을 현실에 대입한 것에서 실수였나? 내가 이 세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얕본 건가?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목을 잃은 마법사의 몸뚱이, 불 타죽은 종군 사제, 형체도 안 남게 짓눌린 도적.

저들에게 다음이란 없다. 부활 따윈 되지 않는다. 분명,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었을 텐데.

마치 새로 깨닫는 듯이, 머리에 아로새겨졌다. 아니, 너는 또 잊고 있었다. 누군가 이리 꾸짖는 것처럼.

“오빠···!”

“어, 어어···마, 마리아···?”

“정신 차려. 우리 도망쳐야 해.”

뺨을 붙잡히고 흔들린 덕에 정신을 차렸다. 나랑 마리아, 의뢰인들은 무사하고. 알렉산더는···항전 중인가.

마리아 역시 필사적으로 마차를 사수하고 있었다. 난 그런 와중에 정신줄이나 놓고 앉았다니···.

‘이럴 때가 아니야.’

자책은 그만두고 전황을 살폈다. 우리 쪽 C급 이하는 전멸. 마차를 노리는 인원은 약 30명, B급 전력 다수.

알렉산더가 상대하는 우두머리는 최소 A급으로 추정. 상성도 밀리는 듯하고,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으로 보였다.

‘원래라면 마리아가 이쪽을 정리하고, 알렉산더에 가세했겠지만···’

현재 마리아 수중의 패는 하얀 망치 소녀 하나와 의뢰 직전에 급조한 일반 개체 5기가 고작.

상대하라면 못할 수준은 아니겠지만, 호위 대상이 딸린 상황에선 위험했다.

“이게 다···무슨···나, 나는···끄흡.”

그래, 나도 울고 싶다. 적어도 오늘은 목숨을 각오하지 않고 나왔는데.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마리아와 시선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위에 방심하여 포위망이 얕아진 부분, 저곳을 노려 탈출한다.

“마리아한테 안겨.”

“으, 으응···?”

“집사님, 업히시겠습니까?”

“···아뇨. 저는 여기 남겠습니다.”

“레, 레이헴? 그게 무슨 소리야···남겠다니??”

집사, 아니 호위 기사 레이헴은 말없이 레이피어를 꺼내 들었다.

이에 소녀는 울먹이던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노기사에게 애원했다.

“레이헴 그러지 마···나랑 같이 가···! 이미 너무 큰 잘못을 저질러 버렸는데···너까지 잃어버리면, 난···”

“두 분, 아가씨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시간을 벌어보도록 하죠.”

“안 돼···. 레이헴, 레이헴···!!”

마리아가 몸부림치는 소녀를 옆구리에 낀 채 마차를 벗어났다.

콰앙-! 망치녀가 지면을 내려쳐 활로를 널찍이 열었고, 따라붙으려는 인원을 레이헴이 막아섰다.

“잡아라!!”

“쉽게는 못 갈 겁니다.”

전장을 빠져나가며 슬쩍 뒤를 바라봤다.

알렉산더, 레이헴. 이들의 마지막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머리에 담고자.

“···오빠, 앞만 보고 달려. 위험해.”

왔던 길을 되돌아, 여펨아을 방향으로 달렸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과오에서, 멀리 도망칠 때까지.

* * *

추적이 떨어져 나갔을 즈음. 숨을 돌리며 속도를 줄였다.

도중에 루트를 몇 번이고 꼬았으니, 조금이라도 안전할 때 체력을 온존해 두는 게 좋았다.

“마리아. 우리가 습격당한 곳, 딱 중간 지점이었지? 시간도 반나절쯤 지났고.”

“응. 마리아 근처에서 야영해 봐서 알아.”

여유가 생긴 틈을 활용한 상황 파악.

이번 사건은 단순 내 판단 미스라고만 보기에는 여러모로 켕기는 점이 많았다.

“사냥당하는 입장에서 가장 곤란할 장소의 선정, 웬만한 건수로는 수지가 안 맞을 규모의 세력. 확실해. 이건 명백하게 우리를 노린 계획 범행이야.”

모험가 길드가 외부로의 정보 누설에 관해서는 특히 철저하고 예민할 터.

그새 기강이 해이해지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정보 취급 방식이 개편됐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다, 전부 다 내 잘못이야···. 내가 괜한 짓을 해서···미안해, 레이헴···.”

무서워 떨며 울음에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소녀가 죄악감을 토해냈다.

자기만족을 위해 의뢰를 했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게 후회스럽겠지. 가만히 있었으면 없었을 일도 맞고.

하지만 그건, 전제가 틀려먹었다. 그런 식의 책임 전가로는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은 그렇게 자책할 때가 아니에요. 레이헴도 이런 걸 바라지는 않을 겁니다. 그보다도 거리가 적당히 멀어졌겠다, 슬슬 신호탄을 사용해 주세요.”

이동 수단과 같은 이유로, 숲을 지나칠 땐 웬만해서는 통신용 아티펙트를 휴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족들은 호신용으로 긴급 신호탄을 많이들 애용한다. 본인도 언제 쓰게 될지 모르기에, 목격하면 어느 영지든 간에 나서서 도와주는 식의 풍습.

적에게도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지만, 우리끼리 떠도는 것보다야. 저들이 눈치껏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기대해 봄 직하다.

“···없어.”

“네?”

“아빠 몰래 나오느라···못 챙겼어···.”

“···.”

한껏 움츠러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금발 머리, 풍부한 재력, 외부 활동을 제한할 정도로 엄격한 환경, 기사 출신의 집사.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너무나도 허황돼 고려 대상에서는 제외했었지만, 지금으로선 간절히 바라는 가능성.

“가문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 그건···”

“혹여 황녀 전하, 아니십니까.”

“···!!”

저 반응만으로 진상 규명은 충분히 되었다.

더는 숨기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소녀는 자백하듯 진실을 고했다.

“···맞아. 나는 제국의 2황녀, 료나 페 도로리콘이야···.”

‘황실에 다리가 놓이는 걸 의도하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황녀와 직통으로 이어져 버렸다.

게임으로 할 때는 제발 한 번만 떠달라고 그리 애원했던 건데. 현실이 되니 막상 좋아만 하기에도 애매해서 그저 멋쩍게 웃었다.

“···반말해서 미안해, 요.”

“괜찮아···.”

마리아 너도 황족한테는 존댓말 쓰는구나. 보는 내가 다 기쁘다.

하긴, 여기서 힘겹게 살아남는다 쳐도 황녀한테 밉보이면 말짱 도루묵이긴 하지.

“황녀 전하. 황궁을 나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감상은 여기까지.

아무리 비현실적이어도 처한 상황이 그렇다면, 어떻게든 난관을 헤쳐 나갈 뿐이다.

“오늘로 3일째야···.”

사흘이라. 그렇다면 구조대는 진작에 보냈겠고.

내 경험상 근처까지는 와있을 거다. 최전방의 기사단장까지 모조리 동원했을 테니.

“기사단과 합류할 때까지만 버텨보죠.”

“으, 응··.”

어떻게 보면 무사태평한 것보다도 형편이 좋게 됐다.

이대로 기사단이 올 때까지만 잘 버티면, 이건 황실과 연줄이 닿는 정도가 아니다. 무려 황녀를 지켜낸 은인.

“하아. 드디어 따라잡았네. 새끼들, 다 잡은 걸 놓치기나 하고. 오랜만에 찜질 좀 해줘야겠어.”

‘뭐, 그야 이렇게 되겠지.’

물론 운명은 종결급 보상을 쉽게 내어줄 만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풀숲 사이로, 알렉산더가 막아 세웠던 사내. 도적단의 우두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나타났어···!!”

“뒤로 숨어, 요.”

“잠깐잠깐. 제안 하나 하겠는데, 그냥 저 꼬맹이가 가진 것들만 전부 넘기고 여기서 쫑내지 않을래? 이후의 잠재 고객님들이기도 하고, 여기서 더 피를 봐서 좋을 건 없잖아?”

그는 피를 한 움큼 묻힌 단검을 돌리며 파격적인 제안을 해왔다.

물건만 내놓고 황녀의 목숨을 부지한다라. 솔직히 말해서 매력적인 거래다. 저기에 나나 마리아의 물건을 얹으랬어도 혹했을 만치.

“황녀 전하. 혹시 지금 황족임을 나타낼만한 물건을 갖고 계신가요?”

“어, 응. 황실 문양이 새겨진 브로치···.”

그런데 저 녀석의 지나치게 여유로운 태도에 위화감이 들었다. 실시간으로 기사단장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는 중일 텐데?

아니 그야 전투를 벌이는 것보단 챙길 것만 챙기고 떠나는 게 빠르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급해 보이는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너, 이분이 누구신지는 알아?”

“설마 이런 데서 귀족 대접을 바라는 거야? 진심으로?”

역시. 저것들은 본인이 황족을 건드렸다는 자각조차 없다.

그럼 저 제안은 못 받아들이지. 물품 검사하다가 황녀라는 걸 알아채고서 어떻게 돌변할지 황실 서고관도 장담 못 한다.

“너무 질질 끄네. 신호탄은 안 날렸지만, 어디서 지원이라도 오는 모양이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챈 사내가 양손에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나는 이에 대응하듯 낫과 망치를 들었다.

아까처럼 수로 밀릴 때와는 다르다. 단독으로 우월한 스탯을 내세운다면, 오히려 내게 있어 호재.

[‘공산주의’가 실패하였습니다.]

[※공산주의는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

[한 번 붕괴된 공산주의는 다신 일어설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의 사용 권한을 잃었습니다.]

“뭐, 뭣···??”

당황한 탓에 움직임이 늦어졌다. 아니, 애초에 스탯 자체가 딸렸다.

카강-!!

늦지 않게 망치 소녀가 공격을 막아주었다.

그러나, 위에서부터 내려친 망치를 단검으로 가볍게 받아내는 사내에. 안심하기에는 아직 한참 일러 보였다.

“오빠, 이리로···!”

대치 상황이 풀어지기 전에 재빨리 몸을 피했다.

일시적으로 스킬이 제한된 적은 있어도, 아예 못 쓰게 되다니. 계산해 둔 것들이 완전히 흐트러져버렸다.

“···오빠. 오빠라도 도망쳐.”

단 한 합으로 승산을 점친 마리아가 도망칠 것을 종용했다. 한 번 알렉산더를 버렸던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라고.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 하겠다. 해도 멀리 가지 못할뿐더러, 애초에 너를 버린다는 선택지는 내겐 없다.

파삭-

라곤 해도, 절체절명의 상황인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망치 소녀가 거의 반파 직전에 이르렀다.

인형술사의 강점은 여러 인형 간의 연계. 무승부라도 노리려면 특수한 인형이 최소 하나는 더 필요할 터였다.

‘···인형 하나라.’

“빨리···도망쳐···!”

“마리아, 나한테 ‘인형 강화’ 스킬을 걸어줘.”

“···인형 강화를? 오빠한테?”

“인형 강화는 본인 소유의 인형을 한 단계 진화시키는 인형술사 고유의 스킬. 그리고 난 네 인형이잖아. 그렇지?”

“···응.”

빠각-!

마지막 인형이 파괴되었다.

이제 걸어볼 유일한 수는 이것뿐. 마리아가 간절한 심정으로 스킬을 시전했다.

[인형술사의 마나가 깃듭니다.]

[더 높은 경지에 다다릅니다.]

[‘전투형 허수아비’로 승급하였습니다.]

[아이] Lv. 36 – 전투형 허수아비

[HP:1942]

[MP:325]

[STR:71]

[VIT:168]

[전용스킬:’튜토리얼 존’을 습득하였습니다.]

“됐다.”

[튜토리얼 존]

우거진 숲 한가운데에, 직사각형의 컨테이너형 건물이 자리를 비집고 나타났다.

나는 그곳에 흡수되어, 튜토리얼 존의 마스터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모두들, 이 안으로!”

상대가 경계하며 나서지 않는 사이, 일행들을 안으로 들였다.

혼자만 덩그러니 남은 사내는 이내 실소를 자아냈다.

“뭘 하는 건가 싶더니만···.”

저깟 걸 불러내서, 그 안에 숨는다라.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애들 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사내는 터벅터벅 걸어 튜토리얼 존 앞에 섰다. 살기, 제로. 느껴지는 위험 요소, 제로. 들어가지 않을 이유, 제로.

“심지어 잠궈놓지도 않은 건가.”

적아 구분 없이 돌아가는 문고리를 열어젖히며. 사내는 표적을 쫓아 입성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저절로 닫힌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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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ame a Tutorial Scarecrow

Became a Tutorial Scarecrow

튜토리얼 허수아비가 되었다
Status: Ongoing Author:
Due to lack of content, I died to a tutorial scarecrow. [Your character has died.] [Hidden Achievement Unlocked! ‘Lost to the Weakest Monster~♡︎’] And then, I possessed that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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